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반이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오는 아이 둘이 있다. 보미와 도은이. 보미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도은이는 도서관 옆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1학년이다. 보미가 어린이집에서 올 시간이면 아동센터에 다니는 언니가 나와서 프로그램이 끝나는 다섯 시 반까지 맡겨두기 때문에 도은이도 보미와 놀아주기 위해 도서관에 온다.
"밖에 나가지 말고 숙제하고 그림 그리고 있어!"하고 보미 언니는 야무지게 말하고 다시 지역아동센터로 들어가면 도서관 작은 공간은 보미와 도은이 세상이 된다. 보미가 먼저 하는 일은 도서관을 기웃거리며 언니가 있는 곳을 내다보는 것이지만 이내 언니의 다짐대로 공책을 꺼내 숙제를 하는 것. '장구벌레' 열 마리를 만들어내는 일. 빡빡이 숙제인 셈이다. 가만히 건너다보면 도은이와 놀거리도 많아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다가 '장구벌레'라 힘들여 쓰는데, 요령이 붙어 '장,장,장,장'하고 쓰고 '구, 구, 구' 하고 쓴다. 오래 전 빡빡이 숙제를 내면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난다.
"그러면 공부가 되겠니. 귀찮더라도 장구벌레, 장구벌레 하고 써야지. 그렇게 쓰다간 장구벌레인지도 모르고 '장,장,장, 구,구,구, 벌, 벌, 벌, 레, 레, 레'만 생각난다?"
그러면 보미는 배시시 웃는다. 옆에서 보고 있던 도은이도 따라 웃는다. 보미가 숙제를 끝내면 같이 놀려고 벌써 그림 그릴 종이와 연필, 지우개를 챙겨들고 말이다. 보미와 도은이가 하는 놀이는 예쁜 공주님을 그리고 오려서 책을 만들기도 하는데, 어느 때는 뜻밖의 저지레도 마다 하지 않는다. 시와 소설책이 있는 작은 독서 공간에 둘의 비밀 공간이다. 뭘 하나 들여다 보니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건진 깡통에 뭔가를 휘젓고 있다. 슬라임이라고 하는 흐물흐물한 것에 손소독제를 섞어 강력한 슬라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약간은 놀라고 겁을 먹은 얼굴로 쳐다보는데 뭐라고 혼낼 수 없다. 이것저것 기상천외한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던 로알드 달의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어서 정말 궁금하다는 듯 정체를 물어보면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발명왕이라도 된 듯 반색한다.
"도서관에 왔으면 책은 읽어야 하지 않겠니? 도은아, 보미 동생한테 그림책 읽어주면 얼마나 좋겠니?"
사실 둘은 친구 사이가 아니지만 도은이에게는 보미가 유일한 친구나 다름 없다. 아동센터에서도 도은이를 보미와 놀아주라고 파견한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도은이에게 친구가 필요해 보인다.
"저, 글씨 못 읽어요!"
"1학년인데?"
1학년이라고 글씨를 다 읽을 줄 아는 건 아니지만 곧잘 말도 잘하고 언니로서 뭔가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것이 갸륵해서 이야기를 더 해본다.
"컴퓨터는 잘 하는데 글씨는 아직 다 몰라요."
"그럼, 보미처럼 공부해 볼까?"
"1학년은 숙제를 안 내줘서 할 게 없어요."
은근슬쩍 말을 돌리면서 숙제 없는 방과후에는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그림책을 꺼내 표지만 보여주며 제목을 읽어보라고 하니 아는 글자 외에는 읽지 못하고 '몰라요'를 입에 달고 사는 도은이를 보니 괜히 짠해진다.
초등학교 1학년용 <우리말 우리글>을 꺼내다 하루 한 장씩 해보자고 했다. 자기만의 숙제거리가 있으면 흥미를 가지고 보미와 함께 해내리라 믿으며 해본 일인데 그도 오래 가지 못할 일 같다. 어릴 때 충분히 책을 읽어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학교에서 하는 받아쓰기 방식으로는 혼란스러운 글자 체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미와 놀고만 싶은 것이다. 목공풀을 가져다가 그림 위에 덧바르고 반짝반짝 빛나는 책을 만들거나 컴퓨터를 켜놓고 그 안에서 놀고 싶은 생각 뿐이다. 그러다가 보미 언니와 틀어져서 며칠을 만나지 못하고 보미가 없는 도서관에 와서 서성이다가 가기도 한다. 그림책을 꺼내들고 읽어주려고 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보미는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배운 낱말 숙제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발명이라도 하듯 가위와 풀을 꺼내든다. 도은이에게도 야무지게 챙겨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맞벌이하다 보니 빈 구석을 채워줄 무엇인가 있어야 하는데, 싫어하더라도 내일부터는 그림책 읽어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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