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한 나날

별별 마을에는 별별 이야기

참도깨비 2021. 9. 7. 08:47

“ 별별 마을에는 별별 이야기가 ”

 


 언제부터인가  별의 수도, 별의 도시라고 부를 만큼 별의 흔적들이 많다. 보현산에는 국립천문대가 있고 가상리 일대에는 별별미술마을이 있다. 어릴 적 그 많은 별똥들이 뒷산 너머 떨어져 아름다운 골짜기를 이루었을 것이란 꿈처럼 모든 것이 별 아닌 것이 없는 곳. '신몽유도원도-다섯 갈래 행복길'이란 주제로 마을의 자연과 문화유산이 예술과 만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빛나는 곳.
 건빵과 함께 먹는 별사탕 같은 맛을 내는 곳이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찾아 마을을 돌던 구비문학답사 때처럼 한 마을의 정수를 만나는 것만 같다. '걷는길', '바람길','스무골길','귀호마을길','도화원길' 로 이름 붙인 다섯 갈래 행복길은 천편일률적으로 정한 도시의 길과는 달라 보인다. 전국적으로 길 만들기 프로젝트로 자연스러웠던 길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 영천별별미술마을이 던지는 물음이 크고 깊다.
 
아아, 그러나 유한한 너와 내가 어쩌다가
온갖 부조리한 운명과 사나운 무한이 기다리는
이 찬란한 고요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가
정녕 환하기에 더욱 놀랍고 두려운 사랑의 밤이여
 
임동확, <저녁의 노래> 부분
 
 '눈 감을수록 더 생생한 침묵의 빛 속에서만 온전히 넌 내 차지리'(위의 시) 하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지 못한 우리들에게 어느 한 곳에서는 이런 '찬란한 고요'와 맞닥뜨리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재래시장 활성화란 이름으로 예술가들이 들어가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듯이 영천별별미술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부산한 움직임들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영천 가상리 일대는 은하수가 배를 밀고 지나가듯 두 줄기의 산 사이로 들녘을 끼고 있는 곳이다. 어릴 적 당산나무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이 지금도 환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낯설지 않고 조용히 걸어서 돌아볼 만한 길들이 정겨운 곳이다. 땅바닥에 무슨 글씨인가를 써놓고 흙으로 덮어 더듬더듬 찾아보게 하는 놀이처럼.
 
 먼저 귀호마을길로 들어섰다. 귀애고택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200년은 살았다는 매화나무와 사철나무가 또 다른 고택처럼 외경스럽게 보이는 곳이다. 행랑채를 고택체험관으로 만들어 준비중인 종갓집 뒤로 귀호마을 내력을 적은 설치물과 연못과 정자를 머슴처럼 부리고 있는 귀애정이 퇴락했지만 고색창연하게 보인다.
 
"이 마을이 피란골이라 임진왜란 때도 여기는 전쟁 모리고 살았어요. 육이오 때 다른데는 난리법석이었더도 타지 사람들이 동네로 피란을 다 왔어요. 아주 평온한 마을이요...."
 
 병풍 모양의 철제 판에 투조 형식으로 설치해 놓은 작품에는 마을 어르신의 입담이 그대로 묻어난다. 한 마디로 과일도 잘 되고 살기 좋아서 애들 아버지가 딸에게 야, 지지배야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었던 마을이란 이야기다. 조선 시대 귀애공 대감이 들어와 터를 잡은 뒤로 공부하는 서생들이 줄을 이었다는 이야기와 거북이 모양의 바위 이야기를 새겨놓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옛 이야기처럼 구수한 말씨가 정겹기만 하다.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공공미술의 중심에는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듯이 몇 년을 두고 이 마을 사람들과 먹고 자면서 이야기를 끌어낸 공력이 보이는 대목이다. 귀애고택에 대한 표지판이 따로 있지만 구술 이야기 설치작품 하나만으로도 설명이 되고 남는 일이다. 
 

