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한 나날

그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참도깨비 2021. 9. 6. 16:32

“ 그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

 


어떠한 인간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투명하지 않다.

나홀로 있는 곳에서 나는 많은 인간을 만나며
나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으로 깨어지고
엄숙한 나의 목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내 눈은 순수한 시선의 그물을 유지한다.

우리는 험난한 산과 바다를 지난다
미친 듯한 나무들이 맹세한 내 손의 길을 가로막고
방황하는 동물들은 생명을 산산조각내어 나에게 몸을 바친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의 영상이 풍성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연과 거울이 흐려진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늘이 비어 있다는 것이,
나는 외롭지가 않은데.


폴 엘뤼아르, <이곳에 살기 위하여> 부분

진정 시인은 외롭지 않은 것인가. '나의 눈이 폐허에 부딪치지 않는다면/나의 눈은 어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유일한 자유의 공간은 내 마음 속 깊은 곳/그것은 죽음과 친숙한 공간/혹은 도피의 공간'에 '상처 입어 움츠러든 날개가 그곳을 이리저리 날아다'(앞의 시)니는 곳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흐르지 않는 물 속에 침몰하는 선박/죽은 자처럼 나에게는 단 하나의 원소밖에 남지 않' 은 '밤' 의 대지를 그리고 있어서인가.
그러나 진정 대지(大地)란 있는 것인가. 어머니의 대지런가, 살아 있는 목숨을 산산조각내어 바치는 대지런가.

남의 나라 시인의 것이지만 진정 그곳에 살기 위한 대지란 없는 듯하다.
언젠가 돼지 부속구이집에서 벗들과 술을 마시다가 고향 이야기가 나왔다.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 사는 시인들을 안주 삼아. 술자리에 있었던 시인들 모두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 덩어리였다. 재경 향우회나 영포회 같은 동향을 자랑하는 끈끈한 질곡이 아니어서 일찍이 "고수레"하고 내다버린 듯 시집 말미에 고여있는, 그래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성경구절을 떠올리며 술잔에 묻은 입술 닦아 건네는 시인들을 위해 건배!

팔 것 팔고도 먹을 맹큼은 남어야 써
남은 것이야 내년 농사 차지 아니겄나
어머닌 어린 열무밭에서 잡풀을 솎아 고랑에 두어 밟으시며 하루하루를 캐어 상에 내셨고,

이안, <열무밭> 부분


고향의 어귀에서 길을 보지 못했네
출세의 바람 무성한 옥수수 밭머리에
버려논 호미자루야 썩을 일이지만

(줄임)

서울길 멀드라
호미날 붉은 녹이 호미를 훔쳐내듯
한 세월도 가물가물 저물었으나
그만그만한 내력들은
흩어져도 종내 흩어진 게 아니었구나

북채 한번 잡지 못하고
한 뼘 한 뼘 밀려와서
이제 송파구 큰길 따라
풀 뽑기 다니시는 아버지

<위의 시>


출세를 위해 인물을 보낸다고 하지만, 정작 출세하지 못하고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출세를 위해 떠나온 서울길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한 뼘 한 뼘 밀려나온 아버지의 고향까지는 시대가 낳고 자본이 낳은 대이동이라고 위안할 수밖에 없을까. 고향에는 불알친구 하나 없고, 있더라도 멱감고 토끼몰이하던 불알친구가 아님을, 달라진 위상 속에서 일찍이 가늠하며 지도의 등고선처럼 가까워질 수 없음을 속절없이 시인하며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내 친구의 어머니는 더이상 내 친구를 낳지 않는다
내 친구의 학교는 더이상 내 친구를 가르치지 않는다
내 친구의 바다는 더이상 내 친구와 놀지 않는다

친구의 마당엔 녹슨 경운기만 남고
친구네 학교엔 이승복 어린이만 남았다
학교 솔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수협창고는 파리나 키우고
자꾸 깎여나가는 해수욕장 모래밭은
파도만 키운다

친구는 집에도 없고 학교에도 없고
해 떨어지는 바다에도 없다.
친구는 이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함께 놀 친구가 없어서
오지 않는다.

친구가 없는,
심심한 마을을 지난다.

