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동화를 넘어서
행복한 동화를 넘어서
-카롤린 필립스의 <커피 우유와 소보로빵>(푸른숲)을 읽고 -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갈색 피부를 가진 샘과 주근깨 투성이의 보리스 별명이다. 사이좋게 피아노를 치고 있는 표지 그림으로 봐서는 아주 단짝인 개구쟁이 아이들의 이야기 같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여지없이 깨는 이야기다. 일부 과격한 소년들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독일 사회에서 내몰고 싶어하는 샘에게 있어 '커피 우유'란 별명은 자기 정체성을 뒤흔드는 엄청난 폭력의 그늘 같다.
불꽃놀이에 가려고 소냐를 기다리는 샘에게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는 아이들의 분위기만 보더라도 독일사회가 겪고 있는 정체성 문제가 드러난다. 대다수 이웃들은 그런 상황을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방관하고 있어 자칫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부르짖으며 결속했던 배타성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샘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엄마 아빠까지 그 까닭을 덮어놓고 좋게만 넘어가려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외국계 이민들이 가난과 실업을 대물림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요를 벌였던 것처럼 우리 나라든 유럽 사회든 극심한 인종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샘의 엄마 아빠는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에서 독일로 이민을 왔고 샘은 2세대인 셈이다. 지금 유럽 여러 나라가 겪고 있는 불법이민과 사회 정체성을 문제를 놓고 볼 때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인 셈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주노동자 문제와 혼혈 문제까지 포함시킬 수 있는, 한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가 서양의 침탈에 따른 정국 불안과 전쟁으로 이어진 것도 그렇듯이 이제 세계는 평화와 관용(이 책이 유네스코가 선정한 '평화와 관용의 상'을 받았듯이)이라는 화두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독일 사회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본토박이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아가고 있는 상황이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다. 일찍이 닥종이로 인형을 만들어 이름난 김영희 작가도 독일에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 맞닥뜨린 설움을 이야기했듯이 처음에는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받아들였던 이주노동자들이 독일사회의 경제를 위협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이제는 몰아내자는 식으로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웃들이 자기 목소리로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용기?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통해 자기 입장을 내비치고 있는 것과 샘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아이들이 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가 된 것이 미묘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샘은 엄마 아빠와 달리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 말도 잘 하고 성적이 좋고 피아노까지 잘 하는, 피부색만 빼놓고는 아무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만한 것이 없는 아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위기 의식이 멋모르는 소년들의 집단광기로 이어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차지하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을 홍역처럼 앓고 있는 아이다. 샘의 엄마는 전쟁으로 가족들을 잃고 독일로 와서 간호사로 취업을 하고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일하고, 아빠 또한 전차를 운전하면서도 수시로 독일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는 불안한 이주 세대이다. 그러나 샘은 엄마 아빠에게도 다 말 하지 못하는 또다른 혼란을 겪고 있다. 아빠가 고향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곳 아이들의 사진을 보더라도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는, 화염병을 던지고 검둥이라고 놀리는 현실 속에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혼란 속에 있다.
만약 샘이 공부나 여러 능력에서 뒤쳐지는 그야말로 이주 1세대였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소보로빵'이라 부르는 보리스도 자기가 따돌림당한 만큼 희생양을 샘으로 삼고 놀렸던 것처럼 새로운 문제로 나아갔을 것이다. 아니 샘이 보리스에게는 피부색을 빼놓고는 모든 것이 경쟁 상대였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문제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보리스마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샘을 놀리며 상처를 주다가 신문 기사(샘이 습격을 당하던 날, 건너편 베란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고, 그에 따른 자기 과시형 취재원이 되어 신문 기사에 났던)를 보고, 아니 그 아래 단에 조그맣게 난 습격당한 샘의 사진을 보고, 선생님의 압력에 의해 샘에게 말을 걸고 샘이 겪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리스가 겸연쩍게 말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1,2등을 다투던 샘이 없어서 자기 존재가 불투명해진 것을 내세우고 함께 경연대회에 나가기 위해 피아노 연습을 했던 게 아닐까. 샘이 피아노 연주를 더 잘 해서 자존심이 상했던 보리스가 한쪽 손에 화상을 입은 샘에게 각기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자고 한 것이 어찌 보면 화합의 결정체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화해는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이루어지지 않는 법. 어느 정도 낯설어 보이면서도 서로에게 어느 정도 앙금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보이는 만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행복한 동화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나오듯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포장용 미담으로만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샘과 보리스는 미처 해결되지 못한 한 사회의 대립각을 밑바탕에 깔고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이나 혼혈인들이 겪는 무참한 정체성과는 달리 샘처럼 2세대가 겪는 대립과 새로운 관용과 화합의 문제라는 것이 미세한 차이지만 이것 또한 행복한 동화를 넘어서서 우리가 함께 살피고 우리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샘과 보리스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변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이상 자기 피부색을 부정하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으로 가지 않아야 세계 평화가 올 수 있다. 그래서 한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 모든 대립각에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으란 법은 없으니까 - 속에서 새로운 화합과 관용의 문제가 대두되고, 샘의 엄마, 아빠와 이웃들이 시원하게 말해주지 못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커피 우유와 소보로빵'이 주는 건강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