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시 잘 쓸 1학년
“ 가장 시 잘 쓸 1학년 ”
시 쓴다고 학교로 불려다니는 걸 좋아하는 도깨비.
오늘은 보은의 삼산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아이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요즘 1학년과 2학년은 거의 신인류나 다름없다는 말을 전해들었지만 설레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작가님 만난다고 무척이나 설레고 있어요."
담당 선생님이 편하라고 덕담까지 해주니 셀렘이 기쁨으로 바뀌더군요.
"우리 학교에 작가 선생님이 오신 게 처음이지요?"
교장 선생님도 한술 더 얹어주시니 몸둘 바를 몰라 비비 몸을 꼬아서, 오자성어로 '뭘 이런 걸 다'하고 제가 다 영광이라고 화답했습니다.
보은 삼산초등학교는 3반까지 해서 한 50명이 한 학년 정도 되더군요. 첫 시간은 1학년, 두번 째 시간은 2학년 순으로 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도서관 칠판에 '이종수 작가와의 만남'이라고 프린트된 종이가 간략하게 맞이해주더군요.
수업 시작 종이 울리고 1학년들이 반 별로 들어왔습니다. 참 작다 싶은 아이부터 5,6학년은 되고도 남을 몸집의 아이까지 들어와 한 줄로 배치한 의자에 앉는데 마치 기차 타고 어디라도 떠나는 기분이더군요.
"자, 우리 작가님 오신다고 '풀' 외웠죠?"
"네, 네. 선생님!"
헉 이건 무슨 상황? 선생님이 미리 시집에 나온 시 하나를 읽어주고 계략을 짠 모양이더군요.
풀
이종수
내가 풀이라면
뱀이 지나가고
멧돼지가 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바람 불고 천둥 번개 치고
어두워지다가 비에 잠겨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무슨 서당도 아니고 또롱또롱한 목소리로 시를 읽는 단체 합창 같은 상황에 얼떨떨해지면서 무한감동이 밀려오더군요. 알기나 알까?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풀, 다음이 뭐죠?"
"이종수!"
"그렇죠. 풀을 쑤신 이종수 작가님을 모시고 시 이야기를 들어볼 거예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예쁘게 들어봐요."
풀 다음 이종수.
"햐, 이런 영광이! 나도 못 외우는 걸 다 외워서 들려주다니 고맙습니다."
깍듯이 높임말을 써가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도 다시 궁금해졌다. 선생님이 가장 쉬워보이는 시를 뽑아서 준 것을 외우다 보니 그런 것일까?
먼저 온 두 여자 아이가 종이를 건네고 들어가기에 펴보니,
이종수님께
이종수님 풀이라는 씨가 너무 좋아요 저도 씨와 동시를 써보긴 해도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었어요 사랑해요 1-1 정하연 올림
이종수 선생님 <풀>이라는 시를 써서 우리 공부 도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덥부네 공부 열심히 하고 이어요. 이종수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1-1 박지민
열심히 풀을 공부했구나 싶더군요.
"이 시를 읽으니 알 것 같아요?"
"네, 저도 그런 생각한 적이 있어요."
"자연스러워요."
거리낌없이 손을 들고 들어서 말하는 아이들. 누구 먼저 시켜야 할 지 모를 만큼 봉숭아학당이 되어버렸지만 공통된 답은 알 것 같다는 것이더군요.
"맞아요. 시는 어렵다고들 하지만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되는 거예요."
한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아서 시 한 편씩 써보아야겠다는 생각은 접고 재미있는 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 다녀보니까 초등학교에서 시 가장 잘 쓰는 학년이 어디인지 알아요?"
거의 다 손을 높이 들고 말하더군요.
"5학년이요?"
"왜 그럴까?"
"나이가 먹어서 배운 게 많잖아요."
"많이 써봤잖아요."
"쓰고 또 쓰고 고치니까"
도서관에 걸린 시화들 가운데 거개가 5학년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다녀보니까 1학년이 시를 가장 잘 쓰는 것 같아요."
1학년들이 전부 놀란 얼굴로 "왜요? 왜요?" 하고 묻더군요.
"이 선생님 아들도 너희보다 어렸을 때 식당에서 '공기밥별도'에서 '별'을 찾아냈거든요. 생각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지만 말의 천재가 아닐까 싶을 만큼 재미있고 기발한 걸 써내는 건 1학년이 많았어요."
어려운 말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교육제도가 바뀌어 시심을 돋우고 학교다워지면 평준화가 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1학년들이 훨씬 잘 쓰는 건 맞는 듯합니다.
"자, 들려줄까? 저기 멀리 공주에서 1학년이 쓴 침대를 읽어줄게."
내가 화날 때
침대를 때린다.
난 화날 때 슬프다.
베개에 눈물을 흘린다.
흘릴수록 더 슬프다.
슬플수록 더 슬프다.
공주교대부속초등학교 1학년 윤서빈의 시를 읽어주었습니다. '침대'라는 말만 들어도 비식비식 웃더니 침대를 때리는 심정을 알 것 같다는 눈치로 떠들기 시작하더군요. 누나, 오빠, 형,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침대를 때리며 울던 날을 가슴으로 받아내는 아이들.
