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책을 읽지 말란 말이야?
억새밭에서 바람 맞고 시를 쓰고 돌아오는 길에서 난상토론을 했습니다. 이렇게 나온 길에 자연스럽게 한길이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꺼낸 것이었는데 된뚱맞게 받아들이는 한길이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진 것이지요. 아, 그 전에 한길이가 책에서 읽은 날씨 이야기로 아는 척을 하며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지만요.
"황사가 불면 절대로 나가지 말아야지"
어제만 해도 아침 일찍 일어나 엄마와 함께 산책을 다녀왔는데 는개가 내려서 맞고 들어와서는 "황사비는 산성비래. 얼른 옷 벗고 씻어야 해" 하고 말했거든요. 그 말이 대수롭지 않게 들리다가 자꾸만 걱정거리만 늘어서 한마디 한 것이지요. 저녁에 오랜만에 고기를 구워먹는데도 부탄가스통이 터질 수도 있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한 걱정을 하면서 불판에는 올 생각도 하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책에 나온 대로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책에서 읽어 알고 있는 사실이야 별 탈이 없겠지만 그걸 걱정하며 움츠러드는 이 녀석을 보기가 안타까웠거든요.
"그러니까 완전히 스펀지인 것 같아. 쥐어짜서 물을 빼야 하는데 그대로 머금고만 있으니"
마침 한길이 이야기를 하다가 고모가 한 말도 생각나고 문제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 것이라는 진단 아닌 진단까지 오고 갔으니까요.
"그럼, 아까 억새밭에 혼자 남게 되었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거야, 나침반이 있으면 되지. 그리고 수레를 만들어서.."
"거기서 나침반이 무슨 필요가 있니?"
대뜸 나침반을 들먹이는게 한참 옆구리에 끼고 살았던 '~에서 살아남기' 시리즈가 떠오르더군요.
"난 사람들한테 이야기해서 버스 타고 갈 건데"
해린이 누나는 많이 겪어본 탓인지 금방 입 두었다 어디 쓰냐는 식인데 이 녀석은 책에서 배운 대로 말하니 기가 막히더군요.
"그럼, 거기서 나침반 보고 걸어서 올 거야?"
"아니, 수레를 만들어서 타고 간다니까!"
"네가 끌고 가는 건데 수레를 어떻게 타냐?"
답답하기로는 해린이 누나도 마찬가지인데 이 녀석은 잔뜻 찌푸린 얼굴을 하며 혼자만의 발명가답게 굴더군요.
"사람들한테 어찌 어찌 되어서 이렇게 되었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그걸 나침반 보고 온다고?"
아직 사람들 앞에서 뭘 물어보거나 하는 것이 낯설고 부끄러운 한길이다운 대답이었지만 '저렇게 해서 어찌 한 세상 사누?'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래도 나침반 보고 지도 보고 수레 타고.."
"그건 한길이가 책만 너무 봐서 아는게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진짜 바람부는 억새밭에 혼자 떨어뜨리고 온 것처럼 상황을 몰아간다 싶었지만 어느 정도 기를 꺾어놓을 셈으로 부추겼지요.
"그럼, 책을 읽지 말란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책에 나온 것만 믿지 말고 네가 스스로 겪어보고 알아보는게 중요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아까처럼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도움을 청할 수도 있는데 나침반이나 수레가 어떻고 하니까 책에서 나온 것만 믿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말하는 거야"
"날씨 이야기를 보더라도 너한테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면 되는데 금방이라도 자기한테 닥칠 일마냥 걱정하니까 이러다가 걱정만 하다가 아무 일도 못할까봐 그러 거고.."
이 녀석은 잔뜩 불거져서 자꾸만 책을 읽는게 뭐가 잘못이냐는 식으로 몰아가고 어떻게든 알기 쉽게 주입을 하려고 하니 대화가 될 수밖에 없더군요.
때마침 아내가 '왜 안 들어오냐, 추운데' 는 전화만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이어졌을 테지만 오늘은 그 정도로만 그치고 다음번 설전을 기약했습니다.
2006년 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