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부모가 되어가나 보다
작은도서관 문화가있는날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나 보다
-아산 코아루에듀파크작은도서관 어머니 시
아이가 쓰는 시부터 어른이 쓴 시까지 읽어주다 보면 각자의 삶과 말이 보인다. 그만큼 시가 삶과 떨어져 ‘시’라고 하는 외딴 섬에만 있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는 근사한 무엇이어서 교과서나 시집에 있어서 처음부터 배워야만 쓸 수 있고, 한 번 읽어서 모르면 시인이나 중개자가 해설해줘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여서 ‘시’는 장벽과도 같이 나와 너 사이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시’라는 틀부터 바꾸어야만 내가 들어설 수 있고, ‘시’라는 고정된 자리를 비워야만 내 삶과 이야기가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아산 신창면에 있는 코아루에듀파크작은도서관에서 만난 어머님들의 시가 그렇다. 앞서서 다른 도서관에서 나온 아이들 시를 읽어주며 한때 시인으로 불렀던 때를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전국 공통의 계절 시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과 생각이 녹아있는 시를 읽어주면 다음과 같은 시들이 저절로 나오게 마련이다. 물꼬가 그렇듯 살짝만 걷어주면 물길이 생기는 것이다. 방향을 틀어서 논으로 가거나 도랑으로 빠지면서 작물을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주는 이치와 같다. 무논이었던 곳에서 자라난 벼들이 쌀이 되고 밥이 되듯이 자신의 주체를 인정하고 말하기 시작함으로써 시가 나오는 것임을 공감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나는 화들짝 놀란다.
나를 부른 건가?
엄마라는 말을 내가 듣다니.
어색하다.
귀로 들어와 머리로 간다.
아이의 첫 이를 아이보다 더 무섭게 뽑는다.
남편이 눈을 질끈 감는다.
이는 병원에서 뽑자며
자기는 이런 걸 안 해 봤다며
못 한단다.
남편의 손이 흔들리는 이보다 더 크게 흔들린다.
엄마를 부르는 환청이 들리고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어 뽑고
아이를 보며 씩 웃는 서로를 보며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나 보다.
○○○,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나 보다>
처음으로 ‘엄마’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누구나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눈을 맞추고 엄마라고 불러주었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뜻깊었을 것이다. 정말 엄마를 알아보고 불러준 것일까? 어른들이 흔히 말하듯 배가 아파 낳은 진짜 자식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저 아이의 엄마라는 것도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어머니들보다 젊은 분이셨는데, 이런 시는 연배가 놓은 분들의 격한 공감을 불러왔다. 굳이 말로 표현은 하지 않더라도 젊은 어머니에게 던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내 시는 그 아이가 첫 이를 빼는 날도 옮겨 간다. 젖니가 빠지는 날 또한 ‘엄마’를 불러주었을 때만큼 잊을 수 없다. 아기가 아파서 병원과 집을 오가던 날도 그렇겠지만 자신보다 더 떨려서 손도 못대는 남편 대신 무섭게(단호하게) 뽑아야 하는 순간 또한 그대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날들을 지나 비로소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된다는 자명한 이치를 시로 읽으니 더 좋은 것이다.
곶감을 매달아두었다.
가을색 입은 곶감이
점점 짙어진다.
눈 뜨면 만져보고,
눈 뜨면 돌려주고,
앗, 나는 12층에 산다.
곶감 색이 짙어지는 건 그탓일까?
너, 떨고 있니?
○○○, <12층>
이 시의 제목은 ‘곶감’ 대신 ‘12층’이다.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12층이라는 공간이 옛날 집 처마와 대비되면서 곶감이 익어가는 가을을 말해주고 있다. ‘가을색 입은 곶감’이라 멋을 부려보기도 했다. 가을색에는 다음에 이어지는 ‘눈 뜨면 만져주고,/눈 뜨면 돌려주’었던 마음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곳은 12층이라는 아찔한 높이! 아연실색한 만큼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화자의 마음 같기도 하다. 곶감 색이 더 가을색으로 익어가는 것 또한 아찔한 높이에서 견딘 마음만 같아 재미있다. 제목을 왜 ‘12층’으로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배치를 잘 하는 것만으로도 집안 정리가 된 것처럼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별.