윤제림, <친구의 집을 지나며> 전문

 
 

친구가 없기에 마을과 학교와 바다마저 비어버렸다. '더이상 내 친구를 낳지 않는' 친구의 어머니와 '학교'와 '바다'는 다시 들어도 얼마나 섬뜩한가. 시인은 자신의 고향을 친구의 고향에서 다시금 확인하다가 꼬리를 내린다. '친구가 없는,/심심한 마을'이라고. 더이상 낳지 않는 친구는 지도의 등고선마냥 세상 한 굼부리로 그려진 친구, 더이상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친구(죽은 친구일지라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의 시 도처에는 지팡이처럼 의지가지한 외로움이 묻어난다.

꽃그늘 평상에 앉아
지갑 속의 사진을
꺼냈더 넣었다,
저무는 해를 맞고 있는 사내와.

윤제림, <강> 부분

씻길 데도 없는 몸을 아직도 씻기도 있는
시냇물이나.

윤제림, <백담사의 물> 부분

"꼭 좀 붙들어놓으시우, 꼬옥!"
지금쯤은 서울행 기차를 탔을
한 어머니를 기다리며
눈으로 붙들고 있는
꽃잎 하나.

지지 마라,
네 어머니 오신다.

윤제림, <꽃잎> 부분

유년의 모습처럼 보이는 꽃잎 하나에게도 눈시울을 던져 어루만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 들먹이는 시인들은 공교롭게도(?) 충북 제천이 고향이 시인들임을 뒤늦게 밝힌다.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공장이나 농사일, 조금은 형편이 좋아 면서기라도 하지 않는 한 출세를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거나, 댐 공사로 수몰이 되어 일찍이 떠났거나 그들의 시에서는 한 정조의 느낌이 묻어나기도 한다.

철뚝에 매였던 소 한 마리가 붉은 놀 속으로 사라진다.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하늘 밖까지 배웅을 나간다.
저희 집 손님도 아닌 나를 플랫폼까지 따라나온
산동반점의 늙은 개가, 기차도 기다리지 않고 떠나는 해를
바라보며 몇 번인가 겅겅 짖는다. 인사인 것 같다.
자꾸 시계만 들여다보던 역장이 내 얼굴과 개를
번갈아본다. 개가 답하듯이 짖는다.
서울 가는 국밥 한 사발이라고 일러주는 모양이다.

윤제림, <서울 가는 길> 전문


'꽃잎' 한 장이나 '국밥' 한 그릇이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 언저리에 몰려있는, 병목 같기도 한 물자리에 칼칼한 등지느러미 세우고 몰려다니는 산란철의 물고기들처럼 곳곳에서 토해내고 있지 않은가.



어젯잠 꿈에 고향엘 갔는데
집 앞 냇물에
버들치가 아주 여러 마리 놀고 있어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
가까이 가 웅크리고 앉았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건 버들치가 아녔어
버들치 그림자였지
더 신기했던 건
두 손으로 손바가지를 만들면
이 그림자 물고기가 고대로 들어와서
곰심곰실 노니는 거라
할머니 보여드리려고
'어머이, 이것 봐유, 이 물고기 좀 봐유!'
소리치며 집으로 달려가다가 그만,

잠이 깼지 뭐냐!
지금은 충주댐
물에 잠겨 갈 수 없는 아버지
고향 이야기
곰실곰실 손이 가려워지는
꿈 이야기

이안, <아버지 고향> 전문



물에 잠긴 아버지의 고향도 얼마나 아버지를 불러세웠을까. 아버지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고대로' '곰실곰실'하며 추임새를 넣는 아버지 속의 아들, 고향 속에 겹쳐있는 고향을 보라. '그림자' 였을 뿐이지만 손바가지를 만들면 금방이라도 손이 가려워지는 그것은 지울 수 없는 평생의 어머니 손맛임에 틀림없다.

단장한 키에 풋풋한 살내 나는 여자를 데리고 모깃불 사이로 형이 보였다 어머니 맨발로 뛰쳐나와 형의 없는 손가락에 달려 우시고 여자가 성한 한쪽 손을 힘주어 잡는 동안,
나는 어둠의 등뼈에 환한 불의 얼룩을 놓는 별똥별과 마당에서 반짝이는 몇 개의 물방울이 만나 내 입에 닿는 묽은 어둠을 털며,
모깃불에 호오호오 숨을 부었다


이안, <유년의 마당> 부분


세상에 없는 사평역, 세파와 겨울 추위에 터진 손을 말리던 사람들을 위해 톱밥 한 줌 넣던 것처럼 유년의 마당을 떠올리는 어린 시인의 눈에 잡힌 저 형형한 그림자들을 보라. '어둠의 등뼈에 환한 불의 얼룩을 놓는 별똥별'과 '물방울이 만나 내 입에 닿는 묽은 어둠'처럼 잊히지 않는.

