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바라봄이요 변화다
사랑은 바라봄이요 변화다
- 천안 성성푸른도서관 어머니 시
시 이야기를 꺼내 들면 어른들은 아이 키우고 세파에 찌들다 보니 감성이 메말랐다고 말한다. 물기 하나 없는 북어 같다고 말한다. 한때 문학소녀였고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시에 대한 편견만 남았는지, 혹시라도 시를 읽거나 들려주면 누군가 해석해 주길 바라는, 시는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근사해야 하고, 뭔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낯선 것이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마중물처럼 시 한 줄을 들려주면 살아나지 못할 것 같았던 잎이 머리를 들고 거뜬히 흙덩이를 들쳐내고 나오듯 시는 나온다. 직유법, 은유법으로 시작하는 시의 기초를 배우지 않아도 절절하니 시가 되어 나온다.
성성푸른도서관에서 만난 분들은 아주 젊은 어머니와 중년의 어머니까지 다양한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 시를 써보자는 말을 했을 때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 바로 하고 싶은 삶의 언어를 바로 꺼내어 보여주었다.
남편과 싸운 후, 나야 여전히 쾌활하게
외출하고, 밥을 먹고, 두 딸들과 보란 듯이
거실에서 꺄르르 수다를 떨지만
남편은 등을 구부리고 누운 채
안방에 놓인 TV를 껴안고 연신 리모컨을 돌린다.
큰 딸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응… 전쟁?”
“아니, 외로움이야. 아빠를 외롭게 두지 마.”
대학생이 된 후 첫 방학을 맞아 쇼파에서 즈이 아빠처럼
옆으로 누운 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앞에 꼬아놓고
발가락을 까닥이며
아침 외출에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묻는다.
“오늘 점심은 뭐야?”
대답을 않고 총총히 나선다.
화려한 세상 어디쯤엔
누군가 외로울 수 있겠구나.
글쎄 날씨가 흐린 오늘 오후엔 뜨끈한 잔치국수를 말아내야겠다.
우영미, <날이 흐린 오후에 내미는 국수>
가까운 아파트단지에서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며 견학차 ‘문화가 있는 날’에 와서 시 벼락을 맞은 셈이었는데, 진지하게 시를 읽어주자 바로 시로 화답해 주었다. 나이가 들면서 외로움은 가장 큰 골칫거리이자 짐이기 마련인데, 가족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서로 다른 자리를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큰 딸이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야말로 외로움이란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의 모습에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리모컨을 연신 눌러대는 남편이나 쇼파에 다리 꼬고 앉아 오늘 점심이 무엇인지 묻는 딸이나 외출하며 온몸으로 받아내는 화자 또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당장 입막음처럼 할 수 있는 것은 뜨끈한 잔치국수를 말아내는 일뿐이다. 서로 알면서도 가장 가깝다는 까닭 하나만으로 못 본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시는 말 못하는 관계를 이어주고 틈을 벌려주는 소통의 그릇이 될 수 있다. 이 시를 냉장고에 붙여놓는다고 생각해 보라. 당장 떼고 싶을 만큼 부끄러움과 함께 “이런 걸 왜 구차하게 쓰냐”는 대답이 돌아오겠지만 이렇게 표현하고 사는 것이 외로움에 잘 듣는 약이 됨이 깨닫게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모두 마음에서 나오고 몸으로 와전되는 병과도 같은 것이라면 일찍이 시를 쓰거나 한 줄의 문장으로나마 깨우치게 해주어야 마땅하다.
사랑은 인생에 단계가 있다.
나의 사랑은 옛날에는 자연과 같은 대상이었다.
바라봄에서 느끼는 대로, 지금 나의 사랑은 사계절을 모두 느끼는 사랑이다.
사랑은 마음이다. 그날그날 얼굴이 떠오르고 대상이 달라진다.
나에게 지금 사랑은 다가온다.
사랑은 두려움처럼 온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사랑은 바라봄이며 변화로,
달라지고 싶은 희망이다.
나의 사랑은 지혜와 절제로 기도하고 싶다.
사랑은 고통이다. 사랑은 십자가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머니 사랑이다.
소통이 적으니 빛이 다르다.
사랑은 십자가이지만
성가 노래처럼 기쁘게 왔으면.
사랑은 기도요 은총이다.
권주연, <사랑>
연륜이란 이런 것이다 싶을 만큼 스스로 겪고 찾아낸 사랑의 시 한 편. 연륜이란 흔히 꼰대가 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영역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가운데 다른 사람한테 충고를 하지 말라고 했듯이 다 옳은 말이라고 하지만 다른 삶과 마음을 일그러뜨릴 만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로 이끌어가는 최선의 삶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사랑은 자기 지분을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충분히 고통스럽고 십자기를 짊어진 것처럼 힘들다. 아놀드 토인비가 그리스 신전에 발견했듯이 ‘사랑은 신이요, 신은 사랑’인 것이다. 나와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요 그로 인한 변화이기에 고통스럽더라도 끝내는 ‘노래처럼 기쁘게’ 오는 것어야 한다. 그걸 알기에 눈물로 쓴 시가 뜻깊게 다가오고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는 것이지 않을까.
