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 색도 다양하게 물든다
2020 문화가 있는 날 작은도서관 시 쓰기
우리 인생 색도 다양하게 물든다
-증평 꿈빛도서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만든 새로운 세상에서 아이들과 어머니가 함께하는 시 쓰기를 하는 날. 증평에 새로 생긴 꿈빛도서관에 처음 오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외갓집에 오는 기분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문화가 있는 날이면 시를 통해 여러 삶을 만나고 그것이 시가 되어 쓰여지고 여러 곳에서 다시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시라고 하면 교과서 틀의 시와 각자의 삶과는 벗어난 아주 먼 곳에서 불러오는 시의 말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에 낯설어 하지만 정작 다른 도서관에서 나온 시를 읽어주면 공감하게 되고, 짧은 시간이지만 한껏 자기 목소리를 끌어내어 시를 쓰고 나면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시로 연대를 맺기라도 한 듯 처음 오는 곳이지만 설레고 기쁘다.
오늘은 아이와 부모가 함께하고 시를 쓰는 시간이다. 먼저 도서관 모든 운영을 도맡아 하는 관장님 아이들(가끔 어머니 대신 도서관 자원봉사를 한다고 함)을 비롯하여 쌍둥이 중학생을 둔 어머니까지 다양하게 모였다. 저학년부터 고학년, 청소년, 그리고 각자 나이대가 다른 어머니들까지 고루 모였다. 시가 허용할 수 있는 내용이 무한정이기에 이런 시간이면 가족이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를 만날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지만 과감하게 이야기할 건 해야 한다. 시는 곧 대화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써서 냉장고 문에 붙여 놓으면 그것이 비록 싸움이 시작이 되더라도 대화의 시작이자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니까. 한 모듬씩 앉아서 시 이야기를 하고 쓰기로 했다.
내 안에 작은 아이가 살고 있었어.
이제야 알게 되었네.
마흔이 되어 너를 알게 되었네.
안녕? 작은 아이!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여행하는 그날까지
너를 지켜봐 줄게.
너와 나는 하나니까!
우부영, <작은 아이>
연필을 써도 잘못 쓰면 지우개
글씨를 틀려도 지우개
종이에 낙서해도 지우개
일기에다 그림 그려도 지우개
지우개 세상
김라이, <지우개 세상>
요즘 인문학 관련 책을 읽으면서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듯한 우부영 어머니의 ‘작은 아이’를 먼저 읽었다. 과거인 줄만 알았던 일이 지금의 나를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끝내 미래의 모습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어머니로 살게 된 마흔에 이르러서야 내 안에 ‘작은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아이가 어떤 트라우마이든 좋은 모습이든 현재의 나와 어떻게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낯선 자리지만 시를 빌미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혼자 눌러두고 있을 때와는 달리 여러 반향으로 퍼져간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인사 나누는 이웃이었지만 이렇게 ‘작은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각자의 마음 벽을 허물게 된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일이다. 어쩌면 ‘작은 아이’는 옆에서 함께 시를 쓰고 있는 아이에게도 내미는 손길인지도 모른다.
시 안에서 화자는 ‘작은 아이’를 ‘너’로, 마흔이 되어 그 아이를 발견한 ‘나’로 써놓고 그 둘이 함께 여행하는 날이 올 것이고 그날까지 지켜봐 준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이다. ‘작은 아이’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아직 ‘너’와 ‘나’가 ‘우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곧 한 몸이 되어 그동안의 거리를 허물겠다는 의지로 바라보면 이해가 되는 시다.