 
 
 별별미술마을은 어느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법칙 같은 건 없다. 길을 잘못 들어 귀호마을에 들어섰지만 '저 하늘의 별을 찾아'란 작품처럼 저마다 포인트를 찾아 돌고 다시 돌면서 느끼면 되는 곳이다. 사다리를 타고 밤 하늘의 별을 따려고 하는 아이와 사다리 밑에서 기다리는 강아지의 눈으로 바라보면 될 것 같다. 사다리 밑에서 앉아 진짜 별이 뜨기를 기다려도 될 것처럼 혼잡한 도시의 시간의 개념이 멈춰버린 곳이기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거미줄 치고
저렁저렁 앓는 소리
마음 놓고 해보는
 
살다 간 사람
살러 올 사람
생각 많은 저녁 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어서
 
이종수, <빈집>
 
 오래 오래 기다렸던 옷을 몸에 맞춰보듯이 저마다 가슴에 남은 별 부스러기를 대보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생각 많은 저녁 별 만큼이나 오래 오래 앓는 소리를 하는 고택과 매화나무, 사철나무가 어울린다.
 

 
 
 고택을 관리하는 분은 대구에 산다고 한다. 행랑채를 고쳐서 손님들을 맞을 예정이라는데 이 마을에 사시지 않으니 손님들 맞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식당이 없다 보니 아침밥이라도 해주어야 하는데 손이 모자라 지금은 새집 증후군을 빼내기 위해 손바닥만 한 봉창과 문을 열어두고 기다릴 뿐이란다. 그러니 한 이틀 밤 마을 돌아보기 위해 자려면 매실 담기 체험 정도 해 보면 좋지 않을까요 하는 주문을 늘어놓기가 미안할 따름이다.
 

 
 
 귀호마을을 돌아나와 들과 실개천을 끼고 이어지는 가상리 쪽으로 들어선다. 누군가 이런 지형에는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가 있게 마련인데, 정취보다는 땅 가진 양반이 머슴들이나 소작농들이 일을 제대로 하나 감시하기 위해 지어진 것들이 많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은 고색창연이란 네 글자만 남았으니 접어두자.
 들어올 때는 그냥 지나쳐서 못 본 담벼락에 벽화가 보인다. '신몽유도원고'란 작품이다. 벽돌과 도자기 조각으로 마을과 집, 복숭아꽃을 꾸민 것이 페인트 물감 일색의 벽화와는 다르게 친근한 느낌이다. 별별미술마을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시작되고 갈라지는 셈이다.
 

 
 
구불구불한 이차선 도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벽화가 나온다. '가상리에서 바라보다'라는 작품이다. 가상리를 끼고 들어오며 맞닥뜨리게 되는 풍광 그대로 표현한 것인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검은 깻돌과 녹색의 돌을 자락자락 붙여서 만들었다. 한적하게 걸어서 만나는 눈높이의 들녘과 산자락이 새롭게 다가온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벽화가 그곳을 평생 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과 부대껴서는 안 되듯이 두고 두고 보아도 무리가 가지 않는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 같다.
 
 실례로 어느 마을에 시민들과 함께 하는 벽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나중에 전부 다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즐거운 가족들이나 사람들을 그려놓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밤에 나오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해서 지워달라고 한 탓에 몇 달을 걸쳐 만든 벽화가 하루아침에 지워진 것이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맞닥뜨리는데 호불호가 갈리는 건 둘째치고 정서상 맞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공공미술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이기에 소비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지금 그 마을 벽에는 그곳 사람들이 원하는 연꽃 그림과 나무 그림들로 바뀌었다. 소 한 마리 길러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분의 집벽에는 소 한 마리가 그려진 것과 같은 이치다. 함부로 아무 것이나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의 스토리텔링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담장의 소통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블럭 구멍 사이에는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으로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들어놓았다. 장중한 벽화 위에 재미있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공물 대부분이 흙담이나 꽃담의 자연스러움에서 멀어진 지 오래이다 보니 우리는 '누구누구는 바보' 하는 담벼락 낙서의 연장선상에서 소중한 기억을 꺼내어 소통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낙서와 그림이 있는 담벼락에서 말타기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며 만들었던 이야기들이 돋을새김 무늬처럼 이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공통의 염원이나 그 담벼락을 둘러친 집 사람이 내어준 마음 위에 그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그것을 예술의 고통이라고 했다. 그것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책무라고.
 
