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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별도 사람도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1. 9. 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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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도 별도 사람도 ”


산골짝 물을 받아 놓은 무논이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난다. 아직 갈지는 않았지만 들먹들먹 산 그림자를 담고 있는 것이 조용하면서도 벌써 꽉 들어찬 벼들의 춤을 보듯 분주해 보인다. 그 사이 사이 삽으로 쌓아올린 논두렁들은 알맞게 휘어져 있어 물고기 모양 같기도 하고 얼레빗 같기도 하다. 시루떡처럼 썰어 먹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논둑에 별꽃이 피었다. 다락다락 붙어서 앞 다투어 핀 작은 꽃들이 한 식구들처럼 다정스럽다. 간간히 봄맞이꽃들도 피고 꽃마리도 피어서 천천히 걸다가 쪼그려 앉아서 작은 꽃을 본다. 미시와 거시를 떠나 들여다 본다는 데에는 바늘귀를 찾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조용하면서도 사람 냄새와 풀냄새가 교묘하게 얼크러지는 뜻이 들어있는 것 같다. 도로록, 아니 그 소리마저 작고 작아서 들리지 않지만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꽃마리(말렸다가 피어나는 꽃이라서)를 보니 꽃말이 김밥을 먹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나서 피식 웃는다.


언젠가 아들 녀석이 별꽃을 보며 "막내별이다!" 하고 말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밤하늘에서 떨어진 막내별들! 혼자 지내기에는 심심하고 또 심심해서 자기들끼리, 막내들끼리 모여 노는 듯 흔들린다. 산바람에 흰 꽃색이 이를 드러내놓고 웃듯 더 하얗게 개구져 보인다.

그런 철부지 녀석들이 아직 물이 덜 찬 논바닥에 핀 뚝새풀들과 함께 이렇게 말한다.
"꽃도 별도 사람도 모여 살아야지"
천애고아는 아니지만 마음 안에 오로록하니 소름이 돋는 듯했던 마음에 놀란다. 가끔씩 아이 입에서 대견스런 말이 쏟아지듯, 세상을 한 눈에 꿰뚫는 듯한 말이 우습지도 않게 나오듯 그런 순간에 활짝 가슴이 열리던 느낌이다. 한 식구 한 식구 한 마을을 이루어 피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화면에 붙잡힌 눈들이 저 하얗게 키득거리는 웃음 앞에서 선명하게 잡히는 것 같다.


그렇지. 꽃도 별도 사람도 모여 살아야 예쁜 것이지. 저마다 얼킨 뿌리는 공동우물처럼 땅 밑에다 두고 제각각 흔들릴 만한 평수대로 웃고 사는 저 꽃들 앞에서 또 배우고 말았다. 화분에 하나씩 심는 고독이 아니라 어울려 피고 흔들리다가 지고 또 그 뜨뜻한 아랫목을 잊지 않고 찾아와 지지는 꽃들, 밤하늘의 별도 그렇게 맞아주는 세상에서 사람만 울뚝밸이 아니겠지.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에 괜스리 머쓱해져서 오래도록 논두렁에 앉아있었다. 시큰한 무릎이며 정갱이, 허벅지 할 것 없이 사이다 먹은 것처럼 싸안하니 별이 떠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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