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한 나날

시라고 썼으니 시라고 믿겠다-괴산 송면중학교 학생 시

참도깨비 2022. 7. 8. 15:16

송면중학교 교정에서 찍은 메꽃과 붉은산꽃하늘소

시라고 썼으니 시라고 믿겠다

-송면중학교 학생들 시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첫 시간, 질문지에 처음 보는 내용이 있었다. “송면중학교를 주제로 즉석으로 시 써주세요! 제발송면은 소나무가 많은 면 소재지이다 보니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하나도 아닌 둘이 마치 송면으로 2행시를 써야만 통과시켜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무리 시인이라고 해도 바로 나오진 않는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화양동 골짜기를 그냥 지나긴 아까워 너럭바위에 앉아 책가방에 가져간 어느 시인의 사투리가 살아있는 시 한 편을 읽었더랬는데, 두 번째 시집 달함지에 발표한 화양이란 시가 떠올랐다.

 

안양시각장애인협회에서

단체로 물놀이를 나왔다

 

둘씩 팔짱을 끼고 물가로 내려오는

느릿한 걸음과 표정만으로는

누가 눈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뙤약볕 내린 바위에

잠자리 날개무늬

모래밭을 지나는 제비나비

물가로 나오는 느린 걸음 위로

골짜기 너머 비를 뿌리고 오는

구름 그림자 겹친다

 

맨 먼저 하는 닐

두 손으로 만든 물그릇에 가만히

얼굴을 씻는 일

그것으로 눈을 뜨는 것처럼

밝게 웃어 보이는

화양나무들만 같아서

눈시울 울컥해지는 골짜기

 

이종수, <화양(華陽)>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먼저 알려줄 순 없지만 갓 소나무에서 내려온 청설모나 새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과 시 이야기를 하고 시 한 편씩 쓰는 시간이 화양이지 않을까. 잔뜩 멋을 부려 화양연화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아이들은 시 하면 떠오르는 영감’ ‘메시지’ ‘그림은 옛날부터 잘 그렸는지’ ‘왜 시인이 되었나?’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를 묻고 외람되지만 첫사랑에 대해서 물었다. 시에서 질문이 중요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인생에 비유할 수 있으니 자잘한 질문으로부터 시 이야기는 무르익어가고 자신만의 시를 쓰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시간, () 송면중학교(松面이란 말로 들리지 않고 송순이나 송강선생 같은 말로 들리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학생들의 시를 소개한다.

 

비록 나는 넉넉하진 않았지만

너에게 베풀 순 있었고

 

비록 나는 단단하지 못했지만

너의 앞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

 

다가올 날들에게 무심할 정도로

지났던 날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비록 나는 네 곁에 없지만

너는 그대로 꽃 피길 바라.

 

오윤(1학년), <비록 나는>

 

시 이야기하고 또래 시 읽어주고 공감하고 난 뒤에 시 쓰고, 다시 모두의 시를 읽어주는 것까지 하려면 정작 시 쓰는 시간은 10분 안팎이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쓰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짧은 시간에도 시는 당당하게 나온다. 오윤의 시는 마치 오늘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먼저 선보였는데 그 나름의 깊이가 있다. 넉넉하진 않지만 베풀 줄 아는 믿음직한 몸과 마음을 가졌다는 그대로다. ‘비록이란 말이 처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뒤에서 믿어주는 존재 자체로 뜻하는 바가 크다. 이 피길 바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넉넉하고 단단하지 않아도 이기에 베풀 수 있었지만 다가올 날과 지난날에 무력한 존재이기만 하다는 것일까. 여기서 는 친구가 아닌 그런 날들에 대한 미안함일까? 그러니 3연에서는 뭔가 구체적으로 표현을 해주었어야 했다. ‘다가올 날들에 무심하고/지난 날들에 미안한그래서 너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니 비록 나는그러하지 못했지만 너는 그대로 꽃 피길 바라는 마음일 수밖에 없다. 주는 마음은 그런 것이다. 받기만 하는 마음보다 상처받기 쉽지만 보상받기 위해 한 것이 아니라 비록이란 말이 결연하고 비장해 보인다. 오윤의 시 다음에 온 그릇또한 그런 마음을 그대로 내비쳐서 좋다.

