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두려움을 동반한 미묘한 적대감 <투명인간>

참도깨비 2021. 8. 20. 14:14

<도깨비 감투>라는 만화가 있었다. 도깨비 털로 짠 감투를 쓰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누구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나쁜 사람을 골탕 먹이고, 가고 싶었던(어딘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곳에 몰래 숨어들 수 있다는 상상을 했던 탓일까? 아니면 1897년에 발표된 <투명인간>의 다른 욕망 버전이었을까?

이 소설 또한 <투명인간>이라는 영화와 드라마 소재 등으로 더 알려지는 바람에 다소 희화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원전을 읽기 않고 읽었다고 생각하거나 공상과학소설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투명 망토'가 현실화될 거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꼭 무엇을 해야겠다는 신념이 더 강한 듯 보인다. 투명인간이 되면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 마음에 깔려 있는 듯하다. 플라톤의 <국가>에 보면 기게스의 반지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 신화엔느 하데스의 모자처럼 마법과 신화를 넘어 현실 세계의 욕망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코드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리핀이라는 젊은 화학자가 '투명인간'의 꿈을 실현하고부터 일어나는 기괴한 이야기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투명인간'으로 누리는 것은 없다. 끝없이 쫓기다가 분노와 슬픔만 남기고 사냥감이 되어 죽어갈 뿐이다. 중간에 친구였던 켐프 박사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공포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말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쫓겨다니는 신세로서의 분노와 슬픔 속에서 나온 허언 같다. 어쩌면 <국가론> 이후 나오듯 우리의 정치 체계에 대한 상징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투명인간>에 대해서 스스로 털어놓는 말처럼 괴물일 뿐이다.

“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투명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도 바보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더군. 춥고 사나운 기후와 사람들로 북적대는 문명화된 도시에서 말이야. 이 미친 실험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투명인간이 지닌 수많은 능력만을 꿈꾸었지. 그날 오후 접어들자, 극도의 절망감이 엄습하더군. 나는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거야. 물론 투명성으로 인해 인간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들을 얻는 순간 그것들을 마음대로 향유할 수 없게 되었어. 열망.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집이 있다 한들 그곳에 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좋을 게 뭐가 있겠어? 아무리 여인의 사랑을 받는다 한들, 그녀가 델리라와 같은 여자가 되려 한다면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나는 정치에도, 지저분한 명성 따위에도, 자선 행위에도, 스포츠에도 흥미를 못 느껴. 무엇을 해야 했을까?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베일에 싸인 불가사의한 존재, 인간의 몸뚱이, 나 자신을 붕대로 감싸 가둔 괴물이 되고 만 거야!”

사실 이 때가 그리핀이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투명인간>의 존재를 드러내었을 때 다른 길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미처 투명인간마저 옷을 입지 않고는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없고 먹는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듯이 따뜻한 나라로 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정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는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켐프 박사의 도움으로 원할 때마다 '투명인간'으로 바꿀 수 있는 실험에 성공하였다면, 하는 가정도 해볼 수 있으나 그것은 문학 작품에서마저 섣불러 예견할 수 없는 가정법일 뿐이다. 에필로그에 보면 '투명인간'의 최후를 지켜본 술집 주인이 갖고 있는 비밀노트(아무도 풀 수 없는 것이기에 무용지물이지만)가 새로운 불씨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소설은 여기까지다.

<투명인간>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이다. 과학적인 허점 또한 투명인간의 실패를 그대로 보여주는 문학임을 보여준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투명해지면 빛은 망막에 상이 맺히지 못해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허점은 나중을 위한 가능성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이러한 과학적인 바탕을 뛰어넘어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양치기 기게스'가 발견한 청동 말 속에서 꺼낸 반지가 그렇듯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유, 투명인간이 스스로 괴물이 되었을 때, 왜 끊임없이 쫓기고 위협 받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존재 자체가 이미 잃어버린 자유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투명인간>을 읽는 내내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바랐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욕망이다. '두려움을 동반한 미묘한 적대감'이 투명인간의 시작부터 떨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비극이 아닌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영역으로 달아나 버리기를 바랐던 것 같다. 선천적인 색소 결핍증 환자였다는 점이 우리가 뜻하지 않거나 의도한 대로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에 맞아 죽은 그의 몸이 서서히 핏줄과 형태를 보이는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