 

 
 
 마을기를 따라 좀 더 내려가다가 스무골길로 들어서면 가상교가 나온다. 어디서나 보는 시멘트 다리에 동판에 새겨진 가상교가 예술다리가 된 곳이다. 다리 건너기 전에 수달관측소가 눈을 사로잡는다. 실개천에 진짜 수달이 사는지는 별이 뜨는 깜깜한 밤에 나와야 알겠지만 수달 머리 모양의 안에서 수달 눈구멍으로 내다 보면 맑은 물 어딘가에 수달이 멱을 감을 것만 같다. 작고 동그란 색색 타일을 붙여 놓은 것이 강원도 정선 구절리역에 있는 어름치 까페를 떠올리게 한다. 옆에서 언뜻 보면 물고기를 하두 많이 잡아 많어서 그런지 물고기를 닮은 것 같다.
 다리 교각은 사각형의 철망 안에 물가의 큰 돌을 쌓아서 만들었고 중간 중간에 스테인레스로 만든 원 모양의 설치물과 솟대를 세워놓았다. '바람소리'라고 한다. 영천 오는 고속도로 한 켠에서 본 신구상의 솟대 설치물처럼 어디에고 있는 것이지만 예술가의 손을 거쳤다고 하니 골똘하게 작품 의도를 떠올려본다. 솟대 꼭대기에 앉아보면 알 수 있을까.
 다리를 막 지나면 '나들이'란 작품은 가래인지 삽인지 모르지만 노란 모양의 넓적한 날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들이 대신 마실이나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아니면 오징어? 저마다 별별 생각을 다 붙여볼 만하다. 궂은 날이든 맑은 날이든 그 날마다 다른 생각들이 바람소리를 지나 나들이 할 것만 같다.
 스무골길을 따라 올라간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 곳곳에 마늘밭이 푸릇푸릇하다. 한두 채 있는 집 어귀에 마늘 건조장이 보인다. 굵고 긴 통나무를 가로질러 놓은 곳마다 널려있었을 마늘끔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인적이 드물다.
 

 
 
 바닥에는 다 털어낸 깻단들이 줄지어 쌓여 있을 뿐이다. 벼농사와 포도농사 외에 마늘 농사도 많이 짓는 모양인지 마을 곳곳에는 이런 건조장들이 많다. 담배 농사 짓는 곳에 기다란 풍차 모양의 건조장이 많은 것과 비교가 된다. 수숫단을 말리고 메주도 말릴 수 있는 크게 시원시원한 재목들이 정겹다.
 
 

 
 
 "올해 콩은 반이나 비었어. 날이 가물다가 비가 많이 오니 농사가 되야지. 저기 있는 콩단 좀 봐. 다 비었어. 어디 농사 짓는데 날씨가 맞아야지."
 길가에서 막대기로 콩을 털고 있는 할머니가 콩 농사가 잘 안 됐다고 푸념을 하신다. 눈에 보이는 콩마저 튼실하지 못하고 자글자글할 뿐이다. 어차피 욕심 부리지 않는 농사인 만큼 반타작을 생각하고 지은 탓에 두부 한 모 같은 푸념이라고 해야 할까.
 

 
 
 마늘밭 너머 길게 외돌아져 들어가는 길에서 작은 수레를 끌고 나오는 할머니 발걸음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깻단을 터실 모양이다.
 할머니에게 고개 너머 뭐가 있냐고 물으니 돈 많이 들어간 뭐가 있기 하단다. '꽃이 피네'란 제목의 부조벽화가 있는 곳인데 뭘 그런 걸 보러 멀리 가냐는 투로 푸념이시다. 그 말을 들으니 날이 저물기 전에 다 둘러보려면 잰걸음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고 할머니 말씀대로 나중에 다리품 팔아 볼 양으로 돌아선다. 다리께에서 마실 다녀오시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니 '저것들 보러 오셨구나'하며 우리가 뭘 알아야지 하는 표정을 지으신다. 말씀을 그렇게 하셔도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살갑게 인사하고 말을 붙여주는 것이 싫지 않으신 눈치다. 그것만으로도 프로젝트 성공이라고 할까? 아님 절반?
 
 

 
 
 학교 자리에는 시안미술관이 있다. 옛 학교 건물이 새로운 옷을 입은 미술관은 입장료 3,000원을 받고 작가들의 전시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3층 건물의 신경을 한꺼번에 건드리는 듯한 마룻바닥이 시끌벅적한 옛 학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학교 곳곳에 있는 나무들만으로도 역사를 알 것 같다. 플라타너스도 6,70년째 방울을 달고 겹겹으로 껍질을 벗고 있다는 듯 고적하다.
 