옆에 나란히 앉은 라이도 엄마 눈치 보지 않고 자기만의 시를 썼다. ‘지우개’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 때까지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지우개’란 보기 시가 만들어낸 비슷한 유형의 시들이 하루에 몇 번씩 만들어질 만큼 흔하다. 그런 만큼 기계적인 시가 될 여지가 많은 소재다. 쓰고 지우는 일의 반복이기도 한 공부의 연장선이기에 눈여겨 살펴보면 못다 한 말이 많다.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원작(?) 따라 ‘요술쟁이’ 같은 것으로 드러나다가 진화를 거쳐 새로운 시가 간혹 나오기도 한다. 쓰고 지운다는 지우개의 속성에 자신을 비끌어 매어 생각하다 보면 자기를 닮은 지우개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라이의 지우개는 온통 지우개 세상이다. 언제든 쓰고 그리다 지우면 되는, 단순하게 보면 그렇지만 조금 다른 지점도 짚을 수 있다. 우리가 잘못 쓴 내용도 지우면 그만이라고, 괜찮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게 뭐니?” “왜 그렇게 썼어?” 하는 말과 함께 상처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지우개는 저 자신이 되어 빨간 줄로 그어버린 말을 지우는 무거운 것이 되기도 한다. 주로 중,고등학생에게서 나오는 내용이다. 라이가 쓴 시에서는 좀 더 능동적인 자세가 보이는 듯하다. 잘못 써도 지우면 되고, 틀려도 지우면 되다가 낙서를 하고 일기에 그림(이제 더 이상 그림일기를 쓸 나이가 지났다고 말하기도 하면 강요하기도 한다)을 그려도 지우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앞서서 어머니가 말한 ‘작은 아이’인 셈이다. 자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움직이면 좋고 나쁨을 충분히 알고 되는 것이다. 방어 자세가 되느냐 능동적인 자세가 되느냐가 갈리는데 라이는 꿈틀대면서 자기만의 말을 뱉어내려고 하는 것 같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시의 매력이니 어머니와 아이가 두 시를 놓고 말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새벽 운동 다시 시작하니
몸이 천근만근.
질질 끌고 며칠 하니
어느새 성큼성큼.
살도 빠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튼튼해지네.
○○○, <새벽 운동>
공부를 하고 있는데
똑똑!
TV가 놀러 가잔다.
책을 읽고 있는데
똑똑!
스마트폰이 놀러 가잔다.
○○○,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새벽 운동을 시작한 어머니는 책을 잘 읽고 공부도 잘 한다는 아이에 대해서 먼저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자랑스러울 만하다. 어머니는 새벽 운동을 통해서 가벼워지고 있고, 아이는 시를 통해 재치 넘치는 시를 쓰고 있으니. ‘천근만근’의 몸을 질질 끌고 운동에 나선 어머니의 현재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이도 공부하고 책을 읽을 시간이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의 짐을 어찌 덜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몸’과 ‘마음’의 짐은 비슷한 꼴로 시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응원해 줄 필요가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다그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나 그대로 지켜봐 주는 것 또한 필요하다. 역시 같은 자리에서 나온 서로 닮은 시를 읽고 대화가 필요하다.
힘들고 지친 날엔
안개가 가득
한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네.
두려움이 속삭인다.
다시 돌아가라고.
행복함이 가득한 날엔
저 멀리 파란 하늘이
내 가슴에 가득 담긴다.
감사함이 속삭인다.
나를 사랑한다고.
나를 기다리는 날엔
끝도 없이 펼쳐진 그곳에
함께 나아갈 이들과
기대감에 부푼다.
혼자가 아니라고.
강정희, <요즘 난>
어느 날은 마음이 복잡하다.
하염없이 슬프다가
뛸 듯이 기쁘다가
그냥 그렇다가
그러다 모든 게 합쳐져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음식과 같이
생각이 많아져 한계가 온다.
그럴 때 뭘 하면 되는지……
한 감정에 집중해 나머지를 지울까?
모르겠지만 그대로 있을까?
어렵다.
그럴 때 나는 멍을 때린다.
그저 잠을 자는 것처럼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박서희, <멍 때리기>
나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때로는 같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나의 조력자 같은 존재가 가족이다.
때로는 갈등과 서로의 입장으로 싸우기 일쑤지만
싸우고 시간이 지나면 서로 화해하고
가족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바로
소중한 가족의 의미이다.
