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놈 때문에
시란 놈 때문에
- 진천 이월중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
코로나19바이러스로 막혔던 학교 시 쓰기 수업이 이월중을 시작으로 조심스럽게 열렸다. 서로 마스크를 쓰고 하자니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마스크를 쓰고 두 시간 수업을 하는 내내 숨이 막혀서 새삼 현장에서 수업하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십분이해하고도 남았다.
아이들은 모두 다 밝아 보였다. 서른 명 넘게 멀찍이 떨어져 앉아 아이들이 내 시집 『안녕, 나의 별』을 읽고 만든 질문지에 답하면서 시작하였다. 선생님이 귀뜸으로 미리 시집을 읽고 수행평가수업을 가졌다고 전해주었다. 학습지처럼 시집을 읽고 인상 깊었던 시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적는 평가지에 몇 편을 들먹이며 써놓았으나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시집을 읽어준 것이 고마우니 질문지로도 족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질문지는 학교를 떠나 비슷하다.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시는 뭐할 때 생각이 나나요? 자신의 이야기를 쓴 건가요? 왜 안녕 나의 별인가요? 시집을 쓰면 기분이 어떠신가요? 시를 적을 때 행복을 느끼시나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읽고 물어주니 고맙다고 했다. 시는 그렇게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든 바깥에서든 대답을 찾는 일이니 고맙게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나는 누구일까요?’ 라는 시에서 한 손엔 도둑놈의갈고리, 한손엔 꽃방망이가 어떤 뜻인지 그리고 마지막에 동물로 쓴 이유는? 하고 시집을 방금 펼쳐 들고 묻는 듯한 것에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때론 수수께끼 같은 걸 내고 읽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할 수 있는 시도 있는 법이라고 대답하며 조금씩 시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어쩌다가 시와 그림을 좋아하고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도 있다. 시라는 장르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임을 알고 난 뒤,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직업이 되었다고 말해주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이 많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나는 되고 싶은 꿈이 많다.
나에게는 꿈을 향한 용기가 있다.
나는 가수가 되고 싶고 박사가 되고 싶고
경찰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꿈이 능력으로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꿈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무조건 꿈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나의 꿈을 향해.
박정화, <나의 꿈을 향해>
시집 안에 안 될 꿈은 꾸지 않는다는 허세스러운 친구가 나오는데, 정화는 1학년답게 꾸는 꿈조차 거침없다. 무엇보다 ‘꿈을 향한 용기’와 ‘능력’이란 말을 건져내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수’, ‘박사’, ‘경찰관’이 스스로 찾은 꿈인지는 묻지 않더라도 현실은 그런 꿈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용기’와 ‘능력’이란 것을 깜냥껏 알고 있다는 것이니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무조건 꿈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강조가 다른 사람들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겠다는 출사표 같기도 하다. ‘경찰관’ 등이 되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려면 단순히 목표만 세운 꿈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꿈을 향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내용이 다음에 올 것이므로.
바람이 불어온다.
새벽녘 이슬 머금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
살살 어르고 달래며 토닥토닥
또다시 바람이 분다.
따스한 낮 기운 한줌 한줌
기분 나쁜 사람
저기압을 고기압으로
칭찬 한줌 위로 한줌
바람 전하는 행복
이은광, <바람>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바람이 불고
어떤 날은 비가 오고
어떤 날은 번개가 친다.
이 모든 건 하늘의 신이 정해주는 거겠지.
하늘의 높은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맑고
기분이 안 좋으면 비를 내리며 바람을 친다.
이것도 주기적으로 일정하게 변하나 보다.
지금은 장마철.
앞으로 며칠 동안은 기분이 안 좋으신가 보다.