 

내가 무엇을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은데

 

자꾸 나에게 무언가를 흘려보내고

자꾸 나에게 부담을 준다.

 

이미 내 그릇은 넘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기분이지만

그 무언가는 아직도 흘러온다.

 

정보연, <그릇>

 

현재의 상태가 그렇다. 그릇이란 내 스스로 된 것이 아닌 듯하다. 흔히 그릇론을 펼치며 어떤 것이 되라는 말로도 들리는데, 그런 주문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무엇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존재임을 알고 있는데 자꾸 나에게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누구일까? 그릇의 쓰임새는 그 자체로 오목하니 담는 것인데,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내 잔이 넘치는 것은 축복이지만 보연이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그릇에 담고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무엇이다. 그릇이 젖는다고 말하지 않지 않은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릇인데 넘쳐서 온몸이 다 젖어버린 기분인 채로 있다는 표현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보연이 스스로도 아직 그릇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말해야 하고, 벌써 완성된 그릇이라 여기고 자꾸 무엇을 담으라고 흘려보내는 이는 자제해야 한다. 밥을 담든 물을 담든 쓰임새에 맞는 그릇 그 자체임을 알게 해주어야 마땅하다. 시는 이렇게 그릇이라는 사물이나 대상을 빌미로 자신의 말과 이야기를 해가는 것이다. 시를 함께 읽고 그 무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꼬여야/유혹해야 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고 한 롤랑 바르트(텍스트의 즐거움)의 말을 어렵게 빌어와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보연이가 당연히 알고 있는 그릇이란 말로 자신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이 생긴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시나 소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찾아 만나야 할, 구체적이고도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보연이가 쓴 시를 읽는 친구와 부모, 선생님이 독자로 만나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릇론에 대해 말해 볼 시간이 기대된다.

 

비가 오는 날 니가 가지고 놀던

연이 끊어졌을 때 넌 그걸 잡으려고

울면서 달려간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연은 계속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난다.

울지 마라. 엔젠가 돌아온다는 희망을 품으리

 

윤나경, <연날리기>

 

나경이도 뜬금없어 보이는 연날리기그릇을 대체하고 있다. 처음 본 오윤의 <비록 나는>에서 그렇듯 를 바라보며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간밤의 꿈처럼 들려주는 것 같다. 비오는 날에 연을 날릴 수 없지만 그런 상황은 간혹 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무언가를 흘려보내는그곳처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는 그 자체가 두려움이나 부담인 것일까. 그러나 나경이는 부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희망을 말하며 시를 마쳤다. 끊어진 연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떠나보낸 연이 다른 뜻으로 돌아온다는 것쯤은 새해 연날리기에서 일부러 멀리멀리 날려 보내는 뜻이라고 볼 수 있음을. 연이어 밀고 들어오는 시들이 만만치가 않다. 시 쓰기에 앞서 시에 대한 편견과 부담을 떨치고 또래 시를 읽어준 효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각자 맞닥뜨린 현실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을 시로 잘 써내고 있는 것이 기특하다.

 

세상이 점점 검은색으로 변할 때

내가 그댈 지켜주겠소.

 

여름밤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점점 사그라들 때

내가 그댈 지켜주겠소.

 

사람들이 그댈 괴롭혀 멍들고 피날 때

내가 그댈 지켜주겠소.

 

미안하오.

벌써 그대가 많이 다쳤구려.

 

당신의 몸이 깎이고

당신의 혈액이 점점 검게 변하는구려.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내가 그댈 지켜주겠소.

 

김재우, <내가 그댈 지켜주겠소>

 

시를 다 써서 낸 차례보다는 연관된 것끼리 이야기하다 보니 재우의 <내가 그댈 지켜주겠소>도 오윤의 <비록 나는>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에게서 그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누굴 마음에 두고 덜어주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대를 지켜주겠다는 내용의 시가 몇 편씩은 나온다. 자못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그대에게 미안하오가 또래들에게는 닭살이 돋을 수 있지만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읽어도 될 만큼 시는 여유롭다. ‘몸이 깎이고/혈액이 점점 검게 변하는것이 굳이 사람이라고만 할 수 없는 반전이 있는 것이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위해 다짐하는 말이 사람을 염두에 두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더라도 좋다. 마음은 소금밭일 수 있지만 시라고 썼으니 시라고 믿겠다’(뒤에 나올 시의 제목이기도 한)는 것만으로도 시 쓰기 효과는 충분하다. 연이어 살펴볼 <당연함>도 그렇다.