박희상, <가족>
세 편의 시, 한 가족. 희상이와 서희는 이란성 쌍둥이로 중학생이다. 어머니의 ‘두려움’과 ‘감사함’과 ‘기대감’은 서희와 희상이를 비롯한 가족의 서로 다른 모습이자 차이이자 반복되는 가운데 나오는 절실함이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 날이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 그 다름을 견뎌온 말이기도 하다. 혼자가 아니기에 다시 고쳐 잡는 고삐이거나 운전대와도 같다. 시의 틀을 갖추면서 담담하게 써낸 시에서 이란성 쌍둥이를 키워낸 어머니의 절박했던 시절은 차분하게 정리된 듯 보인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과 ‘감사함’, ‘기대감’은 얼마나 많은 날을 순서도 없이 내달렸을까? 희상이와 서희의 시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 둘도 생각이 많다. 어머니가 느낀 감정의 묶음처럼 현재진행형인 고민에서 혼란스럽지만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희는 자기 감정, 자기 몸과 마음을 읽고 있는 셈이다.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길을 밟아 자신의 몸을 꿰뚫고 가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멍 때리기’라는 것이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한 것이라 여겼으나 지금은 현대인의 미덕이 된 지 오래다. 가만히 멈춰서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가 복잡한 마음의 스위치를 끄고 번아웃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자신만 후벼파서 망치게 되기 때문에 침을 놓다가 끝내는 뜸을 놓아 치유하는 것과 같다. ‘하염없이 슬프다가/뛸 듯이 기쁘’다가 그 모든 감정이 범벅이 되어 무슨 맛인지도 모를 음식 같은 지경이 될 때는 서희는 잘 짚어내고 있다. 어느 과학자는 우리가 ‘기쁘다’거나 ‘슬프다’는 감정이 화학과도 같아 잠깐 동안 퍼졌다가 스러지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뛸 듯이 기쁜 순간은 방귀 냄새처럼 금새 가시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서희도 그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잠을 자듯이 쉬는 것이 다시 살아나는 길임을 아는 것이다.
희상이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고민했고 지금도 정리 중인 가족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울고 웃고, 기쁘고 슬픈 순간들을 지나야만 가족이라는 존재가 제대로 느껴진다는 것을. 가족이란 존재는 그런 것 같다. 전에도 그랬으나 그런 줄 모르고 헤맸다면 지금과 앞으로는 달라야 한다. 가족이 해체된다는 것이 흩어져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살아도 순간에 해체되기도 하고 오랜 상처로 인해 찢어지기도 한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가족이란 의미도 주체를 말할 때의 존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혼자만이 잘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서로 찾아야 할 의미이자 실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음 시들은 가족으로 함께 묶이지 않은 시들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웃기냐.
나도 웃기다.
너만 좋다면야…….
이지원, <내 새끼>
이지원 님의 시는 끔찍이도 아이를 아끼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드라마 대사를 패러디(노린 것은 아니고 그냥 생각나서 쓴)한 느낌이지만 차 뒷유치랑에 ‘금쪽같이 이쁜 내 새끼 탔다’는 문구를 보는 듯하다. 어미 새가 그렇듯 먹이를 물어다 주고 똥마저 물어서 치워주는 극진한 마음을 그래도 보여주는 듯하다.
시는 어렵다.
시를 쓰려고 하면 나의 모든 생각들이
도망가 버린다.
1년마다 새로운 뇌를 사도
시는 저장하지 못한다.
시는 나의 생각을 가져가 버리는
괴물이다.
장성준, <시>
성준이는 과학책을 좋아하는 4학년이다. 일곱 살 동생이 슬라임 놀이를 할 때도 책을 읽던 아이다. 어머니가 도서관 업무를 보는 바람에 혼자 섞이기는 했으나 과감하게 “시, 안 써도 돼요?” 하고 말한 아이다. 그냥 싫다는 표현이지만 써내지 않으면 안 되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을 느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 그거 별 거냐는 식으로 써낸 것 같다. ‘시를 쓰려고 하면 나의 모든 생각’들이 도망가 버린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아직은 시의 진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프로그램으로 치면 ‘1년마다 새로운 뇌를 사’도 저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제 ‘시’가 도대체 무엇인지만 알면 새로운 프로그램이 들어설 것만 같다. 그 상상 속의 ‘괴물’과 싸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흥미를 가지고 바꾸어 갈 것만 같다.
마스크 안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우리 집에서
아들은 수업을 들으면서 버럭버럭,
딸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 투덜투덜,
신랑은 쇼핑을 못 가서 스트레스가 만땅,
손에 잡히면 방망이로 때려주고 싶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걱정,
어렸을 때 친구들과 수영하며 삶은 감자 먹던
그 여름날이 그립다.
