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시집 <제비꽃 여인숙>
무거운 생이 깃드는 제비꽃 여인숙
열매보다 꽃이 무거운 생이었기에 그가 느낀 반쪼가리 삶을 내던지고 제비꽃 여인숙에 들었으리라. 그렇게 말해 놓고 나니 슬픔이란 제목 아래 꽃이 무거운 생이라는 한 줄의 시가 하이쿠처럼 보인다. 방랑의 가객으로 슬픔과 격정을 제 몸으로 연주해내는 시인의 길에 들어섰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주걱은/생일 마친 나무의 혀다/나무라면, 나도/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나를 패서 나로 지은/그 뼈저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눈물 흘려보는 것, 참회도/필생의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뜨건 밥풀에 혀가 데어서/하얗게 살갗이 벗겨진 밥주걱으로/늘씬 얻어맞고 싶은 새벽,/지상 최고의 선자에다/세 치 혀를 댄다, 참회도/밥처럼 식어 딱딱해지거나/쉬어버리기도 하는 것임을,/순백의 나무 한 그루가/내 혓바닥 위에/잔뿌리를 들이민다//<주걱> 전문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를 축으로 스스로 화두로 삼은 듯한 사물 속에서 새로운 시 쓰기를 하고 있음을, 헐렁하고 느슨해진 자기 삶이 드나드는 곳임을 깨닫게 된 듯하다. 그것은 다시 얼음도마 위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돼지의 몸을 쓴 시인의 눈에 잔뜩 벼린 칼날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눈은 까치 둥지에서 발견한 옷걸이에 걸린 꿈(혹시, 철사 옷걸리는/털실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아름다운 녹> 부분)이고자 하는 것이다. 또 얼음 목탁으로 자신안에 방만한 폭포의 힘(그동안 내려치려고만 했다고/멀리 나가려고만 했다고, 제 몸을 둥글에 말아 안고 있다(<얼음 목탁>부분)을 풀고자 한다. 또한 고목 속에 자리잡은 흠집에서 또다른 발견을 하게 된다. 꽃대를 타고 올랐다는 자탄을 품은 산행(맘씨 좋은 고목일수록, 제 스스로/껍질 가득 흠집을 두는구나//그럼 내가 기어오른 이곳이/꽃대였단 말이 아닌가/새순인양 구석구석 봉분도 품고 있는/굵은 꽃대궁이었단 말이 아닌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꽃대를 기어오른 무당벌레의 그것이었다고 해도 그의 마음눈은 겨울눈처럼 자기 내부를 보고 밖을 어우른다.
계란 핫도그를/다 뜯어먹자/외짝 나무젓가락/일주문 기둥이 나왔다(나무젓가락 단청)
이 부분은 얼마나 절묘한 시상인가? 죽은 나무의 영혼에서 깡마른 고행의 흔적을 보고 슬프게도 늦게 썩을 그 부문을, 자신의 지난세월을 읽기도 하는 것이다. 빨래를 내다 건 듯한 백목련 껍질의 하얀 이끼들을 읽고 있는 구부정하니 저물녘 냄새가 나는 그를 보면 아예 딛고 서있는 세상을 하나의 상형문자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겨울 논바닥/지푸라기 태운 자리"가 얼었다 풀리며 이어진 것이 하느님이 쓴 반성문으로 보이는 것도 그가 다시 되새기는 한문 수업 준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목수가 얇은 대팻밥을 일러 나무기저귀라고 하고 숲에 드는 것이 결국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운주사 천불천탑이 그리던 아름다운 폐허, 구름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다시 머물렀다 가는 자리에서 새우젓이며 꼴뚜기를 곰삭이는 뻘의 맛을 느낄 수 있고, 여러해 살이 사랑을 담은 제비꽃의 작지만 큰 세계에 눈 뜰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가 들려주는 열매보다 무거운 생을 이고 피는 꽃의 이야기속에 숨은 사랑을 그의 숨 돌리기로 인정할 수 있다. 광천에는 신랑동이 있고 천안에는 신부동이 있어 장항선을 오가는 그의 농익은 너스레도 통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뒷간에 기대 놓았던 대빗자루를 타고 박 덩굴이 올라갔데. 병이라는 거, 몸 안에서 하늘 쪽으로 저렇듯 덩굴손을 흔드는 게 아닐까//
하다가 결국 병을 다스린다는 게 거미줄처럼 느슨해지고 푹 쉬는 것만이 앞에 말한 상형문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이어 쓰다듬는 세상의 이치를, 이슬 때문에 손마디가 부드러워지고 착한 마음에 타자까지 정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양수를 여섯 번이나 담았던 어머니의 배를 강에 비유하고 가재 암컷들의 단 하나뿐인 짝인 땅덩어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일찍이 어머니의 대지가 가졌던 생명력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수컷을 매우 쳐라>라는 제목으로 펴는 사설(시장을 지키는 여자들의 궁둥이와 설익은 불내가 난다고)이 재미있기까지 하다. 스스로 자기 성기를 거부하고 여성성에서 재생산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어머니 쓰라진 젖꼭지에 알전구를 밝혀주는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소가죽가방에 들어있는 할머니의 무적 삶과 어머니가 거둬들인 자신의 쓸데없는 잔돌(돌의 이마를 짚다)을 어우르고 있다. 그것은 토막낸 생선의 전부라는 역설로 이어진다. 돌아가리라 는 굵은 활자 이 펄떡거림이 생선의 전부라고 말하고 결국 꼬리, 머리 다 자르고 나면 아가리만 발라먹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느슨해지고 묽어져서 결국은 맑아진다는 것, 병 뚜껑이 너무 쉽게 열리는 세상을 향해 궁시렁(?)거리는 것이 그가 다시 서른여덟의 절창을 대나무, 칠성공을 보름달로 내다 걸며 새로운 상형문자로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지난한 자기 삶을 제비꽃 여인숙 숙박계(너무 지나쳤나?)에 올리는 것이 아닐까?
횡설수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