내 품에 안길 때 더욱더 소중한 별.
나의 눈은 항상 그 별을 쫓고 있네.
조만간 나의 눈은 그 별이 아닌
다른 별을 쫓으라 하겠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어두운 동굴 안에 갇힌 느낌이 든다.
○○○, <큰 별>
혼자 골똘하게 생각해 온 이야기를 ‘별’에 빗대어 쓴 시다. ‘별’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자 그 별이 떨어지거나 스러지면 안타까운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별’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품안에 키우던 아이이거나 화자가 못내 이룬 꿈이나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가르쳐준 목표나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겪어온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 이 자리를 떠올려보았을 때의 막막함이 동굴로 표현되었을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눈’이 별을 쫓고 다시 다른 별로 바꾸어 바라보고 살아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엇의 부름과 시킴에 비끌어 매달린 별에 의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당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니 제목으로 잡은 ‘큰 별’마저 크고 밝은 것이 아닌 그렇게 보일 뿐인 잣대인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이 자신에게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니 시를 써서 드러낸 것만으로도 좋다. 다음에 오는 시를 보라.
시원하게 뚫었다.
두두두 못을 박았다.
벽은 말한다, 나 아파
벽은 말한다, 나 힘들어
순간 내 말은
고성능 전기드릴이 되어 있다.
○○○, <전기드릴>
갑자기 왠 전기드릴일까 생각할 것이다. ‘큰 별’을 쫓았던 화자가 갈 길도 아니고 사랑하고 애타게 갈구한 것도 아닌 ‘큰 별’이었을 뿐이었듯이 전기드릴은 자신을 드러내는 대상이 되었다. 전기드릴은 벽을 뚫을 만큼 강력한 것이어서 벽으로 말한 대상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나 아파”, “나 힘들어” 하고 말하는 대상에게 처음에는 ‘시원하게’ 뚫고, ‘두두두’ 못을 박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말이자 상처가 되는 말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성능이란 말이 더 섬뜩하게 들린다. 이 시는 어쩌면 화자의 아이와 같은 또래의 시 ‘상처’에서 파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아이가 못자국처럼 한 번 박히면 마음에 남는다고 말한 것을 보며 벽 앞에 맞닥뜨린 듯 깨닫게 된 것이다. 전기드릴은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진 것이어서 2연의 말들 또한 더 강력하게 메아리쳤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무엇으로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시를 왜 써야 하는지 알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각이자 소통을 향한 시발점인 것이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넘어지지 않게……
근데, 근데 말이야……
좀 넘어지면 어때?
툴툴 털고 일어나면 돼.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
일어나면 돼.
○○○, <넘어지면 어때!>
다음 시는 이렇게 건너온 따뜻한 말 한마디다. 그렇게 말하면 속이 시원하고 관계도 좋아질 텐데, 왜 다그치고 나무랐을까, 그것이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말도 용기 이상의 자각이 필요하다. 이런 말은 상대방의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넘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일어나 다시 가는 것임을, 이것 또한 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을 연습해야만 한다. 쉽게 되지 않지만 자주 하면서 변해야 한다. 이 시에서 충분히 느껴진다. 이런 때 시가 고맙다. 먼 길을 와서 시를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중요한 시 한 편을 쓰고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커피 한 잔의 가치와 맛이 살아난다. 중독이어도 좋은 것은 커피 한 잔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볼 수 있고 어김없이 시를 쓰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고맙고 또 고맙다.
늦저녁 생각나서 취하면
잠 못 이루게 하고
잠 못 들어 피해야지 하면
다음날 어김없이 찾게 되는 너.
○○○,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