그래서일까. 가끔 시인이 시 가운데 배겨넣은 판박이 사진 같은 상징마저 달리 보이지 않는다.

추운 밤 사이 강물도 얼었나보다

강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 얼음 속을 들여다보니 고래 한 마리 얼어 있다

그도 죽으려 했나보다

고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서로 녹여도 좋겠다

천근의 아기를 받아 씻기며 집을 차려도 좋겠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와서 부딪치며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와 참견하려 할 것이다

집 안쪽에다 불을 지피려 안간힘을 쓰는 내 모습을 보고 허허 신(神)은 파도소리만큼 웃기도 할 것이다

문득 그 소리에 녹기 시작한 고래는 물을 흘리며 일삼아 흐느껴 울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자꾸자꾸 그의 허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한 천 년쯤 아무 일도 없을 어두운 밤을 차려도 좋겠다


이병률, <강변 여인숙> 전문


'고래'는 '여인숙'을 떠올리는 그 '여인'의 본향 같기도 하다. 얼어버린 강, 변 여인숙이 고래의 몸이나 되는 것처럼 집을 차리고 아기를 씻기고 물고기들이 시시콜콜 참견하는 가운데 불을 지피려 애쓰는 시인의 환상이 물을 흘리며 울다가 천 년쯤 아무 일도 없을 어둠으로 돌아가는, 칠판 가득 백묵 글씨를 지우듯 하는 '여인(旅人)'이야말로 시인이 아닐까.

그대 없는 별에서 오늘도
숙박계를 쓰고
지나친 추억과 1박한다
이번 세상은 너무 가혹해!
티끌 속을 날아다니는 것도 힘들군!
(줄임)
나는 왜 아직도 사춘기처럼 아픈가
나는 왜 자꾸만 속초 앞바다가 그리운가
이 비 맞는 여인숙에서
밤이면 독감처럼 파고드는 -,
엽서만 한 그리움
아직도 추억의 뒷골목을 윤회하는
지구의 악몽
그 옛날 강원도에서의 내 꿈은 우편배달부였던가
그대 집 앞에 걸려 있던 낡은 우편함
끝내 편지 한 장 못 전하고
이렇게 나--, 느티나무처럼 늙어서
흐릿한 눈 속을 뒤덮은
커다란 저막,
이 쓸쓸한 유배지에서
다 끝난 망명정부처럼 나는 웃고 있네.

이용한, <비 맞는 여인숙> 전문



차포 떼더라도 속초 앞바다니, 강원도에서의 꿈이니, 우편함이니, 느티나무를 지나 유배지, 망명정부란 무엇인가. 친구가 없는 심심한 마을을 지날 때처럼, 시인이 다른 시에서도 썼듯이 '우기의 여인숙'에 묵으며 쏟아내는 고향의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아직도 사춘기처럼 아픈 까닭은 '엽서만 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것이 결국 끝내 낡은 우편함으로 날마다 오기를 기다리는 편지 한 장과 같은 고향의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그러니 지구의 악몽이며 뒷골목, 윤회, 커다란 적막으로 해입은 시에서 시인은 숙박계를 적고 잠드는 여인숙의 밤처럼 쓸쓸한 것이다.

떠도는 물고기 여인숙은 비루하고 이따금
녹슨 지느러미를 턴다
문을 열 때마다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자정을 껴안고
너는 지난 시절의 물고기를 중얼거린다

이용한, <떠도는 물고기 여인숙> 부분

이국의 사막, 모래바람 속에서조차 중얼거리는 지느러미는 아직도 시인의 몸속에서 휘적거릴 것처럼 돋아나고 있다. '신념은 적막하고/환멸은 얼룩진다/너는 가혹한 대추야자나무 그늘을 천천히 건너서/물고기처럼' 훌쩍거리고 있는 이방인의 얼굴 속에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고향은 또다른 상념과 꿈조각을 몰려다니기도 하다. 시인을 가로막고, 경계 짓기도 한다. 아주 낯낯한 얼굴로 찾아와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추렴해 가려고 하기도 한다.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은
왜 둘씩 셋씩 숨죽이고 앉아
한국식으로 육회를 먹나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나
손등까지 싹싹 핥아먹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들 어디로 가나
얼굴도 모르는 수세기 전 사람들과 몸을 섞어
안개처럼 바람처럼
또 어디로 물려가나
육촌형님응 죽어서도 홀아비고
할머니는 날 전혀 모른다는 듯 웃고 있고
왜 조상들은 제사가 있는 날이면 꼭
상반신만 남아 꿈속으로 몰려다니나
귀신들도 국경이 있나, 정부가 있나
왜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나
고향을 한참 떠나왔고, 친척도 이젠 없는데
내 가느다란 팔다리마다 최씨들뿐이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도 내 몸엔 온통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뿐이다
최씨들은 왜 모두 얼굴이 길고
왜 웃을 때 당당하게 남을 똑바로 못 보고 웃나
우리가 죽어서 코끼리들처럼 서로 만난다면
그렇게 모여서 다들 어디로 가나
상아 같은 흰수염을 뽑아 쌓아놓고 우리는
또 어떤 가문에 나서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초원을 떠도나