 
 
 마을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공간이다. 담장이 없는 운동장에는 연을 형상화한 설치물과 그늘막 비슷한 설치물들이 옛 학교의 기린과 원숭이, 호랑이 동상을 대신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으나 물어보나 마나 뻔한 질문일 것 같아 조용히 구경만 하기로 한다. 인도를 다녀온 사진작가의 사진에서 오래된 미래 비슷한 느낌이랄까, 별별미술마을의 이야기를 거꾸로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관 전시동까지 들렀다가 오래된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를 먹었다. 달디 달다. 더 늙어지면 달다 못해 질겨지고 맛이 떨어진다는 말이 많을까. 높은 가지 위의 감에 군침 흘려가며 올려다 보노라니 어릴 적 가지 약한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기억이 난다. 잊을 만도 한데 왜 자꾸 스며나오는지 사람이란 커다란 가죽부대이거나 화수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전시회를 준비하는지 큰 윙바디 트럭에서 쉴새없이 큰 그림들이 쏟아지고 있다. 엽서 크기만한 것이 1호라고 했지? 깜냥껏 그림 크기만 가늠하고 있는 속물근성으로 기웃거리다가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로 땡땡이 치듯 빠져나와 마을 안쪽으로 들어선다.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박성우, <자두나무 정류장>
 

 가상교회 옆 찻길에는 가래실이란 이름을 달고 재미있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시처럼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 낮술에 불콰해져 의자에 가로지르고 누워있어야 제격일 것 같은 정류장 지붕에는 스텐레스로 만든 풍선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설레고 있다. 무겁고 단단한 물질을 제멋대로 구부리고 다듬을 줄 안다는 예술적 자부심이 적절히 녹아있는 듯하다. 공공미술이 새로운 설치물을 공사 수준으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절한 자리에 맞는 즐거운 발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공공미술작품이 오래되고 친근한 나무나 집이 아닌 이상 그곳에 맞는 스토리텔링과 함께 내내 눈요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구름이 즐겁고 찬란한 생각을 넘치게 하는 오브제이듯이 왜 그곳에 세워지고 그려져야 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하는 것이기에.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창고 비슷한 건물 벽에 '복숭아빛 바람'이란 작품이 바람벽 구실을 하고 있다. 아하, 여기가 봄에 오면 더 환하고 머물만 할 것이란 생각을 한 것처럼 복숭아꽃과 별이 만나는 황홀한 공간을 그려보게 한다. 별별미술마을 조감도 비슷한 표지판이나 폭포 그림을 형상화한 쇠구슬 설치 작품들과 기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별별미술마을답게 경로당 건물에는 별자리마다 큰별 작은별 따지지 않고 동네 어른신들의 손바닥을 떠서 만든 작품이 있고 '이갑예' 하며 손글씨가 적혀있다. 이름하여 '위대한 손'이란다. 그렇지. 각자 위대한 삶을 사신 분들의 이야기이니 당연하다. 
 

 
 
 손금 한 줄까지 읽혀지니 더는 들어서 무엇 할까 싶다. 자글자글 빛나는 별터이자 별똥들이 떨어져 수북한 곳이라고 해야 할까. 고향 마을 경로당에서 아랫집 윗집 할 것 없이 다 만나게 되는, 뉘집 큰 아들, 작은 딸 이야기를 듣고만 싶어진다. 그러려면 이곳에 많이들 다녀가야 할 것이다. 그림만 보러 와서는 안 되고 이 분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들든 옛 이야기책을 만드는 일, 시집을 내거나 민중 자서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살아 있는 기획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경로당 뒷집 개가 어제 만난 사람 보듯 아는 척을 하며 꼬리를 친다. 앞발을 든 채 일어서기도 하고 뱅뱅 돌면서 '새장의 새'란 빈집 앞에서 설레발을 친다. 새장의 새? 빈집을 그대로 두지 않고 새장처럼 만들어 새를 불러들이는 꼼수인 셈이다. 기발하다. 어디까지나 재미있게 즐기면서 상상해 보는 일이니 빈집이라 부르지 말고 새집이라고 불러보면 없던 입맛도 살아나는 것 같다.
 