김지후, <날씨>
아이들의 생각은 짧지 않다. 생각을 더 확장시켜 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턱없이 짧아 보이는 것 뿐이다.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고 너머로 건너갈 수 있는 시간들이 늘어나면 해결될 일이다. 이를테면 자기 삶을 알고 배우며 알아가는 것들로 글쓰기가 풍부해지면 되는 일이다. 이렇게 움트는 시의 싹수를 보면 아쉬우면서도 갸륵하다. 바람은 그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아니다. 바람이 부는 뜻은 따로 있다. 크게 날씨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후의 시는 좀 어린 티가 나지만 은광이의 시는 그 바람결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 뜻을 헤아려보는 멈추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느껴져서 좋다. 은광이는 그 바람결을 ‘위로’의 것으로 읽었다. 피곤에 지친 사람들을 ‘살살 어르고 달래며 토닥토닥’ 부는 사람으로, 그리고 기압골에 따라 선을 긋는 예보관처럼 ‘칭찬 한줌 위로 한줌’을 던지고 가는 바람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특한가. 어디선가 본 듯한 시인 듯하면서 잠언처럼 읽힐 수도 있으나 이렇게라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최소한의 자기 생각이라도 들어가 있으니 남의 말을 빌리더라도 위축된다고 할 수 없다.
물감은 자유롭다.
빨강 노랑 파랑 연두 등등
가지각색으로 자유롭다.
누구와 옷을 바꿔 입을 수도 있는
물감
난 물감이 정말 부럽다.
박승미, <물감>
승미의 시는 작은 꽃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쁘다. 파레트에 짜놓은 물감을 보며 그 자유로운 섞임과 본연의 색깔을 보며 생각했을 여백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지각색으로 자유롭다’는 표현과 ‘누구와 옷을 바꿔 입을 수도 있’다는 표현이 물감이 가진, ‘자유’가 가진 진정한 뜻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가 ‘부러울 수밖에 없’으니 안타깝다. 그런 물감을 칠하여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화가가 되면 자유로움을 느낄까?
평범하지만 가깝지만
꼭 필요한 손잡이
너가 없어지면
모든 문들이 잘근잘근
파이겠지? 필통에서도
옷 지퍼에도 필요한 손잡이
앞에나 옆에나
계속 있어주기를
○○○, <손잡이>
그래도 비책은 아니어도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지점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시가 만들어주는 자유니까. 이름을 적지 않았지만 ‘손잡이’는 최소한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도록 해주는 도구이자 또 다른 문이기에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모든 문들이 잘근잘근/파이겠지?’ 손잡이가 없어 문을 열지 못하고 긁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니. 평범하게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발견이 남달라 보인다.
나른한 오후, 따뜻한 온기가
나를 어딘가로 이끄네.
구름과 바람이 힘을 합쳐
나를 푸근한 곳으로 이끄네.
잠에서 깨어나 보니
햇빛이 나를 놓아주지 않네.
최세영, <낮잠>
조금 멋을 부렸다. 그냥 ‘자고 싶다’고 버리듯 쓰는 아이도 있지만 최소한 공은 들였으니 좋다. 졸린 오후, 마냥 한적한 듯 보이나 잠이었고 뜨거운 햇빛이 사로잡는 오후의 현실로 돌아왔으니 남가일몽 같은 느낌이지만 크게 힘들이지 않고 이만큼 보여주겠다는 것이니 족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는 나를 좋아하고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는 나와 함께 놀고
나는 너와 함께 놀고
윤솔, <너와 나>
나의 보이프랜드는 어디 있나.
나와 숨바꼭질하고 있나.
아님 나에게서 도망치는 건가
나의 사랑 나의 영혼
나의 보이프랜드는 어디 있나?
한진주, <보이프랜드>
연애 사업을 하는 것일까. 단짝에 대한 마음일까. 이른바 베프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며 도장을 찍는 듯한 가벼움마저 좋다. 누군지 알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눈빛을 읽었으니 말이다.
시란 놈 때문에 내가 왜 창작의 고통에
빠져야 하는가
시란 놈 때문에 내가 왜 머리가
아파야 하는가
맨날 생각한다
때려칠까 아님 쓰지 말까
신명섭, <시란 놈>
보기도 싫고
쓰기도 싫은 시
글자들은 춤을 춘다.
