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은 <단추 전쟁>

참도깨비 2021. 9. 2. 15:07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은
<단추 전쟁>(루이 페르고 지음/클로드 라푸엥트 그림/정혜용 옮김/낮은산)을 읽고


"우리도 어른이 되면, 부모들처럼 그렇게 멍청해질까?"
마지막에 나오는 아이의 말을 두고 누가 선뜻 이 작품을 골라서 아이들에게 줄까 궁금하다. 롱쥬베른느 마을 아이들이 오뉴월 개마냥 얻어맞고도 자신들의 놀이를 포기하지 않고 "제기랄 부모를 가진 아이들을 불쌍히 여길지어다!" 하고 얼굴을 부라리니 혹 이 책을 읽고 나쁜 마음을 품을까 두려워 얼른 덮고 말지 않을까?

매와 욕으로 아이들을 다스리던 부모들은 일찍 어른이 된 것마냥 젖냄새나고 흙강아지마냥 나도는 아이들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 진짜 일찍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자 인습이었을테니 으레 아이들도 부모의 뜻에 따라 군소리없이 자라주길 바랄테니까.

앞서 말한 대로 어른이 되면 멍청해질까. 각자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어른들이 아이들 눈에는 멍청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놓고 동심이 어떻느니 한다면 그야말로 메뚜기가 헬리콥터가 되는 격이나 다름없다.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지금의 아이들에 대한 잣대가 달라지는 것일까. 올챙이가 개구리 되듯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 시절을 잊어버리고 빨리 빨리 어른이 되도록 닦달한다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게 아니고 사람으로 해야 할 구실을 모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는 실수인 것이 아이들에게는 매로 되갚을 만큼 큰 잘못으로 여기는 것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롱쥬베른느 마을 아이들과 벨랑 마을 아이들이 치고 박고 싸움하는 것을 보니 어린시절이 떠오른다. 대보름날이었으리라. 보름달이 훤히 뜬 밤에 윗마을과 피 터지게 싸우던 일이 떠오른다. 아마 투석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한 골짜기에 같은 냇물을 끼고 내려오는 마을인데도 윗마을, 아랫마을 해서 텃새를 부리고 겨루기를 하고 한동안 쌀쌀맞게 지내던 시절. 긴 대나무 가지를 들고 윗마을 누구 누구 머리를 깼다는 형, 짱돌을 던져 둘 셋이나 피나게 했다는 형들을 지켜보며 불깡통을 돌려 밤하늘 저 멀리 윗마을 아이들에게 던져대던 입에서 단내나던 날이 떠오른다. 그저 빠방 빠방 침 튀겨가며 전쟁 놀이를 하던 것과는 달리 머리 터지고 멍이 들고 절뚝거리도록 싸웠던 날 말이다.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한테 했더니 자기도 남자들 틈에 끼어 돌을 던지고 싸우러 다녔다고 백년손님을 만난 듯이 웃었다. 지금 아이들이 보기에는 물렁좆이 어떠니 하며 입에 담기 부끄러운 욕이 오가고 죽도록 때리고 포로로 잡아 따끔한 복수를 하는 것이 낯서겠지만 말이다. 아마 여기에 나온 이야기가 프랑스 혁명기의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이 배경이듯이 대보름날의 투석전 또한 대대로 우리 땅을 쓸고 갔던 전쟁과 지리한 싸움 속에서 빚어진 일종의 훈련과도 같은 것이었을리라.
그 시절의 들과 산은 그야말로 곳곳이 요새요, 비빌 언덕이요, 숨이 차서 기절할 것 같으면서도 더 달리고 싶던 곳이다. 대나무를 불에 그슬려 활을 만들고 조릿대살을 쟁겨놓았다가 눈이 쌓인 산으로 노루 잡으러 다니던, 형들 따라 추운 줄 모르고 온 힘을 쏟아부었던 난장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내내 재미있었다. 웃음이 실실 나오고 지금이라도 볏집으로 집을 만들고 나무 위에 요새를 만들고 무덤 위에서 썰매를 타고 싶었다. 이제는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질펀한 싸움판이자 놀이판을 보는 뒷맛이 오래도록 남았다.
왜 이 녀석들은 피를 흘려가며 싸웠을까. 벨랑 마을과 롱쥬베른느 마을 아이들. 여기서는 롱쥬베른느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서로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경쟁자요, 삶의 한 부분이 뭉텅 빠져나가는 허전함으로 이어지는 너나할것없는 주인공들이리라.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전통이란 것은 알고 보면 시시껄렁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혁명의 배경이자 원인이라고 본다고 해도 두 마을 어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은 고작 죽은 소를 치우지 않으려는 것에서 시작된 것에 지나지 않다. 그것이 영웅들의 이야기이건 아니건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싸움판에 있다. 위선에 가까운 어른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숲에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영웅의 전설을 이어받는 것이다. 아이들을 자신의 교육관에 묶어두려고 잔머리를 돌리는 시몽 선생님으로부터 벗어나 싸움판으로 갈 때나 체면과 부모의 고집에만 아이들을 묶어두려는 집을 벗어날 때 아이들은 기쁘고 마치 혁명이라도 이룰 듯이 진지해지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 전리품을 챙기고 단추를 떼고 군자금을 만든다고 해서 진짜 피비린내나는 싸움 속에서 아이들 본마음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듯이 아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즐거움이요 삶의 전부이다.

그러니 하늘이 노래지도록, 지옥과도 같이 얻어맞고 나서도 치사한 어른들을 입에 담으며 거시기 털이나 긁는 놈들을 씹어대는 것이다. 싸움이 곧 놀이이니 이런 기쁨을 앗아가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영혼을 길들이는 괘씸한 목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고 아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악순환을 낫는 것이 아닐까.
골치 아픈 문제들을 다 제쳐두고 질펀하게 욕을 하고 놀고 난 뒤에 느끼는 참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