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한 나날

돌부처를 섬기는 마을

참도깨비 2021. 9. 6. 16:20

“ 돌부처를 섬기는 마을 ”


돌부처를 섬기는 마을 -운주사

언젠가 '절터는 절터로 남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시를 쓴 적이 있다. 충주 소태에 있는 청룡사지, 미륵리 절터가 그렇고 운주사까지 절터는 툭 터진 바람을 맞으며 쉬어가고 절집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자리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복원할 것이 남아 있다면 모르겠으나 주춧돌만 남은 곳에 새로운 절집을 짓는 것이 오히려 감흥(감흥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겠지만)을 떨어뜨리는 것이 될 것 같고 황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널따란 절터에 앉아 그 여백이 주는 깨달음 또한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운주사를 처음 보았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일주문이 들어서고 새로운 절이 들어서서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이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골짜기를 따라 돌부처들만 소림 무술영화처럼 보였더랬다. 완행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들어가 흙먼지 가시는 길을 따라 보던 돌부처들, 흙탕물 가라앉으며 보이던 개울물 고기처럼 날 설레게 했더랬다.

돌부처를 섬기는 마을
-운주사


1.
하루아침에 솟았다는 천불천탑이라면
이 땅 비무장지대 어디에 왕왕대는 확성기만 한 꽃도 있으련만
전설로 사라진 절터에서 먹먹한 귀를 후비는 오후
햇살 아래 눈을 감으면 월경대마냥
붉은 띠로 몰려오는
세월은 문둥병인지도 모른다
귀 코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마제석기마냥
서 있는 불상들을 보면
가뭄에 일어선 개울물들이 자꾸만
욕봤습니더 욕봤습니더 하며 흐르는 것만 같다

2
이호신 作 <운주사 천불천탑골>115 ×225.5 수묵담채가
대영박물관으로 간단다
홀아비 심정 과부가 알아준다고
아무리 그림이더라도 이 땅에 남지 못하고
까짓것 톡톡히 값을 치르더라도
이 땅 우리들 벽에 걸리지 못하고
120평 되는 대영박물관의 한국관으로 팔려간단다
지금도 황색 인종 알기를 개만도 못하게 본다는 코쟁이들한테
저게 뭐꼬 알기나 할는지
전리품 속에 잠들려 한단다
 
그래서 어쨌거나 운주사 터에 보리개떡 잔치가 열렸다
보릿고개에 스멀스멀 아지랑이로 솟은 골에
몸으로 보시한 개떡들을
개다리소반 같은 탑에 층층 올려놓고 실컷 먹으라고
굶주린 뱃가죽 위에 솟았던 저 잔칫상이 남의 나라로 간단 말인가
산이 많아 구름도 머물고 잘 타넘는
이 땅에 있지 않고 간단다
아이들이 대웅전 터에서 비석치기를 하고
큰 스님 누우신 머리맡으로 어린 동백이 눈을 뜬다
 
 
   일주문 대신 가게 점빵 같은 농부의 집에 있어 외려 야외조각장이나 장터처럼 보이던 운주사터는 그야말로 판타지 그대로였다.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와불로 올라가는 길에 세워진 '큰 스님 뵈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것도 손때 묻지 않은 농부의 달필로 씌어져 그야말로 가풀막진 산길이 더 긴장되었던 것을 떠올려 보며 시를 썼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등성이에 앉아 내려다 보던 골짜기와 구름들 속에서 진정 여기야말로 돌부처를 섬기는 마을이라고 생각했었다.
 
   돌부처가 곧 미륵이어서 먼 훗날 고된 삶을 접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실현이 될 것 같은 비장함마저 들던 운주사. 아기장수 설화에 나온 것처럼 겨드랑이에 날갯죽지가 달린 민중의 영웅의 나오고 군사가 나와 골짜기를 타고 진군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 오래 머물렀던 운주사. 정말 허름한 마을집에서 잠을 자면서도 그런 꿈을 꾸었더랬다.
 
   지금은 절터라기 보다는 절집의 정원처럼 되어버렸지만, 큰 스님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가 반들반들해졌지만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저 큰 둥치가 일어서는 날이면, 그런 날이면 평화로운 돌부처, 미륵의 세상이 올 것 같기만 하다. 여러 날을 두고 한 부처 한 부처를 만나며 골짜기에 머물러도 좋을 여백이 남아있다. 어떤 마음으로 들어섰다가 나오느냐에 달렸지만. 장마철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구름들마저 천불천탑이 되는 때 간다면 하루아침의, 그 꽃피고 지는 찰라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