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020년은 과거로 돌아가 1900년대에 그렸던 미래이다.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우주 국가라든지 해저 도시에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등의 이야기로 그렸던 2천 년대이다. 그러나 그다지 바뀐 것 없는 기후변화의 위기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1900년대에 그렸던 것이 실현된 것은 많으나 삶의 질로 따져보거나 했을 때 과연 우리 인간의 집단 지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읽은 것 같은 이야기 가운데 <타임머신>과 <투명인간>이 있다. 어쩌면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알고 있는 내용 때문에 두 소설이 허버트 조지 웰스라는 시대를 앞서갔던 소설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 같다. 지금은 고전이 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서 작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소설에서 다룬 주제들만 보면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공중폭격과 화학무기, 레이저 광선, 우주여행, 유전자 공학, 지구 온난화 이야기가 소설 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거꾸로 꿰어 맞춘 궤변 같지만 그가 탐닉한 주제들을 보면 일찍이 우리 인간들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어떤 문명과 사회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던 듯싶다. ‘시간 여행자’가 타임머신을 만들고 시간여행을 통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 핵심를 살펴보면,
“정신 능력, 즉 주관적 상상을 과학 기술의 실제 견본으로 형상화한 타임머신”은 “인간 운명과 우주 역사, 계급투쟁에 대해서 그리고 성(性)과 여가, 노동 등의 진화"를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곧잘 말하는 지성이라는 것이 만들어낼 미래 사회가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시간여행자가 팔만 년이 넘은 미래로 가서 겪는 지구의 모습은 참혹할 뿐이다. 몇 번에 걸쳐 큰 변화를 거친 지구는 폐허 위에 입힌 도자기 성과 육식의 종말로 인한 물렁한 생물체일 뿐인 엘로이들과 지하 세계에서 그들을 잡아 먹고 사는 '몰록'의 세계일 뿐이다. 그곳에서 다시 타임머신을 찾아 탈출하고 더 미래로 가는 장면에서도 지구는 암흑과 동토일 뿐인 것을 보면 지성의 절멸이라는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다.
시간 여행자가 들려주는 미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없었으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전망 속에 문학적인 메시지는 지금 우리 시대가 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만든다. 과학과 기계, 그리고 자연의 배제 속에 오는 미래는 예상 가능한 절멸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간여행자는 다시 시간 여행을 떠나 3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에필로그로 끝을 맺는 것은 지금 충분히 대비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토론과 변화 속에서 갖추어 갈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라는 것 같다.
웰스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거쳐 성장하기 마련이므로 이 젊은 시절의 역작에 후회는 없다. 내 소중한 옛 친구 <타임머신>이 에세이와 담론 들 속에서 여전히 회고나 전망의 유용하고 편리한 도구로 재차 거론될 때마다 나는 아주 기분 좋은 자부심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문학작품이 과학을 바탕으로 한 예언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갈 시대의 얼굴을 가늠하게 하고 삶의 형태를 바꾸는 일이 되기도 하기에 웰스의 저작들은 고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고전의 재발견을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 미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