반짝반짝 빛나던
너를 본 지 오래구나
매일 아침 너를 두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나를 용서해라
밤이 되면
다시 돌아와
눈만 감아버리고
내일의 이별을 다시 준비하는
날 용서해다오
박민주, <나쁜 주인의 고백>
그럼에도 자신에게는 너무 가혹한 것이 현실이다. 한때는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였건만 오늘도 내일도 이별하듯 외면하면서 바쁘게 지내야 하는 관계를 주인과 무엇(노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으로 금을 그을 수밖에 없는. 바쁘게 살아내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감성이 말라버렸거나 자신을 표현한다는 자체가 두려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화자는 스스로에게 용서를 빈다. 그러나 용서는 또 다른 두려움이 될 수 있다. 잠깐 눌러둔 보자기와 같을 수 있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바쁘면 지나가 버릴 것이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찾아와 채무 관계를 유지하는 까닭을 물을 것이다. 시 한 켠에는 ‘이것이 최선이지만 충분히 잘 하고 있는 일일까’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안 어린이집 앞에
온 동네 킥보드 다 모였다
파랑색 킥보드 반
핑크색 킥보드 반
주인 따라
어린이집 왔다.
유모차,
세 발 자전거,
킥보드,
두 발 자전거 타고
아이들은 자란다.
이 세상 어딘가에
킥보드 하나 소원인
그 아이 한 명 있을 것 같다.
이경진, <킥보드>
잠깐 쉬어가는 시간처럼, 한 잔의 물을 마시는 것처럼 여유로운 시 한 편이 나왔다. 어머니란 자리를 어린이를 키워내고, 또 한 명의 아이를 생각하며 내 아이를 바라보는 자리이지 않을까. ‘킥보드’와 ‘자전거’가 놓여있는 단지 안을 관찰하며 여유롭게 시를 쓴 마음의 결이 그대로 어머니이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고객님!
할부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홍보용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오늘도 한 오백 번쯤 인사를 한다.
내 인사에 대한 답 인사는
당연히 없다.
그러다 한 오백 번에 두 번쯤
상냥한 고객님
답인사를 건네오면
화들짝 놀라
사람으로 돌아와
시무룩 슬퍼진다.
김현자, <인사>
어느새 우리 사회에 한 현상으로 자리잡은 ‘감정노동’에 대한 시다. 우리가 민원 창구를 가거나 은행, 우체국, 쇼핑센터, 어디를 가든 맞닥뜨리는 일이다. ‘홍보용 인형’이나 다름없이 많은 인사를 해야 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화자의 자리를 생각해 보라. 단지 이 시는 인사를 통해 감정을 소모하고 있는 슬픔만이 아니다. 늘 답인사 없는 인사를 하며 기계가 되어버린 듯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슬픔인 것이다. 오백 번에 두 번쯤 답인사를 하며 바라보았던 화자의 공허한 자리가 그대로 느껴진다. 시에서 이렇게 외면했던 한 마음을 읽는 것이 낯설지만 독자가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손등에 밥물 맞춘지
십수 년,
아직 내 손등엔
물금이 그어지지 않았다.
좀 적어도
좀 많아도
좀 질어도
좀 되직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마
평생 손등에
물금은 그어지지 않을 것 같다.
황화영, <성격>
‘인사’ 다음으로 나온 ‘물금’은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가 흔히 다루지 않는 타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 시의 마중물은 이런 시였다. “장판에 손톱으로/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마음이라면/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요를 덮고/한 사흘만/조용히 앓다가//밥물이 알맞나/손등으로 물금을 재러/일어나서 부엌으로”(신미나, <이마>).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난독증이 온 것처럼 낯설지만 두세 번 읽어보면 화자의 마음이 읽히는 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로 하여금 각자의 마음에 남은 ‘물금’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고향이 물에 잠겼을 때 보게 되는 수몰선처럼 화자의 성격을 말해 주면서 말도 못다한 여백을 남겨두는 마음의 물금인 것이다. 부러움과 질투가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창조로 이어진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런 감정이 생길 줄이야.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내 몸속 장기를 베내는 수술을 했음에도.
아이 걱정에, 아이 그리움에
남편이 알아서 잘 볼 테지만
그럼에도 미안하고, 보고 싶고, 그리움, 걱정에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냈네.
1년 동안 겪을 희로애락을 1분 동안
다 경험하게 해주는
내 사랑, 내 보물 우리 아기.
이런 너를 낳지 않았다면
과연 나의 삶이 어땠을까?
내게 와줘서, 아니
우리에게 와줘서 너무 고마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내 아이 하율!
너를 위해 멋진 엄마가 될게.
너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워!
오늘 하루도 우리!
예쁜 추억 만들어보자, 하율아!
오인희, <하율>
‘내 몸의 장기’를 떼어내듯 고통 끝에 선물처럼 오는 아기는 흔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목록 가운데 최우선일 것이다. 결혼이 그렇고 아기를 출산하는 것이 누구도 알려줄 수 없는 길이기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아이에 대한 기쁨은 클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시에 대한 화답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것이 시를 읽는 것에 대한 화답이듯이, 서로의 시를 읽어주고 따뜻한 위로와 격렬의 박수를 보내주는 것 또한 나이와 성별, 일을 떠난 최선의 행위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시다. 시는 시작이고 늘 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보기로 든 부분처럼 함께 만나서 서로를 치유하는 시를 읽고 시를 쓰는 동아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자잘한 소원이 성성푸른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을 함께해서 기쁘다. 사랑은 바라봄이요,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발적인 모임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나와 동떨어진 타인과의 소통이나 공감으로 이어지거나 공공 활동의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 장르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가진 병리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예술 향유의 저변을 확대하려는 시도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은 예술의 치유적 특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관계 맺는 데 필요한 태도를 함양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진은영, 김경희,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