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 공선옥의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어린이중앙) -
어디 피를 나눈 가족만이 가족일까? 곱게 늙은 얼굴만이 아름답고 별 탈없이 산 삶만이 아름다울까? 상수리나무집 사람들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 삶이 슬프고도 아름답다는 것을 어찌 이야기해야 할까? 슬픈 것은 슬픈 것이어서 자기 혼자 꼭꼭 여미고 있어야만 한다고, 문을 닫고 자신만의 성을 쌓고 허물며 지내야 하는 이야기라면 이야기가 아니지 않을까?
공선옥 작가는 사람 속에 녹아있는 심성과 그들이 겪은 속내를 알고 있는 작가답게 아무리 슬프고 괴로운 일이어도 겪은 만큼 꽃과도 같은 마음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소설가로만 알아오다가 이번에 처음 낸(?) 동화를 읽으면서 벌긋벌긋해졌다. 마음 한 구석이, 눈시울을 정점으로 해서 말미잘이라도 된듯이 벌줌벌줌 가쁜 숨을 쉬어야 할만큼 따뜻하면서도 실한 이야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이들의 아픔에 손 내밀지 않고 제각각 안쓰럽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옥주 할머니는 용화 할머니를 만나고, 그렇게 얻은 텃밭 같은 상수리집에 하나 둘 상처 입은 머리 검은 짐승들을 거두면서 잘 살아나가는 모습이 정말 작가의 말처럼 이 세상은 꼭 기울어진 대로 볼 것만은 아니란 걸 말해주고 있다. 제 얼굴에 붙은 입이라고 화냥년이 어떻고 무당이 어떻고, 양색시에 봉사가 어떻고, 그 년의 그 자식이라든지, 박복하고 모지란 것 하며 벼락 맞을 듯이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상수리나무 집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 마음에 살긋하게 들어와 사는 우리네 본 마음과도 같지 않을까?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다 맞지는 않지만 세상에 대해, 그 모지런 공 비슷한 것을 굴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말똥을 굴리는 말똥구리와도 같은 사람들에게 착한 심성이란 무엇일까? 아니 착하고 악하다는 이중법이 아닌 본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구르다 구르다 만나는 것이 또 사람 속이고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
그래서 용화 할머니와 옥주 할머니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이름이자 한 삶을 산 것이다.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놓고 40년 넘게 팔자에도 없는 점쟁이 노릇을 하며 자기를 위로하며 살았다는 용화 할머니나 정신대에 끌려갔다 돌아와서도 편할 날 없이 이 땅이 준 설움과 고통에 자기를 잊고 감추고 살았던 옥주 할머니. 세상은 약육강식판으로 힘없고 죄없는 어린 목숨과 늙은 목숨, 여자들에게 억압했듯이 자기 목소리라고는 입밖에도 내지 않고 살았던 옥주 할머니가 용화 할머니의 부름에 함께 살게 되고, 그제서야 자기와 같이 핍박받고 모지러진 삶을 사는 식구들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던가. 눈이 멀었지만 세상을 훤히 내다보는 길수와 별이 부자, 세상이 함부로 대하듯 본디 마음까지 강팍하게 다루었던 영희와 가짜 아빠와 진짜 아빠 사이에 얽힌 악연만으로도 힘든 업보를 타고 난 송이. 모두가 아프면 더 안으로 거두게 되는 손발과도 같다.
이들의 삶과 이야기만 놓고 보면 한없이 슬프고 분이 삭히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공선옥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옥주 할머니와 용화 할머니가 뿌려놓은 햇볕 한 줌처럼, 보살과도 같은 삶에서 얻은 힘으로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말이다. 내가 힘들게 살았어도 나보다 더 어렵게 사는 목숨들만 보면 거두어주고 싶고 이야기 들어주고 싶고 그들이 겨울을 이겨낸 제비꽃마냥 제 안에 복음이 들때까지 바라봐 주는 일을 성스럽게 하는 존재들의 이야기.
깃발과 상수리나무가 비바람에 휘몰아치며 제 몸집보다 거센 소리를 냈던 것은 이 집 식구들이 몸과 마음에서 털어내고자 했던 소리들이다. 한데 모아주고 사는 힘을 내게 해주었던 큰나무의 보살핌 그것이었다. 주인공들은 거기에 깃들어 살았던 목숨들이고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그런 목숨들을 살피고 받아들이고 그 언덕에서 쉬어가며 생각하라고 만들어놓은 천지신명의 그늘이지 않을까.
* 이 책은 품절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