아름다운 공연이다.
김재현, <시>
시를 쓰고 있다.
시를 쓰려고 하기에
시를 썼다 이것은
시다.
김용윤, <시>
한 책상에 둘러 앉아 있던 아이들이 서로 배틀이라도 한 것 같다. 왜 시는 쓰라고 해서 골치 아픈 것인지 “옜다, 여기 시 있다” 하고 던지듯 당돌함도 있다. 그래도 ‘시’란 놈이라고 격상시켜 주었으니 다른 두 친구도 붙들고 시늉이라도 낸 것이지 않을까. 시가 뭔지는 모르지만 ‘까만 건 글자’ 요, 그것들이 춤을 추는 공연 같다는 말로 한껏 틀어놓았기에 재미를 준다. 연이어 ‘시를 쓰려고 하기에/시를 썼으니까’ 이것도 시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자신감일지 배짱일지 모르겠지만 웃고 넘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은 끝없이 주장할 지도 모른다. 왜들 시는 어렵게 쓰고 근사하다고 좋아하는 것일까, 알고 보면 그게 별 거야, 하고.
치우기도 싫고
보기도 싫은
강아지똥
강아지의 주인은 나
강아지의 똥을 치우는 건
나의 몫
○○○, <강아지똥>
그러면서도 1학년다운 툴툴거림, 여드름 같은 시도 보게 된다. 앞의 ‘시’나 ‘강아지똥’이 같은 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뒤에 오는 ‘개똥’에 따라오려면 다시 거꾸로 나이를 먹어야 할까.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 싶지만 강아지똥 치우는 것이 ‘나의 몫’으로만 남아 있다는 사춘기의 공백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간다
즐겁게 가고 있는데
개똥이 있다
그것도 개가 싸고 있었다!
그냥 가려는데
헉!
내 똥보다 굵었다
자존심이 상한다
많이 먹어야지
<개똥>, 신지우(공주동초 5학년)
글을 쓰는 연필
그림 그리는 연필
연필로는 많은 걸 할 수 있다.
그리려면 그려지고
쓰려면 써지고
부러져도 다시 깎고
또 다시 쓰고 그리고
만능연필 3,000원
쌉니다 싸요.
윤재혁, <연필>
어쩌면 재혁이가 ‘개똥’을 쓴 지우와 비슷해 보인다. ‘연필’과 ‘지우개’처럼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시에서 살짝 애드립 비슷한 것을 쓴 지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개똥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 더 먹어야지, 하고 말하는 지우에 비하면 덜하지만 재혁이도 ‘만능연필 3,000원/쌉니다 싸요’하면서 특유의 재미나고 개구쟁이 같은 면모를 드러냈기 때문에 작은 점수나마 얹어주고 싶은 시다. 처음 시를 써보는 시간은 그것만으로도 다른 발견과 발전을 줄 것이라 믿기에 후한 점수라도 주면서 격려할 필요가 있다.
동생은 항상 웃겨요.
동생은 항상 울어요.
동생은 항상 엄마와 껌딱지
동생은 몽당연필자루
동생은 항상 먹고 자기가
일상이구나.
최유빈, <동생>
점점 통통해지는 내 얼굴
수박은 내 얼굴처럼 통통해진다.
주먹으로 치면 통통한 수박
주먹으로 치면 아파지는 내 얼굴
점점 크다가 터지는 건 아니겠지?
김대한, <수박은 내 얼굴>
내 머릿속을 지우는 지우개
내 친구도 지워버리네?
안돼!
내 성적도 지우네
코로나도 지웠으면 좋겠네.
안효준, <지우개>
수업 시간 멍 때린다.
엄마한테 잔소리 들을 때 멍때린다.
나는 왜 멍한 걸까?
내 머리는 온통 아무 생각뿐.
정철, <아무 생각>
지금 시각 12시!
