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부작용이라고?
"그게 다 인생사지!"
"그렇다고 그게 흠이 되겠어?"
한길이가 아내와 나 앞에서 그 잘난 입을 놀립니다. 이게 여섯 살짜리 녀석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니 기가 막힙니다.
"이게 다 책의 부작용이라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길이가 끼고 사는 하예린 만화책을 더이상 못 보게 하려던 아내가 드디어 책의 부작용이라고 하니, 정말 그런 것일까요?
"아니야, 이게 사춘기가 빨리 온 탓일거야"
그에 맞서 말도 안 되는 사춘기를 꺼내 보지만 별 소용이 없습니다.
"뭐야, 사춘기라고?"
"그래, 사춘기. 괜히 화를 내고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심하니까 그렇지"
한길이는 사춘기가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발끈해서 난리입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을 이리 저리 틀다가 이상한 것을 보고 "진하게 뽀뽀하자"느니, 목욕탕에 살짝 들어와서 "여자는 원래 가슴이 커?" 하고 물어보는게 영락없이 호기심 많은 사춘기 같아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 버릇하다 보니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먹어도 거기에 적힌 말뜻을 구워삶아가며 대서는 꼴이 우습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지요.
"뿌셔뿌셔가 얼마나 칼슘이 많은데, 어릴 때는 칼슘이 많이 부족해서,,어쩌구 저쩌구.."
"비타 100 아이스크림에는 비타민이 얼마나 많은데, 1000이야!"
원재료명이나 선전에 나오는대로 홍보하는 것마냥 떠들때는 꼭 불량식품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을 때의 쪼잔함 같은 걸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막 밀어붙이며 양보를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농담이야!" 하면서 꼬리를 감추기도 합니다.
어찌 되었든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도 있으리라 봅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이 부모 말보다 앞서고 책에서 읽은 것들이 꽉 들어차서 고지식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책 속에 빠져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기 위해 일부러 책을 빌미로 씨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어느 책 몇 쪽에 그렇게 나온다고 들이미는 걸 잘못되었다거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아주 당연한 것도 "왜?" 해가며 물어볼 때는 짜증이 나려고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고 뭐든 알기 쉽게 풀기 전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서 되는 일이라는 걸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종의 강박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보면 책 속에 빠져 더딘 걸음을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인생사부터 시작하여 매미가 어떻고 민들레가 어떻고 장마가 어떻느니, 눈썰매장을 하면 오염이 어떻느니 하는게 가뜩이나 사회성이 모자라다고 하는 세상에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또래 아이들을 만나거나 어디 가서도 진짜 희한한 소리만 하고 있으면 으레 이상한 눈요기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이것도 한때라고 생각하면서도 꿈 많은 시절의 맨살 배우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에서 배울 것만 배우고 솎아내는 재미 또한 있게 마련이고 그 많은 양 속에서 자기만의 길을 찾는 것 또한 스스로 밝히게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흠이 되겠어?"
어느 정도 분위기를 알아서 적절히 써먹는 한길이의 동문서답 같은 대사 속에서 '이게 시인이 되거나 연극 배우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지금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때도 없고 그것을 어떻게 키워주느냐 마느냐에 머리가 단단히 여물어버릴 시절의 길이 있다는 믿음을 보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