 
 

 
 
 새장 안에서 다른 구경꾼들이 김밥을 먹다가 자리를 내어준다. 안으로 들어가니 진짜 새장이다. 건설현장에서나 보는 철근을 노란 고무호스에 집어넣어서 둥글게 둘러쳐놓고 문설주며 마루를 노랗게 칠해놓았다. 알록달록 만물상이라고 아트마켓을 하는 곳인데 닫혀있다. 빈집 프로젝트라고 해서 사람들이 들어가서 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새로운 구상을 해서 볼썽사납지 않게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의 집이었겠지, 당당하게 옛 주인의 삶 위에 앉아 겹친 생각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자는 골방에는 볍씨도 있고
고구마 들깨 고추 팥 콩 녹두 등이
방구석에 어지러이 쌓여 있다
어떤 것은 가마니에 독에 있는 것도 있고
조롱박에 넣어서 매달아놓은 것도 있다
저녁에 눈을 감고 누우면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말소리가 방 안 가득 떠돌아다니고
그들이 꿈꾸는 꿈의 빛깔들도 어른거리고 있다
나는 그런 씨앗들의 거짓 없는 속삭임들이 좋아서
꿈의 빛깔들이 너무 좋아서
씨앗들이 있는 침침한 골방에서
같이 잠도 자고 같이 꿈도 꾸고 하면서
또 다른 만남의 기쁨을 기다리고 있지요.
 
박운식, <골방에서>
 
 정미소 기계들이 쉴새없이 돌아가며 다른 한쪽으로 쌀겨방귀를 뿡뿡 꾸고 있어도 빈집들이 눈에 띈다. 바람의 까페 또한 설치작품이 되어 있지만 떠난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떠난 간극을 메우기 위해 무인까페가 되었지만 고양이만은 유난히 사람 손을 타는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와 몸을 부빈다. 골방에서 꾸는 꿈만 같다.
 
 
 

 
 
 별별미술마을의 압권은 아무래도 마을회관을 바꿔 만든 우리동네 박물관 같다. 건조장에는 영천시장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돔베기를 형상화한 설치작품이 걸려있고 대나무로 둘러친 박물관 안에는 이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타임캡술마냥 전시되어 있다. 2대째 돌아가는 정미소나 선풍기와 텔레비전이 놓여진 정자에 머물다 간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목침이며 농사도구에 어느 대에 그쳤을 아이의 신발까지 마을의 작은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 당연 대접받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쓰지 않는 물건들이 모여있는 곳이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이야기들만은 영원한 법이다. 박물관을 둘러싼 마을에는 아직도 2대째 돌아가는 정미소가 있고 어느 집 마당을 들어서도 농사의 이력을 보여주는 대체 물건들이 있기에 별 것 아닌 것들이 더 위대해 보인다.
 

 
 
 농사 또한 기록의 역사다. 농사달력이나 소일거리로 삼았던 옛 이야기 필사본이나 들녘과 산굽이를 따라 이루어지던 삶의 역사이기에 소중하다. 마을회관에서 잔치를 벌이고, 헛기침으로 마이크 테스트를 하며 북적였을 때는 그려본다. 머지 않아 또 사라지고 말 것들이어서 서서히 타임캡슐이 되어가는 것이겠지만 아직은 유효한 방식일 수밖에 없다. 자기 생애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 탄광마을에 가면 막장의 역사 또한 누군가의 기록이 있게 마련이듯이 섣불리 버리지 말 일이다.
  
 

 
 
 굳이 민속박물관으로 가야만 그럴 듯해보이는 물건들이 아니다. 그 마을회관에 한 집 한 집의 아카이브가 이루어져야 한다. 집을 떠나면 그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학습도구일 뿐이다. 그 마을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것에 보관되어 찾게 만들어야 옳은 일이다. 그 자체가 자료실이자 민중자서전이어서 그 시대를 연구하고 써내려면 우리 동네 박물관에 찾아와서 묻고 막걸리 한통, 담배 한 보루와 흥정해야만 한다. 
 

 
 
 수줍은 듯 제 말 다하듯 마을 사람들의 삶 하나 하나가 소중하기에 별별미술마을, 아니 가상리 박물관의 시도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해주고 있다. 예술가들의 손을 빌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또한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런 시도는 곳곳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다음에는 저 점빵에 들러 막걸리 한 잔 정도는 마시며 주전부리 겸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별별미술마을에 걸맞는 별별 이야기가 쏟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