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막내별이다!
아내를 데리러 가는 길에 탄금대에 들렀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황사에 휩싸인듯 눈을 어지럽게 만들던 산에 나무들이 풀빛으로 축축 늘어지는 토요일. 권태응 시인의 노래비가 있는 탄금대.
한길이와 함께 감자꽃 노래비로 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노래비까지 가는 길 곁으로 있던 숲이 모조리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 울창한 숲은 아니었지만 참나무들이 권태응 시인의 노래만큼이나 시원하게 해주던 곳인데 이제는 밑둥만 덩그러니 놓여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더군요. 그루터기만 언뜻 보아도 4,50 년은 넘는 나무들인데 벌목으로 드러난 능선을 보는 듯 눈이 아리더군요. 참나무와 소나무 사이 사이로 철로 만든 조각들이 오늘 따라 벌거벗은 그대로 녹슬어가는 그대로 을씨년스럽게 보이더군요. 나무 사이에서 그나무 조각으로 살아있던 것이 그러니까 마치 저 쇳덩이들이 방금 나무들을 잘라간 톱 같다는 느낌도 들고 속살처럼 드러난 그루터기에 나이테들이 바튼 숨을 쉬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더군요.
"저 나무들은 몇 살 먹었어?"
한길이도 숲이 없어진 걸 눈치채고 그루터기들을 바라보며 나이를 묻습니다.
"한길이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
"그럼 1999년에도 있었어?"
"그거야 당연하지"
자기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조금 가자니 그루터기 사이 사이로 제비꽃과 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더군요. 한눈에 우릴 끌어들이는게 잠시 쪼그려 앉아 쉬어가기로 했지요.
"한길아, 제비꽃이다, 그리고 여기 작은 꽃은? 별꽃인데, 쇠별꽃인가 개별꽃인가?"
"어, 막내별이다"
밥풀떼기보다 작은 꽃들이 쇠별인지 개별인지 헷갈려서 분명 별꽃은 맞다고 이야기할 참이었는데 한길이가 한 소리 늘어놓는 바람에 마음 한 구석이 진짜 밤하늘 별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밝아지는 것 같더군요.
"그래, 밤 하늘의 막내별들이다"
막내별들이란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전까지 그루터기들을 보고 마음 상했던 것이 어느 정도 씻기는 듯 했습니다.
"민들레는 어디 있어?"
이번에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민들레를 찾는 한길이.
"제비꽃은 힘이 얼마야?"
느닷없이 무슨 힘 타령인가 생각해 보았더니 도서관 앞 시멘트 계단에 핀 민들레꽃을 두고 하는 말이더군요. 해가 갈수록 틈이 벌어지면서 꽃대궁들이 마구 올라오니 그 힘이 아주 셀 거라고 했더니 자기보다 힘이 세다고, 자기도 김치 먹고 힘이 세질 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게 보니 나무도 풀도 모두 힘이 500, 700하는 식으로 해석이 되는 것 같더군요.
"아빠는 700, 나는 600, 엄마는 500"
"왜 엄마는 500인 줄 알아?"
"엄마는 일을 많이 해서 500이 된 거지"
저만큼이나 작은 제비꽃과 별꽃 앞에서 힘 타령은 줄줄이 이어집니다.
"저거봐, 나뭇잎은 힘이 0 이잖아"
바람에 마른 참나무 잎이 굴러가는 걸 보더니 하는 말입니다.
"저렇게 바람에 흔들려 가니까 힘이 0 이지"
맞는 말입니다. 0 은 참 오묘한 힘이지만 말입니다.
감자꽃 노래비에 들러 감자꽃 노래를 한 번 불러 보는데 권태응 시인이 '우리 할아버지'가 된 느낌이더군요.
"이오덕 선생님도 돌아가셨잖아"
으레 권태응 시인 하면 이오덕 선생님 이야기까지 나오니 참 든든한 할아버지를 뒀다 싶더군요.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 외워 버린 한길이와 노래로 한 번 불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아까 봤던 참나무 그루터기에 갔습니다. 한길이가 참나무 나이를 물어봤으니 나이테를 헤아려 알려줄 참이었지요.
"자, 봐. 여기 안에부터 바깥으로 둥글게 나간 것이 나이텐테, 한 줄에 한 살씩이야"
새삼 나이테를 설명하며 들여다 보니 한길이가 관심있어 하는 날씨와도 연결이 되더군요.
"여기는 좁고 요기는 넓은 걸 보니 날씨가 언제는 좋았고 언제는 나빴나 보네"
나이테 생긴 꼴을 보니 한길이도 금방 이해가 가는 것 같더군요. 그렇게 하나 둘 세어가니 권태응 시인이 돌아가신 해에 심었던 나무들이 꽤 많더군요. 한길이에게 한 오십 년은 살았다고 하니 나더러 그때도 있었냐고 묻기에 웃고 말았지요.
다시 별꽃, 아니 막내별들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가까스로 참나무들을 잊었더랬습니다.
2004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