최영순, <여름날>
코로나 시대를 견뎌내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큰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시에서는 그저 단절된 상태의 갑갑함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영순 님은 이 갑갑한 ‘여름날’ 속에서 다시 그때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여름날’을 떠올리고 있다. 왜 그런 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지는 가족 안의 모습만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버럭버럭’ ‘투덜투덜’ ‘스트레스 만땅’이라며 모든 화를 쏟아붓는 가족들을 방망이로 때려주고 싶은(코로나라고 비껴 말하는 듯하지만)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다 같이 견뎌내고 있는 일에 혼자만이 겪는 일처럼 짜증을 내고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 겪는 일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다시 친구들과 수영하며 삶은 감자 먹던 그 ‘여름날’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다.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기록해야 한다. 전쟁의 기록이 그렇듯 그 또한 우리 삶의 연장이기에.
너는 너인데
나는 너를 깎고 있다.
베일 듯한 날카로움도
고르지 못해 부딪히는 울퉁한 면도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찬란히 빛나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영롱히 반사되는 무수한 별들도
너는 너인데
나는 너를 깎고 있다.
깎이는 고통이 더 클까
모난 모습 지닌 채 돌아다니다
이리저리 채이고 부딪히며
세월에, 경험에, 사람에,
어쩔 수 없이 닳아져가는 그 아픔이 더 클까.
너는 너인데
나는 너의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깎이게 될 닮음을
걱정하며 너를 깎고 있다.
너를 가리고 있는 모난 모습 거칠은 면 속
네가 지니고 있는 너의 찬란한 그 가치가 드러나도록
이유진, <다이아몬드 원석-부모의 마음>
이유진 님은 모든 보석이 그렇듯 ‘원석’의 가치에 대해서 썼다. 부제를 달아 부모님에 비유해 썼지만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자신과 아이, 어느 누구인가를 가릴 것 없이 ‘너’를 향한 것이니. 타자라고 부르는 철학적인 의미가 그렇다. 원석은 세월과 경험과 사람을 겪어내듯 인생으로 치면 깎을 수 없는 가치 그 자체이다. 더 닳아질까 깎고 있는, 깎음으로써 돋보이지 않는 ‘찬란한 가치’가 드러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보다는 늙어 간다는 안타까운 표현처럼 어찌 해 볼 수 있는 무력감 속에서 솟아난 ‘가치’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돌고 돈다
빙글빙글
둥근 지구를 돌 듯 열심히 돈다.
한 바퀴 돌면 터진다.
도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더 무섭고 심지어는 짜릿하다.
사계절을 거치며 도는 지구 한 바퀴
우리의 인생 색도 다양하게 물든다.
그때가 행복했기에……
다시 도는 사이클을 나는 받아들인다.
○○○, <시한폭탄>
시한폭탄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돌리기와도 같다. 돌고 돌면서 언제 부딫혀 폭발할지 모를 마음과 마음의 싸움과도 같다. 아이를 키우며 현실과 맞닥뜨려가며 사는 부부간의 고민을 담을 시로 읽힌다. 그런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고 어김없이 맞부딪힌 길목에서 다시 안 살 것처럼 싸우는 현실부부의 이야기를 시한폭탄에 빗대어 잘 표현했다. 돌고 돈다는 반복은 그렇게 운동하면서 뭔가 차이를 만들어낸다. 무섭고 짜릿한 일이었지만 사계절을 거치며 지구가 바뀌듯 인생이라는 색을 다양하게 물들이는 것이다. 아이를 키워내며 싸우던 때가 오히려 행복한 일이었는지 모른다는 것을 무수한 감정선을 확인하고 난 뒤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도는 사이클’은 반복인 셈이다. 왜 돌고 돌아 반복되는지, 그런 반복을 통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알고 끝내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연륜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시가 그렇다. 쓰고 기록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시가 하는 일이다. 시가 우리 몸에 들어와서 그렇게 쓰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알게 되고 그런 뒤에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내 안의 ‘작은 아이’와 여행하듯 길을 떠나고, 내 몸의 연장인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