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짜장면이 먹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
정말 짜장면이 먹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
- 이현 동화집<짜장면 불어요>(창비)를 읽고 -
물릴만도 한데 물리지 않는 짜장면을 먹고 싶게 만드는 운칠기삼의 '기삼이' 입담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었다. 김종광이니 성석제 작가의 소설을 몇 편 읽었던 것처럼 재치있는 입담에 녹아나서 우리가 들여다 보지 못했던 쪽창 너머 짜장면집 한 구석을, 거기에서 점심 무렵이면 넘쳐나는 들척지근한 짜장면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모두 합쳐 다섯 편의 동화들이 모여 있지만 단연 돋보이는 것은 '짜장면 불어요!' 이다. '운칠기삼' 머리 좋고 부모 잘 만난 사람들은 칠십의 운으로 살고 자기 같이 돈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은 삼십의 기술로 산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삼이의 입담은 열 아홉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럽다. 노랑머리에 폭주족 소리를 들을 만큼 빨리빨리 빠라바라빠라바라밤, 하고 신속배달을 철학으로 여기는, 집안이 어려워져 아르바이트 하러 온 용태가 공부 타령에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말에 "나비들이 단체로 수업 받고 날아다니냐? 자식 잘난 척하긴.." 하며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 기삼이. "하기 싫은 공부만 할 거라고 바락바락 우기"는 것보다 "짜장면의 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것"이 꿈이자 "개성 있는 인간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기삼이. 누구나 좋아하는 짜장면을 배달한다는 것이 사명이자 철학 없이는 못할 일이라고 말하는 기삼이는 분명 물 만난 고기입 같다.
처음 일하러 나온 용태한테도 입이 아프도록 너스레를 떨면서도 어느새 양파며 당근, 감자를 한 소쿠리 깎아놓는 달인의 경지 앞에 우리가 편견의 눈으로 보아온 노랑머리며, 짱께, 철가방, 폭주족이 있다. 철가방의 철학에는 잘못 돌아가는 세상의 사고방식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환경오염,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들, 돈 때문에 병원도 못 가고 죽어가는 사람들, 수입농산물, 스크린 쿼터에 분단까지 곳곳에 철학이 없으니 이 모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철가방의 철학치고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작가가 만들어낸 주인공의 오버처럼 보이지만 그런 소리가 기삼이 같은 아이 입에서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을까.
우스개말로 오래전에는 이 땅 구석구석 안 가는 곳이 없는 야쿠르트 아줌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기삼이가 늘씬늘씬 풀어놓는 말잔치를 보니 기차 안까지 간다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거기에다가 논두렁 밭두렁으로 시작하여 마라도까지 신속배달을 사명으로 여기는 진지한 이야기가 우리 입맛을 붙들어매고 있는 짜장면을 위하여 정말 "짜장면의 날"을 선포하고 국경일 못지 않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났다. 무엇보다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짜장면은 대통령도 먹고 젖뗀 아이까지 먹는 국민 음식이 아닌가.
기삼이는 철가방을 보물처럼 여기는, 다른 기술자들이 다 그렇듯 우리 사회에 다양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공부 잘 해봤자 의사와 검사, 판사, 박사밖에 더 하겠냐고, 공부 못하면 좀 할게 많으냐는 말은 썩은 사과 위에 때깔 좋은 사과를 얹어놓는 상자를 뒤집어 보이는 것만큼이나 통쾌하고 당당한 말이다. 그러면서도 폭주족이니까 그렇지, 그렇게 싸게 죽을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바라보는 사람들 눈을 원망하며 가슴이 찢어지려고 그런다는 대목에서는 오래 감추어둔 속내와 이 시대의 편견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기삼이가 누군가. 주문 들어왔다는 말에 불끈 하고 일어나 배달에 목숨을 거는, 그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는 기삼이가 아닌가. 그러니 여지껏 기삼이의 말을 들어주며 구경꾼 노릇을 톡톡히 한 용태로서야 기삼이의 철가방에 "짜장면 불어요!" 하고 경광등 같은 글귀를 적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 눈물 나오도록 웃긴 이야기다.
이런 소설가다운 입담은 다른 편에서도 보인다. 사춘기에 들어선 현경이와 상우 사이에 싹트고 엇갈릴 수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우리들의 움직이는 성)하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어른들의 일방통행식 삶 속에서 고민하는 영선이, 희주, 윤서의 이야기(3일간), 판사가 꿈이었다가 버스기사가 되고 개인택시 기사에 이삿짐센터 짐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추운 방에 들어와 우는 모습이 북극의 흰곰 같아서 눈물을 흘리는 동민이의 이야기(봄날에도 흰곰은 춥다), 그리고 현실은 다르지만 기삼이가 이야기했던 철가방의 철학을 지키지 못한 인류들이 저지를 수 있는 가상의 시나리오 같은 미래 없는 기억 조절 장치 속의 지구 이야기는 모두 아이들의 머릿속이나 삶을 뒤집어 보이는 주머니 같기만 하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과 짜장면 시켜놓고 한 번 이야기해 볼만 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