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한 나날

권정생 선생님의 소 이야기

참도깨비 2021. 9. 6. 16:26

 “ 권정생 선생님의 소 이야기 ”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한국 어린이문학의 자존심인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평생 병든 몸으로 오히려 티끌 같은 목숨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내리내리 부어주었던,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 세상 모든 신들이 당신이 종지기로 살았던 교회당에 모셔놓고 예배를 하고 싶다던 선생의 바람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다.

오늘은 선생의 동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인의 시보다 훌륭한 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소 1


보릿짚 쌀고
보릿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그리고
코로 숨쉬고

엄마 꿈 꾼다.
아버지 꿈 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쫙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릿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선생이 낸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에는 말 못 하는 짐승들부터 나온다. 그 가운데 소 이야기는 우리네 민족이 살아온 삶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책으로도 나온 '황소 아저씨'에 달밤에 카랑카랑 빛나는 보릿짚이 눈에 선하게 나오는데 이 시에도 역시 '보릿짚 깔고/보릿짚 덮고/보리처럼 잠을' 자는 소 이야기가 나온다.

소는 저래야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데 뒤바뀐 삶을 살아내야 하는 저 많은 육우들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친 정치적 의도일까?  소를 대신해서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를 것만 같다. 인간들을 위해 뼛골 으스러지도록 살아야 하는 소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미국의 도축장으로 가는 소들은 어떤 마음일까? 자꾸만 주저앉는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데 소된 자리에서 얼마나 아플까?


소 2


짐수레는 무겁고
바퀴는 뒤로 잡아당기는 오르막길.

가까스로
가까스로 올라가면
네 개 다리가 떨린다.

포플라나무 단풍잎이
힘 없이 떨어지는 길바닥에
그만 주저앉고 싶어진다.

등어리에 흥건히 배인 땀방울
못 견디게 헐떡거리는 양쪽 어깨.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먼 곳에서 어른거리는
언니야, 누나야.

우리 모두 힘껏
힘껏 살아요.



멀리 미국의 농장에서 사는 소들도 풀 뜯으며 멀리 멀리 "음머어~" 하고 울던 소리를 낼까? 사는 모양은 달라도 아무래도 "언니야, 누나야//우리 모두 힘껏 살아요" 하며 울겠지?


소 3


소야, 몇 살이니?
그런 것 모른다.
고향은 어디니?
그것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 성은?
그런 것 그런 것도 모른다.
니를 낳을 때 어머니는 무슨 꿈 꿨니?
모른다 모른다.
형제는 몇이었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

소는 사람처럼 번거롭기가 싫다.
소는 사람처럼 따지는 게 싫다.
소는 사람처럼 등지는 게 싫다.
소는 들판이 사랑스럽고,
소는 하늘이 아름다웁고,
소는 모든 게 평화로웁고.



선생은 쇠귀에 경읽기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무담시 짠해져서 묻는 것이다. 싸고 질 좋은 쇠고기 운운하기 앞서 한우가 비싸다 하지 앞서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한없이 평화로운 몸집에 등심, 목심, 채끝 하는 식으로 부위별 금을 긋지 말고 한 번쯤은 소들의 본성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소시장에 데려가는 길이 안쓰러워서 울었다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하지 않을까?


소 4


벙어리야, 벙어리야.
소는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소는 가슴 속에 하늘을 담고 다닌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어디서나 고달프지만
소는 온몸으로 그림을 그린다.
소는 온몸으로 시를 쓴다.

코뚜레에 꿰여 끌려 다니면서도
소는 자유를 잃지 않으려 남을 절대 부리지 않는다.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척 하는
벙어리야, 벙어리야, 벙어리야,
소는 무거운 짐 혼자서 끌고
소는 온몸으로 이야기하면서 간다.
슬픈 이야기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천천히 들려 준다.




그렇다. 소는 그렇게 벙어리처럼, 바보처럼 아무 말이 없다.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온몸으로 슬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어쩌면 그러기에 미안한 마음 없이 먹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직하게 "소는 몸뚱이가 무거워서/네 개의 다리로 걸어야 한다/두 다리로 뻣뻣이 서서 걸어도 되는 주인과 걸으며/소는 어쩐지 죄스러워" 서 "머리 푹 숙이고/앞발 발자국 위에/뒷발 발자국/앞발 발자국 위에/뒷발 발자국"(<소 6>)을 얹으며 간다는 마음 앞에 누군들 숙연해지지 않을까?

소 7


장터 푸줏간 옆을 지날 때마다
소는 거기 매달린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보았다.
바깥까지 풍겨 나오는 냄새 때문에
처음엔 신기했다가
그 다음엔 무서웠다가
다음엔 왠지 처량해졌다.
그 피 냄새와
시뻘건 고깃덩어리가
살아서 울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장터 푸줏간 옆을 지날 때마다
어디선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
그리고 동무들과 동생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초고속으로 도살되는 공장의 고깃덩어리들을 보면서 자꾸 무서워진다. 저 많은 촛불들은 소를 위한 진혼곡일까? 아니면 애지중지 키우던 개를 잡아가는 개장수를 미워하는 어린 마음일까? 그것보다 훨씬 정치적인 시민불복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잠깐 멈춰서서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푸줏간 옆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형제일 지도 모를 시뻘건 고기덩어리를 바라보는 마음이 살 떨리게 다가온다.

소는 풀을 뜯어 되새김질을 해야 하는 짐승이다. 요르크 슈타이너가 글을 쓰고 요르크 뮐러가 그린 그림책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비룡소)에 나오는 곰처럼 공장노동자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소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무엇일까? 지금 한창 진행중인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문화제에 권정생 선생의 시를 걸개로 올리면 어떨까? "살아서 울고 있는 것만 같"다는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위해서라도 진혼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