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한 나날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참도깨비 2021. 9. 6. 16:35

“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또야 너구리 엄마가 왜 또야너구리에세 기운 바지를 입으면 꽃이 더 예쁘게 핀다고 했을까요?"
권정생 선생님 살던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이들은 기운다는 말뜻을 알기는 할까? 모른단다. 어떤 아이만이 구멍 뚫린 곳을 꼬매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아니 몰라도 알 만한 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알 필요가 없는 쓰고 버리는 삶이 만들어낸 갸우뚱이리라.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뙤기
논 한 뙤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되고
 
밭 한 뙤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권정생, <밭 한 뙤기>
 
 한 뙤기만 말은 작고도 큰 말이다. '강아지똥' 그림책에 나오는 그야말로 쬐꼬만한 강아지가 똥을 누고 있을 법한 돌담길에 들어서니 한 뙤기란 말부터가 온 세상 모두의 것, 세상 그 자체로 내려온 봄햇볕만큼이나 따뜻하게 다가선다. 가뭄 끝에 비가 온 뒤라 후텁지근하고 뜨겁지만 돌담, 아니 흙담길에서는 막 민들레가 강아지똥의 마음씨에서 새롭게 피어나고 있을 것만 같다.
 
 


 
 뒷간마저 땅을 일으키는 발전소 같다. 옛날에는 그랬다. 재를 뿌려 똥거름을 만들고, 풍덩거리는 똥통에서 걸러낸 똥물을 호박밭에 뿌리고 배추밭에 뿌려서 뚝심과 땀으로만 키워냈다. 발 하나 걸칠 만한 격식만 차리면 그만이었다. 비바람 가려줄 염치만 있으면 되었다. 선생님이 안 계신 집에는 아주 급한 사람이 다녀간 흔적만 있을 뿐이다. 얼마나 조심스럽고 무서운 마음으로 거쳐갔을까? 한순간은 평화스러웠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 마음을 풀고 앉아있었을 때 숨 한 번 몰아쉬고 게송이나 선시 한 줄 같고, 소나기 한 줄금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그러나 선생님이 떠나가신 한 뙤기 밭 같은 방에는 아직 떠나지 못한 물건 하나가 있다. 도란스란 일본말로 더 자주 불렀던 물건. 너무 센 전기에 이것저것 문어발처럼 끼워쓰는 삶을 돌아보면 나중은 없는 것 같다. 지금의 삶을 누리고자 돼지 콧구멍 같은 곳으로 엄청나게 뽑아 쓴다.
 밤새 원고를 쓰실 때 한 뙤기 같은 원고지를 밝혀주었던 전등. 모든 것이 가느다란 돼지 콧구멍에 맞춰져있어 승압이 되고도 겸손하게 바꿔 썼을, 선생님의 몸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함께 살았을 물건 앞에 겸허해진다고 하면 거짓말일까.
 
 

 
 
 생가복원한 여느 문학가의 집이 아니라 잠시 마실 나가 어디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고적한 집. 선생님의 성품만큼이나 낮은 자리에 있는 집. 호사라고는 뒤란을 지나가면 보이는 작은 개울과 물소리 뿐인 집.
 
새앙쥐야
새앙쥐야
쬐금만 먹고
들어가 자거라
 
새앙쥐는
살핏살핏 보다가
정말 쬐그만 먹고
쬐그만 더 먹고
마루 밑으로 들어갔어요.
 
아픈 엄마개가
먹다 남긴 밥그릇을
달님이 지켜주고 있지요.
 
권정생, <달님>
 
 아주 쬐금만 먹으라고 말하는 선생님이나 진짜 쬐금만 더 먹고 가는 새앙쥐나 선생님의 분신처럼 아픈 엄마개가 남긴 밥그릇을 지켜주는 달님이나 개울물처럼 넘쳐나지 않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낮은 집.
 
 


 
 낮은 집인 만큼 아무나 들일 수 없는 방. 책무더기와 적은 살림살이까지 들어찼을 빈 자리를 보면 불쑥 들여놓는다는 것조차 죄송하다.
 
 

  
 
 그냥 바람같이 왔다 갑니다, 하고 제비처럼 다녀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이 집마저 온 세상 모두의 것이므로. 선생님이 남기신 작품도 그렇고 인세도 그렇다. 
 
  

 
 
 유언장마저도 그렇게 소탈할 수가 없다. 주변에서 보살펴준 사람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말과 다시 태어난다면 스물다섯 건강한 몸으로 스물 둘 정도되는 아가씨에 스스럼없이 연애해보고 싶으시다는 바람밖에 없다.
 두고 가는 것 없이 가는 소탈한 삶은 여럿을 먹여 살리고 있다. 산딸기 마음이다.
 
산딸기 따 먹으며
칡잎에다 한 웅큼
따로 쌉니다.
 
젤 잘 익은 것만
골라 쌉니다.
 
꼴망태 이고 지고
돌아갑니다.
 
걸으면서 분이는
동생 용복이가
냠냠 먹을 것을
생각합니다.
 
걸으면서 돌이는
할아버지가
호물호물 잡수실 걸
생각합니다.
 
권정생, <산딸기>
 
 식구생각을 떠나 저 마음이면 남아나는 것이 없는 지구의 삶이 나아질까? 강아지똥처럼 자기 몸을 비에 녹여 민들레꽃을 피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물음 투성이다. 묻도 묻고 또 묻다가 대답도 없이 내리내려놓고 가는 것 없이 살다가 그냥 가는 것 같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노래를 부르면 웃는 아이들 웃음을 돌아보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싸리비처럼 뜰을 쓸고 마음을 쓸어야 하겠다고.
 
싸리비로 뜰을 씁니다.
말끔히 말끔히
뜰을 씁니다.
 
한 묶음
다발로 묶인
포기 포기 싸리나무들은
모두 산에서 자랐습니다.
 
푸른 잎과 보라빛
꽃을 피우며
싸리나무들은
별빛이 반짝이는 봉우리에서
꿈을 꾸면서
자랐습니다.
 
그 꿈이 한 자루
싸리비가 된 것입니다.
 
싸리나무들은
싸리비가 좋았습니다.
 
아침마다
깨끗이 깨끗이
뜰을 쓰는 것으로
즐겁습니다.
 
권정생, <싸리비>
 
 
 선생님은 싸리비 같은 마음으로 우리들이 돌아간 길을 쓸고 계시니 더는 늦출 수가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