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도깨비 2021. 9. 7. 09:53

 “ 내암리의 봄 ”

 

 


봄은 더디 오는 것 같아도 물이 그렇듯 어느 해보다 절절하게 이 땅에 왔다.
병암 지나 내암리에도 몇 번의 봄눈이 내리고 벌써 도착했어야 할 봄편지가
선운사의 동백꽃마냥 몇 번 다리품을 팔고서야 왔을 만큼.
도시락을 싸고 가서라도 그곳에 머물렀다가 편지를 받고 싶었던 것은
장모님이 아직도 고향 매봉산에서 나물캐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때는 술만 마시면 나물 캐러 가지 못하게 문에 대못을 박아두던 남편이 있었고
어쩌다 나물 캐러 한나절 넘게 있다 싶으면 우체국에 사망 전보를 치기도 했던
지금이나 되니까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봄이 있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하면 몸서리쳐지고 평생 눈길도 안 두던 전라도 사투리 흉내내서
짠한, 당신도 짠하고 그 서슬에 고생한 아들 딸들의 어린 시절이 짠하고, 무담시
진폐와 암, 술과 산판으로 돌던 역마가 또 짠해져서 올봄에는
꼭 나물 캐러 가야겠다는 마음 한자락이 내암리에 있다.

 

내암리는 청주를 가로지르는 무심천이 시작되는 샘마을이다.
모든 강이 땅에서 솟는 한 바가지 샘물에서 시작되듯이
병암리 지나 내암리로 가는 길은 청주의 내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무심천, 일 자 한 자 들고보니 하면 당연히 나오는 
퇴주잔으로 집은 인생*을 들먹이는 시인묵객들의 성지다.
 
 


 
다리 밑에는 세상에서 가장 단촐한 여름별장인
평상이 있고 막걸리 안주처럼 듬성듬성 박주산채들이
물을 달게 달게 거르고 있는 곳
금방이라도 바지 걷어붙이고 휘적휘적 거슬러오르고 싶은.
 

 
 
물가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주머니에 달고 다니던 노리개처럼 생긴 
노란 산괴불주머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내암리길
 

 
 
한라산 빗길에서 만난 금방망이꽃마냥 반갑다.
물가로 바짝 다가서서 물을 들이킨 짐승처럼 다독거리며 멈춰 설 곳이
내암리에는 너무나 많아서 물소리는 박각시들마냥 봄꽃잎을 타고
또다른 지천을 만든다.
 

 
 
오래 오래 들여다보느라 무릎에 시큰하니 별이 돌 것 같아
돌아보면 풀이며 나무에 가 붙는 별부스러기들
 

 
 
그 한 자리 오지게도 꾀고 앉은 숲개별꽃을 만날 것이다.
검은 술을 별꼬리마냥 씽긋씽긋 날리며 봄산 떡잔치를 알리는
숲개별꽃, 어린 아이는 천재시인마냥 꽃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숲개별꽃의 먼 친척인 개별꽃, 그냥 쇠별꽃을 보며
야, 막내별이다! 하고 얼굴이 손나팔모양이 되던.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들이 하늘과 물과 땅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모두가 가르쳐준 대로 물거울을 달고 별과 새소리를 모으고,
봄을 알리는 개구리들의 물방석을 두었다는 일.
그마저 놓는다면 물이 흘러가 강에 이르고 바다를 만든다고 해도
기약없는 연애일 뿐이라는 것을 내암리는 알고 있다.
 

 
 
벌써 다녀간 고라니, 노루는 알고 있다.
꽃을 받쳐주는 고슬고슬한 잎이 노루귀이지만
누구나 눈부처 같은 꽃의 이름과 자태를 말할 수 있는
내밀한 자리여!
 
 

  
 

 
 
한잎 달게 베어먹은 이파리 위로 솟은 통꽃 위로 찾아온 벌의
긴 대롱입이 얼굴반찬(공광규 시 제목) 앞두고 뻗는 젓가락처럼 느껴져
입맛 다시는
 

 
 
앵초 앞에서 발랑 뒤집힌다. 사랑하는 님의 손수건처럼 보드랍고
손수 술을 단 듯 정이 도타운 잎맥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
 

 
 
피나물처럼 노란꽃 피우고도 붉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게 되리.
우려내고 우려내어 품어야만 하는 미칠 듯한 사랑이야말로
등신불처럼 내놓아야 하는 또다른 몸이자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
 

 
 
그 옛날 피난 나오는 길에 낳았다고 피란이라고 이름지었던 먼 친척의 이야기처럼
짠하고 아슴한 기억들이여
족두리 쓰고 지냈던 첫날밤에
질금질금 수만갈래 가지로 퍼진 물의 아기씨들이
매봉산 나물들처럼 지천에 깔린 봄옷들이여
다 여기 내암리에서 샘솟고 있음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