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일기

동화책은 그림이 없잖아!

참도깨비 2021. 9. 3. 15:59

"침 놓는다 콕!"
한울이가 보리 아기그림책에 나오는 이 한 마디에 자지러들면서 좋아합니다. 한길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책에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이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성게야, 성게야. 뭐하니?" "침 놓는다, 콕" "으앙, 따가워!" 하는 짧은 대화가 그 어떤 대화보다 재미있는 셈입니다. 한울이가 무릎에 앉아 몇 번이고 이 책을 읽어달라면서 침 맞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머지 쪽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톱으로 가르려고 합니다. 으레 그림책이 그렇듯이 마지막 표지까지 넘길 때까지 재미를 쏙쏙 빼먹는 재미가 쏠쏠한 것입니다. 하이샤 아키코의 '달님 안녕'을 보면서 손을 억수로 흔들어대며 "안녕, 빠이 빠이" 하고 나서 뒷표지에 나오듯 혀를 내밀어야 끝나는 그림책 보기, 정말 대화가 없는 집안에서도 해보고 나면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이야기거리가 생겨날 것 같지 않나요.


한울이가 그림책에 푹 빠져 있는동안 한길이는 '역사야, 놀자' 라든지 '생각하는 물고기' 같은 책에 푹 빠져있습니다. 명준이 형이 주고 간 '살아남기' 시리즈도 책장이 닳도록 읽고 있습니다. 알림장에 동화책을 가져오라, 몇 권 읽고 엄마, 아빠 앞에서 이야기 들려줘라, 하는 것이 나올 때마다 앞엣 책들을 챙기며 물 오른 티를 냅니다. 분명 알림장에는 동화책이라고 했기에 "한길아, 동화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하고 물으면 이 녀석은 어디서 들었는지 딴전을 피웁니다.


"동화책은 그림이 없잖아"
"왜 동화책에 그림이 없어?"
동화책은 그림 없이 글만 있다는 것을 잘못 알고 하는 소리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미없다는 투로 둘러둘러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동화책이라고 왜 그림이 안 들어가겠어. 1,2학년 동화에는 그림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얼마 전에 읽었던 '슬픈 종소리'도 동화책인데 그림이 많이 나오잖아."
"그건 동화책이 아니잖아. 그림이 더 많이 나오는데."
그림책도 아니고 동화책에 그림이 뭐 그렇게 많이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아직은 그림책이 더 좋은 때인데 동화도 읽어야 하니까 그림도 많이 나오는 거지"
막상 말해놓고도 맞는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어제 가져다 준 '쥐포반사'도 그림이 많이 나오잖아"
"그건 동화책 아니던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저학년을 위한 동환데"
"여길 봐, 1,2학년을 위한 책동무, 라고 써있잖아"
이제 별별 것을 가지고 다 트집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마다 재미를 붙이기 위해 써놓은 책 설명을 곧이 곧대로 들먹이며 동화책의 구분을 지으려는 심뽀가 훤히 보이더군요.
"책동무가 되어주겠다는 거지, 동화가 아니라는 말이냐?"
동화책 한 번 읽히기 어렵습니다. 다른 책에 빠져서 동화책은 거들떠 보지 않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자기가 알아서 보지 않고서야 억지로 떠밀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알았어. 내가 읽어줄게. 쥐포반사!"


틈틈히 이렇게 읽어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우치면서 '쥐포반사'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 두 편을 읽어주었습니다. 한 겨울에 교실 난로에서 쥐포와 오징어 따위를 구워먹게 하는데 쥐포를 가져온 선화(국어책을 더듬거리며 읽는다고 바보라고 부르는)와 친구들 이야기인데 가슴에 엑스자로 손을 얹고 "반사!"를 외치며 싫다는 표시를 하는 대목마다 따라 하는 한길이. 옛이야기를 듣고 자는 것처럼 꿀맛 같은 시늉을 합니다. 제 아무리 자기가 알아서 읽는다고 해도 읽어주는 재미는 더 독특한 맛이라는 걸 알 것 같더군요.


"어때, 재미있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좋아하는 한길이. 아까부터 자리를 뺏긴 한울이가 셈을 내며 한길이가 앉은 무릎 쪽에 앉으려고 하다가 성에 안 차는지 엄마를 찾으며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쥐포 때문에 안달이 나서 조금이라도 먹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 때문에 웃는 대목에서 저도 따라서 웃습니다. 어느 때는 가만히 한쪽 무릎에 엉덩이 조금 걸치고 끝까지 볼 만큼 분위기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방안은 온통 한울이가 빼놓은 책을 어지럽지만 두 녀석 다 책 읽어주기로 즐겁게 해주고 잠자리에 들게 한 보람이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옵니다. 한창 말을 배우는 한울이가 쉴새없이 엄마, 아빠를 외치며 외계인 같은 말을 하는 것도 그림책과 동화책 못지 않은 이야기이듯이 따뜻한 잠이 밀려오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