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뚫어놓으니 휑하니 가대 ”
남도길이라고 하면 장운동이라도 하듯 으레 구불거리던 때가 있었다. 길 가는 대로 내버려두니 구구절절 절창이 되기도 하지만 한때는 그것이 마치 조선시대의 세도정치에 놀아다던 것처럼 푸대접의 전형으로 비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논산을 거쳐 정읍, 광주를 지나 고향 언저리에 가면 옛군수의 선정을 기리듯 길 하나는 훤히 뚫려있다. 골골 숨어 사는 듯 바리 바리 싸들고 장에 가는 사람들의 집과는 아직 구불구불하며 애간장을 녹이기도 하지만.
보성에 들렀더니 보성 군수는 "쓰레기를 버리더라도 좋으니 놀러만 와라. 와서 불편하게 하는 점이 있었다면 군수에게 직접 일러라" 하는 광고성 멘트를 아끼지 않을 만큼 길을 뚫어 사람들이 쏟아지듯 몰려들게 만들려는 장기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축제도 많고 안내판도 마치 공무원들이 마중나와 있는 듯 친절하기만 하다. 곳곳이 명승지요 팔경이다.
보성과 순천을 잇는 큰 길은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어서 한낮인데도 차들이 많다. 경남 고성에 공룡 발자국터에서 공룡 엑스포가 열렸던 탓인지 보성 득량만 해변에도 공룡발자국터를 일구고 박물관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구비 한 구비 어느 곳이든 외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는 흔적이 뚜렷하다. 갯벌 체험장은 갯사람들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조개 열풍에 빠진 외지 사람들이 욕심껏 퍼가는 그야말로 일일 체험장이 되어버렸다. 우악스런 손길에 파헤쳐진 갯벌이야 밀물이 들면 또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젊어지는 샘물을 푸듯, 황금알을 낳는 닭을 바라보듯 하는 외지 사람들의 손길을 견대내기에는 왠지 씁쓸해 보인다.
"길을 뚫어놓으니 휑하니 가대"
그야말로 바다를 끼고 고속도로처럼 나있는 길들이 치적을 뽐내는 자치단체장의 의도대로 번쩍이는 날. 길을 뚫어놓으면 너도 나도 들어와 밥도 사 먹고 자고 가고 술도 먹고 가려니 했더니 그게 아니다.
"요즘은 다 마트에선가 바리 바리 싸들고 오지 여기 와서 사먹는 사람이 있겄어. 얼마나 약았는지 밥 싸오고 고기 싸오고 물도 사와서 먹고는 휑하니 뚫린대로 가버리는데 뭐가 있겄어"
의역을 하자면 이런 반응이다. 허벌나게, 쪼가 거시기한 사투리 그대로 표현하자면 인심 사나우니 텃새가 어떻느니 할까봐 둘러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더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는 곳을 개발하느라 구구절절 절창이던 풍경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꼭 초등학생들 체험 행사를 하듯 요란뻑적한 눈요깃거리들만 늘어가고 있는 듯하다. 해수욕장에 바다풀장을 따로 만든다거나 녹차탕에 녹차를 먹였다는 돼지고기로 붙들고 있는 것일까? 녹색의 고장임을 드높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것 빼고는 시체일 것 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그렇게 길들은 대처에서 골짜기까지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도록 길길이 날뛰게 만들어놓았다. 모르는 길을 물어 물어 가는 시대는 지난 듯하다. 네비게이션마저 전국구 길라잡이가 되어 사통팔달하게 만들어놓은 탓에 인터넷 테마 여행처럼 깊이 느낄 새가 없다. 추천지를 돌고 문화재를 학습하며 마치 지역 좌판들은 호주머니를 뜯어내려는 장삿속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지, 길이 뚫리고 나서는 오히려 지역간 편견이 더 커져버린 듯한 느낌도 든다. 물가를 다 알고 해박하게 자본의 논리를 터득한 마당에 뭘 좀 남겨먹겠다고 터무니없이 올려받는 것이 속된 말로 '장삿꾼 거시기는 개도 안 먹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이름난 식당을 찾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도 또 하나의 억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 풀어주고 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입장료와 통행료만 어쩔 수 없이 낸다고 생각하지 말고 껌부터 시작해서 점심밥, 주전부리까지, 길게 잡아서 다음에 돌아보더라도 잠잘 자리를 그곳에 정하고 자기 살던 곳과는 다른 여유를 느껴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시에도 나오지만 저물면서 빛나는 보성만, 득량만을 거쳐 돌아보니 속절없이 빠르기만 내안의 속도에 찰칵 찰칵 벌점 사진 찍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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