최금진, <다들 어디로 가나> 전문



케이블 티브이에서 하는 미스테리 다큐처럼 한 사람의 정신을 흔들어놓는 구체적인 정황들이 고향에 쏠려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난의 대물림에 조상 탓만 하는 최씨, 그 최씨들의 제사 때문일까. 시인에게는 멀리뛰기처럼 뛰어넘은 고향이자 친척마저 없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다가 참견하는 고향이야말로 코끼리처럼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연장선인 것일까. 코끼리들이야 먹어치울 풀에 따라서 드넓은 초원을 옮겨다닌다고 하지만 시인은 자신을 붙들어매는 최씨와 고향의 집합속에서 툴툴거리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일까.

저수지의 잉어들은 빠져죽은 사람 얼굴을 닮았지
건져올려놓고 보면 영락없이
작년에 죽은 누군가의 이목구비가 달려 있었지
잉어들은 밤만 되면 물길을 거슬러올라가
상류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달빛의 속살을 뜯어먹고
퉁퉁하게 살이 올랐지

최금진, <잉어떼> 부분

 

 
 또 다른 구체적인 공간, 거대한 피라미드의 밑변이나 심리학에나 나올 법한 잠재의식의 저수지와 잉어떼. 그것들에 새끼 제비의 벌건 살점을 미끼 삼아 던지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정확해진다. '펄떡거리는 누런 잉어비늘을 생으로 떼어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뛰어드는 저수지의 '깊고 차가운 수압'이 '맨살의 우리를 뒤에서 안'고 누군가의 이목구비(최씨들의 고향이라고 하면 너무한가)를 닮은 잉어떼들이 발가락을 깨물고 다닌다니, <석회암지대>의 구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구체적인 단절의식이 보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출세하고자 떠난 고향에는 출세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출세하였다고 해도 현수막을 내걸고 속물자본주의를 내세우거나 가문의 영광처럼 헛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마저도 논공행상처럼 따질 수밖에 없는 비정한 곳으로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순전히 어린 시절과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심심하면서도, 더이상 친구를 낳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해종일 깎여나가는 모래밭을 바라보고 있는 외로움의 실체일 것인가.

그러면 남은 자들만이 또다른 시인이 되어 고향찬가를 부르는 것일까. 도피의 공간이자 죽음과 친숙한 공간이자 상처입어 움츠러든 날개로 '유일한 빛을 잃어버'린 '불확실한 인생'의 '기슭, 그리고 열쇠'인 것인가.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 나오는 싯귀절과는 같을 수 없지만, 그렇다면 고향이란 비 맞은 장맛 같은 것일까. 진정 '대지'를 잃어버린 '우기의 여인숙' 에 숙박계를 적어넣으며, '길이 다한 여인숙에서 구름 뜬 술이나 한잔 하면서/꽃 지는 창밖을 볼 것이다/때때로 수첩을 꺼내 도마령을 비추는 하현을 기록할 것이다/이 집도 절도 없는 정거장에서/다시 난 쓰디쓴 사랑을 할 것이다'(이용한)하고 적는 <길의 미식가>가 될 것인가.

그러나 진정 <이곳에 살기 위하여> 다시 노래하는 '대지'는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살문을 열고 나온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대지'. 진정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다면 더이상 맛집을 떠돌아서는 안 된다. 그 손맛으로 일궈내던 몸의 허기와 궁핌함이 대물림하여 그나마 떨치고 사는 가난의 또다른 보상을 시로 돌려주어야 한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지만 강가의 둑방 제천(堤川)을 떠나온 시인들의 애잔하면서도 살풋한 낮달 같은 시에서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