 

우리는 늘 곁에 있던 것을

당연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당연했던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감사를 느낀다.

 

김주희, <당연함>

 

세상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라는 주체가 잘 되려면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존재하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 어디 사람뿐일까.

 

삶은 달걀 삶은 오렌지 같은 운율적인 말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운율적이게 계속 반복되고 매일 성공만 하려고

결과만 좇으려고 한다. 매번 삶은 달걀을 똑같은 방법으로

깨지 말고 매일 새롭게 깨자.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이

너의 성공의 발판이랑 같다.

 

조동준, <>

 

꼭 한두 편씩은 나오는 은 식상해 보이지만 위에서 말한 각자의 현실을 말해주는 임기응변이어서 좋다. 첫 마디가 식상한 말을 가져왔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란 이런 것이라고 멋쩍게 말하는 듯하다. 도대체 운율적인 말이 왜 성공의 발판까지 된단 말인지 자세히 읽어야 한다. ‘반복과 성공만 되풀이하고 좇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운율적인 말은 시가 가진 것처럼 단순한 운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은 달걀이라거나 삶은 오렌지라고 말하는 운율적인 표현이 달걀을 새롭게 깨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일까. 단숨에 써낸 듯하지만 단순하게 읽히지 않고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을 잘 고려하여 두세 번은 읽어야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시는 한 번에 들어오는 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니 시를 쓴 사람에게 해석해 달라거나 설명해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직 다 정리되지 못한 듯 어설픈 이라도 여러 번 읽고 의중을 헤아려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불행하다생각한 적은 있을 거다.

그리고 삶은 불행하다고 말한다.

맞다. 삶은 불행하다.

하지만 그걸 이겨내는 게 진짜 삶의 의미일 것이다.

 

유연욱, <삶의 의미>

 

조금 쉽게 쓴 을 보자. 연욱이는 삶은 불행하다는 말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삶은 운율적인 말이자 새롭게 깨는 달걀처럼 자기만의 방법으로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라 못 박아놓았다가 그걸 이겨내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불행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알 것이기에 맞다. 삶은 불행하다고 말한 결연한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앞길을 전혀 모르는 두려움과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숨쉬기 벅찬 것만으로도 불행이라고 여기고 있을 테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 이럴 때일수록 맞다하기 앞서 길흉은 잘못 들어선 마음길에서 만나는 돌부리라 큰길에는 없다. 제길에 들어서면 조용하다’(이철수 대종경 연작 판화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 중에서)는 말처럼 물음을 던지고 찾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불행을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에서 찾고 하루하루의 삶에서 찾는 것이 연욱이가 말하는 진짜 삶의 의미가 되길 바란다.

다음으로 볼 시들은 순발력 있거나 단순하지만 간결하게 쓴 것들이다.

 

숨을 너무 많이 마셔

잠에 취한다.

정신은 꿈나라로

몸은 침대 위로

꿈나라에서도

잠에 취해

꿈나라를

돌아다닌다.

 

이한결(1학년), <>

 

한결이 시는 시 쓸 동안 참관한 선생님조차 누가 썼는지 알 만큼 그 자신을 말해준다. 아무 생각 없이 배고픔과 잠과 겨루는 즉흥시 그대로다. ‘숨을 너무 많이 마셔잠에 취한다는 발상이 새롭다가 꿈에서도 잠에 취할 정도라는 재미도 있기는 하다. 시를 쓰는 시간에도 격렬하게 자고 싶다는 말하는 듯하다.

 

새하얀 종이

금세 더럽혀지는

백지

원래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백지도 이곳도.

 

정나린, <백지>

 

한결이에게 에 사로잡혔다면 나린이는 백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백지를 받으면 무엇을 써야 할지 새하얗게 머릿속이 지워진다는 말처럼 읽힌다. 더렵혀진다는 것은 그릇에게 주어졌던 의무감이자 본연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 것일까. 어느새 더렵혀진 백지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되돌아갈 수 없는 이곳을 가리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백지는 자신의 말과 이야기로 채워야 할 이나 다름없기에 충분히 더러워질 수 있고 다시 고쳐 쓸 수 있다고.

