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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걱정은 하지 마

도깨비 일기

by 참도깨비 2021. 9. 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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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이와 홈스쿨링을 한 지 한 달 째입니다. 말이 홈스쿨링이지 도서관에 가둬놓고 판판이 놀리는 것이지만요. 한길이가 다니고 싶어하는 영어학원을 알아본다는 핑계도 있지만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라 늦어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느 것도 대안이 아니라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학교를 버려라>(매트 헌 엮음/기영화,김선주 옮김/나무심는사람)인데, 무엇보다 한길이란 도토리 씨앗을 바라보는 마음이 간들간들하기 때문입니다. 학원이다 유치원이다 제때에 안 보내면 큰일이 날 것처럼 주위에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흔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내 안의 걱정거리와 제자리를 자리잡지 못한 생각들 때문이지요. 영어학원이다 몬테소리다 영재교육이다 저마다 좋다는 약처방들을 듣고 있어도 그리 흔들리지 않고 한길이만은 뭔가 다른 방식으로 키워보려고 마음 먹으면서도 정작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벌써 한 달째 도서관에서 치고 박고 지내면서 한길이를 그냥 내동댕이치고 있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첫날은 멋드러지게 시간표까지 짜면서 시작해 보려고 했는데 며칠을 못 가 흐지부지하고 둘 다 태업중인 셈이니까요. 이 녀석은 이 녀석대로 저 하고 싶은 대로 텔레비전 보고 책 보고 놀다가 졸리면 자고, 난 이 녀석한테 화를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되도록 맞부딪히지 않으려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지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으로는 한길이가 만든 시간표대로 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서관 수업이 없는 오전에는 차를 타고 산에 가고 강에 가고 문화재들도 둘러보면서 뭔가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더랬습니다. 이 녀석이 짜놓은 시간표를 보면 내가 방학 첫날에 짜놓은 시간표처럼 공부하고 책보고 공부하고 책보고 하는 식으로 했으니 별 다를게 없다고 느낀 탓이지요. 영어학원을 다녀와서 미술을 하고 수학공부를 하고 잠깐 놀고 텔레비전 보고 게임하는 식으로 빈틈없이 짜여있으니 어디 숨쉴 틈도 없다 싶더군요.

참, 그래도 몇 가지 성과는 있습니다. 찰흙을 사다가 엄마가 한길이한테 책 읽어주는 모습을 만들어 본 것 말입니다. 철사를 가져다가 뼈대를 만들고 찰흙을 붙여 엄마가 한길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 읽어주는 풍만한 모습을 만든 것이지요. 이 녀석이 전부터 해보고 싶은 거라 토시를 끼고 책상 한 가득 찰흙을 묻혀가며 만들었더랬지요. 처음 해보는 일이라 저녁에 엄마 오면 보여주겠노라고 신이 난 한길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재미있고 흐뭇한 일이었습니다. 책을 빌리러 온 아주머니들도 부러워서 무슨 육아 교과서를 보는 것처럼 한마디씩 거들고 가니 힘도 난 지라 재주가 곰발바닥이지만 성의껏 만들었지요. 한길이는 수제비를 뜨듯 찰흙으로 군데 군데 갈라지거나 모자란 곳을 덧씌우고 물로 매끈하게 다듬는 일을 하고 나는 굼뜬 머리를 돌려 몸 구석구석을 생각하며 만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팔뚝이 지나치게 굵고 엉덩이나 다리가 잘 나오지 않아 이상하게 되기도 해서 정말 손에 쥐가 나도록 다듬는데 내가 다 지겨워지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만들고 나니 이 녀석도 큰 일을 치룬 듯 숨가빠하더군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는게 흠이지만 뭔가 틀을 벗어나 마음껏 만져보고 만들어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확인하는 시간으로 족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몸그림이라고 큰 종이에 한길이 몸을 본 떠서 함께 그려보았습니다. 그 많은 여백을 크레파스로 채워넣는게 어려워 중간에 끊기기도 했지만 빽빽한 칠보다 얼기설기 칠해놓는 맛이 더 한길이다운게 좋더군요. 그것을 도서관 문에 붙여놓으니 한길이가 부쩍 커보이고 문지기라도 되는 듯 기특하고 든든해 보이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시도해 본 일밖에 뾰족하게 한 일이 없습니다. 그 뒤로는 몇 번을 화내고 때리고 혼내는 일도 채웠으니까요. 자기 자식을 소처럼 부려먹는 일이 쉬운게 아니더군요. 내가 갈려고 하는 밭에서 이 녀석을 "이랴 저랴, 됴됴됴" 하며 부려대니 어려운 일일 수밖에요. 이 녀석은 아직 뿔도 안 난 송아지인데다 성질은 제멋대로여서 이리 삐치고 저리 삐치고 눈물이 많으니 어찌 제대로 된 홈스쿨링이 되겠습니다. 내 욕심이 지나친 것이지요. 나만 자리잡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이 녀석한테 화를 내고 집요하게 버릇을 고치려고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으니 진땀만 날 수밖에 없지요.  

그런 나한테 한길이가 일침을 놓더군요. 턱없이 어리다고 느끼면서 이런 저런 걱정을 하는 나에게 한다는 말이 뒷걸음질 하다가 개구리 밟은 꼴이더라도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빠, 그런 걱정은 하지마"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백번 들어도 맞는 말이더군요. 많은 시간이, 아니 한길이 마음에 딱 맞아떨어지는 시간이 널널한데 조급해 할 것은 없지요. 지금까지 한길이가 스스로 책에서 발견하고 우리 삶에서 보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온 것마냥 여러 방법으로 스스로 얻고 알아가는 기쁨만을 생각해야겠다 싶더군요. 새로우면서도 지겹지 않고 틀에 박히지 않은 일이 있겠지요. 내 힘과 마음을 들이지 않고 교육시키려고 하면서 되지 않으면 화만 내고 걱정을 하며 마음 쓰려하는 것보다 행복한 길이 있으리라 보는 것이지요.

 

2004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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