내 배는 배꼽시계가 울리려 한다.
꼬르륵 꼬르륵― 밥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흰 쌀밥, 비벼 먹는 비빔밥
나는 언제나 배고프다.
밥 먹고 싶다.
○○○, <밥 먹고 싶다>
자기가 호랑이인 줄 아는 햄스터
어떨 때는 호랑이 같지만
평소에는 햄스터 그 자체
귀엽디 귀여운 얼굴로 호랑이라니.
햄스터를 호랑이라 생각하는 나도 이상하네.
귀여운 햄스터야, 귀여운 호랑이야
아프지만 말아다오, 호랑해!
조윤아, <호랑이 햄스터>
연이어 본 여섯 편의 시는 흔히 다루는 소재이다 보니 그것으로 정하는 순간 비슷해지는 마법과도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듯하다. 말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작정하고 쓴 듯하다. ‘동생은 장난꾸러기’이거나 ‘나를 화나게 하는 떼쟁이’에서 ‘싸움의 근원’이기도 하면서 ‘귀여운 동생’이라는 표현을 돌려쓰기라도 하듯 보인다. ‘수박’은 거기에 자신만이 가진 콤플렉스를 대놓고 말하면서 재미있게 하려는 노력이 들어가 있지만 ‘지우개’는 정작 지우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이나 ‘코로나19 바이러스’ 시절에 대한 생각이 들어가 있지 않아 아쉽다. 또 잔소리를 들을 때 영혼을 내려놓듯이, 배고픈 생각만 들어서 밥 먹고 싶다는 말로 웃기는 그 효과만 있는 것이다. ‘호랑이 햄스터’는 자기가 키우고 있는 햄스터의 습성을 호랑이로 비유해서 살아난 시다.
그렇더라도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이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 음만 넣은 것뿐이지
가사에만 허세 부리지.
동화책에 음만 넣는 것뿐이지.
밖에서만 허세 부리지.
○○○, <노래>
예언가의 예언
종말에 대한 예언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아는 예언가
그것은 우연인가?
○○○, <예언가>
점은 검다.
내 마음처럼
점은 작다
내 생각처럼.
점은 동그랗다.
내 시야처럼.
○○○, <점>
세 편의 시는 똑같이 이름을 밝히지 않거나 흐릿하게 적어서 확인이 불가하다. 그러나 각자의 지점에 같은 점을 찍은 것처럼 닮아있다. ‘노래’는 프리스타일 랩이라고 해야 할까. 잔뜩 사나운 얼굴로 가사를 적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것을 노래라고 하지, 잔뜩 허세투성이지, 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바깥을 향해 동시에 뇌까리듯 하는 역시 허세스러운 골똘하고 당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예언가’는 말이 안 되거나 확인이 불가한 곳을 고쳐서 보니 훤히 보이는 시였다. ‘예언’을 통해 꼭 벌어질 것만 같았던 일들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도 아닌 무엇이었을까. 그냥 물음을 던지는 것이지만 ‘예언’이라고 하는 것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보게 하는지에 대한 것도 담고 있는 듯 진지해 보여서 눈에 띈다. 또한 ‘점’은 그 자체로 자존감을 드러낸다. 검고 작고 동그랗기만 해서 선이나 면이 될 수 없을 것 같이 그냥 찍혀 있는 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남들과 다른 왼쪽 눈
남들은 하얀색, 검은색
하지만 나는 남색, 검은색
어릴 때 이 눈이 싫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이 눈이 좋다.
임도빈, <왼쪽 눈>
이름을 밝히지 않은 ‘노래’의 화자와 달리 도빈이는 남다른 콤플렉스를 벗어난 자기애가 느껴지도록 썼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차이를 이제야 느낀 것이다. 차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독특하고 다른 것이야말로 차이 중의 차이이고 자신만의 진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자존감을 무너지게 할 만큼 가혹한 사람들의 눈길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올 동안 자신의 ‘왼쪽 눈’이야말로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들어주는 존재감의 상징임을 알았으니 좋은 것이다.