 

뜨거운 여름밤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을 식히고 싶을 때,

네게 달려가.

 

추운 겨울날 꼬마 눈사람을 만들다 차갑게 식은 내 손을 뜨겁게 하고 싶을 때,

네게 달려가.

 

날 위해 차갑게 또는 뜨겁게 마중 나와 주는 너.

.

.

.

.

,

 

너는 정수기

 

김보은, <누굴까>

 

보은이는 시집에 있는 <나는 누구일까요?>의 수수께끼에 화답한 시라 볼 수 있다. 중간까지 읽으면 앞선 시들과 겨루는 듯하지만 틀을 바꿔 순발력을 보여주었다. ‘너는 정수기라 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스스로 궁금해하는 것을 못 참고 실토해버렸다.

 

난 분명 인사를 했지만

아버지는 못 들으셨다고 나를 혼내셨다.

내가 억울해하니 말해주셨다.

너 혼자 하는 건 인사가 아니라고

듣는 사람이 있어야 인사라고.

 

맞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니까 상대에게 자신의 말을

잘 전달해라.

혼자 쌩쑈한다고

억울해하지 말고.

 

김구만, <너 혼자>

 

이 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응어리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제목은 너 혼자정당하다거나 잘 한다고 해봐야 다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맞다, 인생은 불행하다고 말한 것처럼 불통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맞다 모든 것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것까지 헤아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면서 분노어린 말로 마무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 아무리 잘 했다고 해도 쌩쑈가 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정확히 말하면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속으로 끓는 이야기는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자신의 말을 잘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웅얼거리거나 억울함을 깔고 그 정도면 충분히 전달했거나 알아주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모두에게 물음을 던지는 시다. 돌멩이를 던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잔잔한 물결에 돌멩이를 던지면

작은 물결이 생긴다.

그 물결은 커지고 커져서 큰 물결을 만든다.

사람도 똑같다.

처음엔 사소한 말다툼이

거친 몸싸움으로 변한다.

돌멩이를 던지고 싶어도

참아보자.

 

○○○, <돌멩이와 물결>

 

일파만파란 말이 있지만 말다툼이 아니라 돌멩이와 물결이 마음을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사소한 말다툼이 거친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한복판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물음을 던지고 싸움을 걸거나 그로 인한 격한 싸움 속에서 서로를 알게 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참지 말고 <돌멩이를 던져라>로 다시 써도 좋을 것 같다.

 

회피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이 순간 회피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때 잠깐 무서워서 그 순간을 회피해 봤자

그 순간이 다시 되돌아오더라.

 

조규민, <회피>

 

아이들이 쓴 시를 읽어줄 때마다 서로의 시를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하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손길 같은 것을 느낀다. ‘돌멩이앞에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고 말해주는 효과라고 할까? ‘회피의 순간이 어떤 일로 이어졌는지, 다음에 볼 <가로등>처럼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한 공간에서 지낸 그동안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라도 하듯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둔 밤 골목길에 빛 한줄기.

내가 가로등에게 도움받았듯

나도 누군가의 길을 비춰주고 싶다.

 

김수연, <가로등>

 

한 줄 시로 써도 좋을 것 같다. 많은 친구들이 누군가의 이라 말했지만 정작 자신의 에 대한 것으로 읽고 싶다. ‘어둔 밤이 지금이고 가로등처럼 비춰주는 존재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빙의되듯 나타났다고 해야 할까?

 

십분 안에 써야 한다!

구분, 팔분, 칠분

오분 안에 써야 한다.

당최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분 남았다!

어쩌지.

시간에 쫓기며 시를 써본 건 처음이다.

이게 시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라고 썼으니

시라고 믿겠다.

 

최선유, <십분 안에>

 

10분의 시간으로 시를 쓰게 된다.

9분이 되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8분이 되니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든다.

7분이 되어 생각을 하게 되었다.

5분이 되어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3분이 되었다. 써보니 2분이 남았다.

