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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고추까지 내려왔어!

도깨비 일기

by 참도깨비 2021. 9. 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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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기 전에 한길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눈썰매장을 갔더랬습니다. 엄마한테 회초리를 맞을 시점에서 동생네 집으로 도망을 갔다가 잡혀온(?) 뒤로 뾰루퉁해 있었고 못다한 방학숙제를 다 해놓은 것이 가상해서이기도  했지요. 명준이 형을 홀로 남겨두고 매몰차게 갈 때는 '이 녀석 집에 오기만 해봐라'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긴 겨울방학동안 어디 한 번 다녀온 데가 없었던 것도 까닭이라면 까닭이었지만요.


동생네와 함께 가까운 눈썰매장을 가는데, 한길이 동생 재훈이는 어딜 봐도 눈이 오지 않았는데 눈썰매장에 간다고, 아예 눈썰매장이 없다고 하더군요. 한길이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 한 번 다녀왔기 때문에 눈이 오지 않아도 눈썰매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다툼 비슷하게 이어졌지만.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 비료푸대를 깔고 언덕을 내려오던 생각이 나고 툭 불거진 곳에서 붕 떠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던 생각도 나더군요. 그 뒤로 오랫동안 미끄럼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얼음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둥댔다는 생각도 들고요. 참 재미없는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기름을 치고요.


눈썰매장에 오니 마음이 더 바빠진 두 녀석들. 비료푸대 하나면 끝이었던 때와는 달리 비싼 입장료를 물고 들어가자니 조금은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두 녀석은 하얀 언덕을 올려다 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만 하더군요.
방학 끝물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아이들이 타기엔 괜찮더군요. 플라스틱 썰매를 하나씩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아이들 따라 서서히 우리도 흥분이 되더군요. 한길이는 어린이집에서 눈썰매장에 갔을 때 혼자 타다가 넘어져 다친 기억이 있어서 어쩔까 싶었지만 언제 그랬냐는듯이 몰아세우고, 그야말로 오줌이 찔끔찔끔 나올 것 같이 재미있는 모양이더군요.


"아흐흐흐, 야"
썰매가 빠르게 미끌어지면서 언덕을 내려가는데 소리 소리가 다 나오고 신이 나더군요. 썰매 앞에 탄 한길이나 재훈이 동생도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더군요.
"아빠, 또 타자. 아니 끝날 때까지 탈 거야"
한 번 맛을 보더니 밤새도록 탈 욕심에 재빨리 일어나 다시 언덕을 오르는 한길이와 재훈이. 둘러보니 어른들이 더 재미있어 하는 것 같더군요. 함께 미끌어지면서 소리 소리 지르며 그 어느 때보다 아이와 함께 된 기쁨을 누리는 모습들. 이런 순간만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나 그 어떤 화도 필요없다는 생각과 함께 왜 이런 때를 벗어나면, 아니 저 언덕을 내려가 집으로만 가면 얼굴 바꾸고 근엄해지고 까탈스러워질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함께 미끄러지면서 잊어보는 것들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언젠가 한길이가 말했던 끝없이 이어지는 미끄럼틀 생각도 들더군요.


"한길아, 재미있어?"
썰매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한길이한테 뻔한 물음을 던졌지요.
"응, 진짜 재미있어. 재미가 고추까지 내려왔어"
처음에는 왠 고추를 들먹이는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만큼 짜릿해서 오줌이 나올 것 같이 재미있다는 말로 들리더군요. 그런 말을 남기고 올라가는 한길이 뒤통수를 보자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때그때 던지는 번득이는 표현만은 알아줘야 할 것 같더군요.


그렇게 온몸으로 빠져서 썰매를 실컷 탔습니다. 중간에 추위를 녹이려고 라면과 코코아를 먹는 시간 빼놓고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 했지요. 그리고 한켠에 따로 만들어놓은 짧고 안전한 곳에서 혼자 타는 연습도 했지요. 혼자 타는 재미가 더해서 넘어지고 엎어져고 옷이 젖어도 마냥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종종 이렇게 함께 하지 못한 게 아쉽더군요. 한참을 혼자 타는 연습을 하고 나더니 나중에는 처음 타던 곳에서 혼자 타보겠다고 하는 한길이 눈에 불이 붙었더군요. 눈썰매가 플라스틱이라 부딪히면 다칠 수 있어 걱정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출발한 뒤에 내려오라고 했지요.


무서워 할 줄 알고 조마조마했지만 의외로 잘 타는 한길이. 처음에는 옆으로 돌아서 가장자리로 나가버렸지만 다시 썰매를 끌고 올라가 다시 내려올 때는 그럴 듯하게 잘 내려오더군요. 지금까지 지르던 소리를 더 높여서 그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면서 말입니다. 신발이 젖고 점퍼마저 젖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동안 꼬박 탔더랬습니다. 양말 위에 비닐봉지를 덧신었는데도 땀과 눈 녹은 물로 얼어버린 발을 주물러가며 더 타지 못하고 가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끝이 났지요. 비료푸대 하나면 되는 위대한 놀이에다 가장 값싼 놀이였고 그 기쁨이 두 배 세 배 넘쳐났던 만큼 이 녀석들도 온몸으로 받아들인 듯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한 몸 바쳐서 놀고 온 뒤로는 조금 나아진 것 같더군요. 고추끝이 짜릿할 정도로 놀고 나니 언짢고 짜증나는 기운까지 빠져나간 덕분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짜릿한 기분과 함께 긴 방학이 끝났습니다.    

 

2005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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