"이 시를 쓰니까 옆에 있던 친구가 어떤 시를 쓴 줄 알아? 약간 질투가 나서 나도 잘 써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본다고 쓴 게 '인형'이야."
화가 나면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는 나와 인형이 있다.
인형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
인형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다.
공주교대부속초등학교 2학년 윤지우의 시는 어쩌면 쌍둥이 같은 시다. 이렇게 자기 말로 쓰면 읽는 사람이 비슷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 시이니까요. 마저 읽어주었습니다.
내 친구는 항상 자신감이 많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부럽다.
나도 자신감이 많으면 좋겠다.
그리고 친구는 항상 나를 많이 도와준다.
나도 친구를 도와주는 날이 오겠지?
충주 탄금초등학교 2학년 채희빈의 시를 읽어주니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질문 아닌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해요."
"뭐가?"
"그건 마음인데 그렇게 쓰니까 이상해요."
마음에 있는 소리를 쓰니 이상한 거지요. 저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을 내보인다는 것은 낯설고 이상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에 꾹꾹 눌러두고만 있지 말고 어떤 마음을 하고 있는지 쓰면 저 시처럼 자신의 모자란 마음을 친구에게 전달하게 되고, 시를 쓴 친구는 마음이 한결 나아지겠지?"
손을 들고 말한 친구 덕분에 1학년이지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얼굴빛을 하며 웅성거리더군요.
"자, 이제 재미있는 시를 들려줄게."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간다
즐겁게 가고 있는데
개똥이 있다
'개똥'이란 말에 아이들이 크게 웃더군요.
"왜 똥이란 말만 나오면 이렇게 웃게 될까요?"
"냄새 나서요."
"더러워서요."
"그런데 냄새 나고 더러운 데 웃을까요?"
왜 똥이야기만 나오면 웃게 될까요? 궁금합니다.
"전, 안 웃었는데요."
왜 웃느냐고 물으니 정색을 하고 안 웃은 척하는 아이들이 귀엽더군요.
그것도 개가 싸고 있었다!
아이들이 통째로 뒤집어집니다.
헉!
내 똥보다 굵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도서관이 꽉 찹니다.
자존심이 상한다
많이 먹어야지
드물게도 5학년 아이 시 중에 건진 신지우(공주동초등학교 5학년)의 시입니다. 말이 되냐고들 하소연을 하면서도 지켜보던 선생님까지 한바탕 웃어제낍니다. 그 뿐입니까. 연달아 읽어준 다음 시는 어쩌고요.
다 먹고 싶다.
피자, 치킨, 탕수육, 짜장면, 과자, 젤리, 아이스크림, 햄버거, 떡볶이
다 먹고 싶다.
그리고 마음대로 먹어서
최고의 돼지가 되고 싶다.
증평 삼보초등학교 2학년 이준희의 시를 읽어주니 역시 뒤집어집니다. 이쯤에서 시를 써보게 하면 더 훌륭한 시가 나올텐데 아쉽더군요. 그러나 오늘은 시 놀이 한 셈치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한 편, 제가 만난 최고의 1학년 시 한 편 마저 읽어줄게요."
강해용
김윤학
엄청 빠르다.
내 친구다.
최고의 돼지와 개똥이 퍼뜨린 재미에 빠져 허우적대던 아이들이 일제히 그게 뭐냐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그래, 이뿐이야. 더 이상 뭘 더 잘 쓰겠어. 시는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자기만 쓸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희들도 잘 쓰려고 꾸미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쓰면 돼요"
엄청 빠른 내 친구. 강해용이 구원투수인 셈입니다. 어김없이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립니다. 한 시간이 아깝게 흘렀지만 할 이야기는 다 한 느낌입니다.
다음 시간 2학년 아이들이 등장하고 비슷한 이야기로 친구들의 시를 울궈먹었습니다. 비슷한 반응이더군요. 다르다면, 시를 가장 잘 쓰는 학년이 1학년이라고 하니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는 것, '그것도 개가 싸고 있었다/그냥 가려는데/헉!' 다음에 뭐라고 했을까 물었을 때 하나같이 더 굵은 똥을 싸야겠다는 자존심 상한다는 말로 비추어보아서도 알겠더군요.
좀 전 다녀간 1학년들 보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하니, '쪼고만해요', '귀여워요' 하며 뭘 물어보느냐는 얼굴빛을 하는 2학년 아이들. 유일하게 한 아이가,
"1학년 때는 시를 많이 읽고 쓰고 외우는 시간이 많아서 걔들이 잘 쓰는 거예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로 재미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참, 쉬는 시간에 1학년 여자 아이가 편지를 주고 가네요.
이종수 선배님 저을 우게 해주셔서 감사함니다
다시 한 번 단풍박수를 쳐주었습니다. 2학년 한 아이가 수업 종이 울린 뒤에 질문 시간에 묻더군요.
"어떻게 하면 시인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냥 듣는 건 아니지요. 계속 시를 쓰다 보면 사람들이 저 정도면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고 말할 때 쓰는 게 아닐까요?"
우문현답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