1분이 되었을 때 여유를 부리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이 너무 후회되는 시간이었다.

 

곽효준, <10>

 

번갯불에도 충분히 콩을 구워 먹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십분안에 시를 써내라는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처음 해보는 일이다. 충분히 시간을 주고 쓸 거리를 찾고 고치고 다듬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십분은 가뜩이나 시간에 쫓기며 사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시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시라고 썼으니’ ‘라고 믿겠다는 순발력은 시간에 쫓기던 마음을 단숨에 환하게 해주고 있다. 자신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단숨에 쓸 수 있다는 것을 앞의 시들이 말해주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 ‘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비슷한 시들이 나오지만 마지막 변명과도 같은 자신만의 순발력을 써서 시를 완성하는 것은 앞으로 시를 계속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굳이 카운트다운을 하지 않아도 <10> 안에 시 쓰기는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생각이 나지 않아 더욱더 쫓기는 것은 잠깐이고 이미 마음에 있는 시를 발표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가 중요한 순간이 그 안에 들어있다. 효준의 후회는 정작 그 이야기를 쓰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짧게라도 털어놓고 보는 것이 좋다. <컴퓨터>처럼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내더라도 자신의 이야기 일부를 말하면 그다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내게 많은 것을 주지만

나는 컴퓨터에게 많은 것을 뺏긴다.

 

컴퓨터는 고칠 수 있지만

나의 짓은 되돌릴 수 없다.

 

○○○, <컴퓨터>

 

늘어나도 다시 줄어들고

꼬여도 다시 풀리지만

끊어지면 다시 붙지 않는

고무줄

 

○○○, <고무줄>

 

<컴퓨터><고무줄>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제목으로 썼다고 해도 될 만큼 과 다시 붙지 않는 고무줄과도 같은 마음의 짐을 덜어낸 시. 늘어나고 꼬여도 풀 수 있지만 끊어지고 나면되돌릴 수 없는 어느 순간을 말하고 있다. ‘고무줄의 탄성을 가지고 있을 때가 좋은 것처럼.

 

조각가가 만들고 싶은 대로

이러쿵 저러쿵

조각상도 조각가가 만든 대로

이러쿵 저러쿵

원하는 모양이든 아니든

이러쿵 저러쿵

그렇게 만들어진 조각상

 

○○○, <조각상>

 

<조각상><고무줄>을 쓴 친구가 함께 써서 낸 시인데, ‘이러쿵 저러쿵만든 조각상이 재미있다. 정확한 뜻은 모르겠고 원하는 모양이든 아니든’ ‘이러쿵 저러쿵만들었다니, 기발하다. ‘조각상도 조각가가 만든 대로를 빼면 더 좋았겠지만 이러쿵 저러쿵의 마법에 걸려 그냥 넘어가도 좋다. ‘시라고 썼으니 시라고 믿는자기만의 시도 충분히 권장할 만하다.

 

바다는 비에 맞지 않아.

바다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

바다는 슬퍼하지 않아.

그런데 나는 왜

바다 같지 않을까.

 

○○○, <바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말을 빌어와 자신만의 시를 썼다. 바다는 젖지 않으니 의연하게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는 거대한 존재이지 어찌 가져다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나는 왜 바다 같지 않을까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이 난제이긴 하지만, 그 말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알아가는 것이 있길 바랄 뿐이다. ‘바다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자체다. 그러니 주인공이라기보다 나의 길을 가는 주체 그대로다.

그러니 희주도 새롭게 답을 찾는 것이다. 주인공이기만을 바라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세상 모든 일이 영화처럼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이 보장된 것이 아님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어서, ‘넘어지면서 배우는게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인공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시 쓰기 시간에 공유하게 해주어서 기특하기만 하다.

 

내 인생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게 아니지만

 

디즈니에서 공주와 왕자가

만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결말이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영화에 나오는 그 주인공들도

분명 그 안에서 의미가 있었기에

끝내 행복을 마주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의 길을 걸어가 볼래

다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지 뭐.

 

김희주(3학년), <주인공>

 

 

 

*이 글은 2022년 7월 5일, 충북교육도서관 찾아가는 작가 강연의 하나로 괴산 송면중학교 학생들과 쓴 시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