우리 엄마는 항상 웃고 있다.
왜 자꾸 웃냐고 물어보면
그냥… 좋아서
라고 한다.
항상 웃는 우리 엄마
항상 힘든데 웃는 우리 엄마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면
우리 가족이 오래 건강히 사는 거라고
한다… 진짜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숨기는 우리 엄마.
김나연, <우리 엄마>
우리 아빠는 항상 일만 한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쉬지 않고 일한다.
내가 아빠 힘들지?
하면 아니… 하나도 힘들지 않아
라고 한다. 마음에서는
힘들다고 울고 있는데…
왜 일하냐고 물어보면
우리 가족 먹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라고 한다.
맨날 나한테 전화해 주는
멋진 우리 아빠!
전화할 때마다
뭐라해서 미안해요.
김나연, <우리 아빠>
나연이는 두 편을 썼다. 처음에는 ‘항상 웃는 엄마’에 대해서만 썼다가 엄마에 대해서 좀 더 말해주어야 할 것이 있다 싶은지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에 대해서도 썼다. 드러내놓고 쓰기 꺼려 했으나 용기 있게 내보였다. 나연이의 시에는 반쯤 감춰진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엄마는 늘 웃지만 엄마만의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지점이 있고, 아빠 또한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행복’을 위해 저당 잡힌 듯한 ‘힘들고 울고 싶’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듯하지만 가족이란 무엇인가 말해주는 더 많은 여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더 그렇다. 시란 읽는 이로하여금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게 하고 다른 길을 찾게 하는 실마리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신규 바이러스 코로나
코로나 때문에 바뀌어버린 사회
입학식도 못한 우리
마스크 때문에 답답한 내 마음
코로나 없어져라.
이태경, <코로나가 만든 사회>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면 태경이게 ‘코로나가 만든 사회’에 대한 논문급(아니 그냥 에세이급?) 글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로 돌아와 느낄 수 있는 폭은 좁고도 넓다.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에 입학식도 못한 우리가 ‘답답한 마스크’ 그 자체로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생략되고 연기되고 온라인으로 넘어간 현실에서 아직은 ‘답답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양숙이의 ‘바이러스’는 우리 안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바이러스 그 자체다. 막연한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언제라도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코로나가 만든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에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다.
세균보다 조그마해서 발견하기도 어려운 바이러스
온 세상을 전염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
무시무시한 괴물 같아
혹시 내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바이러스를 피해 숨어다녔지
내 주변 괴물에 전염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해 조심해
그것은 위험한 괴물이니까!
조양숙, <바이러스>
밤하늘 참 오묘해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저 별들이 너무 빛나
황홀해서 빤히 쳐다 보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밤하늘이
끝이 없다는 생각에
오한이 들어 무서웠다가.
박서현, <밤하늘>
이렇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좋겠다. 밤하늘은 별과 달로 자신을 불러내기도 하지만 이렇게 황홀한 순간에도 ‘끝’이 없는 광대함에 무서워지기도 하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오한이 들어 무서웠다가’ 다시 황홀해지기도 할까. 그 순간이 느껴져서 안성맞춤한 시가 되었다.
동그란 안경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이 쓰는 안경
사람들이 눈이 안 좋아서 쓰는 사람이 많지만
나 자신이 쓰고 싶어서 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안 쓰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하윤, <안경>
어릴 적 안경이 멋있어 보여서 안경점에서 ‘아무 것도 안 보여’하고 드러누웠다는 아이 생각이 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윤은 ‘나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로 못 박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취향과 달리하고 있다. 그렇게 보이다가도 안경을 쓰고 싶은 강렬한 마음을 눌러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크게 생각이 퍼져나가진 못했으나 자못 진지하게 쓴 것이다.
서툴더라도 이렇게 쓰기 시작하면 많은 것이 바뀌는 것이 시이다. 이게 다 시란 놈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