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원남반점
“ 다시 원남반점 ”
아내가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 원남반점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다. 잠결에도 팩스를 보내고 감사를 받느라 혼을 빼놓은 듯한 얼굴로 짜장면 이야기를 했을 때는 무심코 얼마나 맛있는 면발이기에 내가 보여주는 시보다 먹고 싶다고 할까 하는 유치한 생각까지 했더랬다.
그러나 그 원남반점은 직장을 가진 여자들이라면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진 절해의 고도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달거리 비슷한 정체성 같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원남반점
아내가 잠결에 얘기하던 원남반점
늘 무거운 몸으로 오고 가는 찻길도
몸뚱이도 불어터진 짜장발 속에서 꼬이는
차를 놓치거나 서서 오는 길에서도
그곳은 그리운 것 다 쏟아버린 잔반통처럼
꾸물꾸물 냄새로 뼈를 채운다
그곳은 몸이 불시착을 위해 튕겨져 나가고 싶은 지점인 지도 모른다
냉동고 속에서 나올 줄 모르는
돼지고기 한 점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휘갈긴 붓처럼 지나가는 나무들
가도 가도 반죽으로 치대는
비 오듯 쏟아지는 그 문
짜장과 짬뽕 사이에 걸린 발 같은 것
눈 씻고 봐도 흔들리는 빛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햇볕 한 줌과 같은 것이다
그래 때론 사랑도 표지판이나 이정표
원남반점 같은 간판 속에 터무니없이 빠져들고 싶은
4차원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아내는 늘 그곳을 지나치며 짜장 한 그릇을 먹고 싶어 한다
단무지 여러 조각으로 찢어 먹으며
질긴 고기 조각을 씹듯 느긋한 한 끼 식사를 하고 싶어한다
잠자리 옆에서도 늘 난 그 같은 짜장 한 그릇을 못 먹이고
다시 돌아가 자유의 몸으로 혼전성교하고 싶어하는 남자
애인의 느낌으로 원남반점을 떠올리는 것이다
불어터진 시를 배달하는, 늘 두고 온 빈 그릇 같은 것이다
오늘도 차에 깔려 죽은 고양이들을 타 넘으며 오는 아내에게
발버둥치며 아무리 매달려도
하늘에 뜬 기공, 면발의 힘을 시로 보여주지 못하고 불어터진 가슴과 입을 맞춘다
원남반점에 가고 싶다
지금도 아내는 그 느긋한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바쁘다. 아예 일에 청춘을 빼앗겨버려 자기 계발이니 뭐니 하는 말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보일 뿐이다. 처음 원남반점을 떠올릴 때는 직장 남자들이 보름달처럼 꽉 찬 배를 보고도 "애 좀 미뤘다 낳으면 안 될까?" 하는 식의 되지도 않는 농담을 했지만 지금은 자기들은 포커에 주식 현황 보느라 모니터에 빠져 있어도 일 하나 거들어주지 않으면서도 왜 야근 같은 것을 하느냐는 식으로 말할 정도로 뒤죽박죽이다. 밤늦게, 아니 조간신문보다 더 늦게 돌아와 지글지글한 일 이야기를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한 며칠 죽은 듯 자고 싶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어찌나 뼈저리게 들리던지 원남반점 그 빨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번에는 샛길로 들어서서 원남반점의 짜장면 한 그릇 느긋하게 먹고 일과는 아주 딴길로 들어가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데 나는 돌아돌아도 내 생각만 하는 존재인지 다시 원남반점에 혼자 들러서 어설픈 시만 쓸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원남반점
취재를 끝내고 돌아오는 국도에서
아니 식도가 뒤어버린 듯 배고파서
원남반점에 들렀다
어둠이 몰아넣은 외통수라도 되듯
길 위에서 하는 생각이라고는
어디서 뭘 먹느냐 하는 것일 때가 많다
먹을거리를 생각하다가 놓쳐버린
국도변의 음식들을 아쉬워하며
시간만 쫄쫄 가게 되는데
이럴 때 가장 간단한 것은
역시 짜장면 집이다
속도를 늦추고 옆길로 새서는
평생 한 번 지나갈까 말까인
소읍에 있는 짜장면 집 손짜장을 먹는 것이다
막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도 반갑게 맞아주는
맛있게 먹고 나서야 비로소 불을 끄는
왜 그집 간판이 붉은 바탕이었어야 하는지 생각할 것 없이
그 홍등과도 같은 불빛에
입안에 몇 조각 남은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도 좋으리
국도변에서 살짝 비껴나와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원남반점에 앉아 짜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회한에 젖은 것마냥 어설픈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잘 비벼지지 않는 춘장과 면발처럼 버글거리는 것 같았다. 배가 고파도 꾸역 꾸역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만큼, 난 그 기름칠한 듯 잘 비벼지지 않는 아내와 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가 속수무책으로 귀만 열어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시에 빨간 밑줄을 치고 싶어 한다. 아니, 스스로 말하고 싶어한다. 어디까지나 내가 느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저 그 빨간 간판처럼 불 밝히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느껴서일까?
"나도 정말 시를 쓸 수 있을까?"
며칠 전에 한 말이 옆구리를 쑤신다. 한 때 시를 썼고 내가 시집을 내면서 가장 먼저 한 말도 아내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말이었으니 아주 오래 전부터 빗나가고 있던 이야기를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죄를 지은 듯, 아니 선녀의 옷을 가까스로 내주듯 잡히지도 않는 시를 이야기했지만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고, 뭐라고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닌 채 증발해 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에서 떠날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무슨 시를 쓸 수 있는지 아무런 답을 줄 수가 없다. 그저 원남 반점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 먹는 것일까? 아니면 훨훨 해방시켜줄 로또일까?
다 소용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난 다시 내 시를 잡고 앉아 아내의 원남반점을 떠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