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늠름한 칠흑의 어둠 ”
갈라진 북벽 틈에는 호랑이 이빨이 자라고 있다. 단숨에 멱에 송곳니를 찌르며 살을 찢어놓을 듯 하지만 햇볕이 들지 않는 북벽길에서는 어디까지나 매서운 추위가 가실 때까지만 그렇다. 날이 풀리면 얼음난초처럼 스러지겠지.
아직 북벽길은 얼음으로 뒤덮혔다. 가파른 산날망을 어슷하게 비껴가는 겨울 해 때문에 칼바람이 모여 노는 길.
머리 꼭대기로 까마귀떼들이 날아올랐다. 까마귀들은 후루룩 국수말듯이 땅이며 나뭇가지에 걸리는 박새나 직박구리들과는 달리 머리꼭대기에서 나부끼는 깃발 같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북벽 수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골짜기 아래로 쏟아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저물어가는 해가 이끄는 대로 잔칫날 지짐이처럼 노릇해지는 낮달을 끼고 강강술래를 하는 것 같다.
눈부신 어느 겨울날
오래된 어둠 하나 날아와
소나무 높은 가지에 앉았다
씻기지 않는 어둠
한 세월 내내 버릴 수 없더니
이제는 늠름한 칠흑의 어둠
쌩쌩한 바람 속
그 외마디 울음이 장엄하다
까아옥
- 박두규, <까마귀>
높은 소나무를 돛대 삼아 고기떼를 찾거나 뭍소식을 기다리는 전설의 뱃사람들처럼, 아니 다른 산날망의 까마귀들에게 봉화를 올리는 것처럼 머리 위를 감싸고 돌았다. 하늘의 개라고 불렀던 것처럼 옹송거리고 앉아 자기 밥그릇만 지키는 새가 아니라 내면의 기럭지까지 한껏 펴서 보여주는 춤을 보는 듯 장엄했다. 아직 어두워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씻어내지 못한 끈적한 어둠의 옷이 저 검은 날갯짓 아래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여우가죽에 연어와 까마귀 가죽의 결혼식 끝에 태어난 바일라바이칼 무당의 망토에서 검은 섬광을 번뜩이며 허공을 향해 날갯짓을 할 것만 같은 그것을 장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늠름하고 장엄한 울음이 북벽을 메웠다.
그럴수록 달은 검은 숯불로 피운 것처럼 달아올랐다. 달과 어우러진 춤은 뇌문(雷文)이었다.
새,
나의 재천교포(在天僑胞)여
지상의 언어를
끌어올려
별자리를 엮는 몽상가여
파계한
의미들은
번갯불로 지상에 꽂히아니
아무래도
인간은
그 전언을 견딜 수 없구나
만성피로의
말들은
이제 즐거이 탄화하리라
거대한 음성으로
읽어주는
전율의 텍스트 속에 눈뜨게 하라
빗줄기 속에서
꼿꼿이 뇌문(雷文)을 읽는 예언자여
- 박현수, <까마귀>
외마디 울음은 거대한 음성으로 읽어주는 뇌문이 되어버렸다. 중파였다가 단파로 치솟는 저들의 전언을 수습하지 못하는 발걸음만 얼음길에 달라붙어 올려다 볼 뿐이다. 하루치의 장막을 걷어내며 소슬한 산으로 돌아가려는 결가부좌처럼 북벽 하늘을 돌며 전율의 텍스트를 떨어뜨린다고나 할까.
소나무숲으로 들어갔다. 까마귀들에게 소나무숲은 곧 어두워져 떠오를 별자리를 엮는 곳일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별들은 흩어지고 어둠만이 재가 되어 떨어질 뿐, 검다 못해 푸르게 꿈틀대는 마지막 빛은 보여주지 않는다. 깃털 속에 감춘, 그리하여 바람과 햇살과 창공이 버무려주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덩어리 하나 묵지근하게 떨어뜨릴 뿐이었다.
까마귀 한 마리 최대한 아래로 날개깃 뻗어
제 맨발을 감싸고 있다
맨발은 조금 더 날개자락을 끌어당겨보지만
발가락까지는 덮지 못한다
추위를 다 가리는 일은 어렵구나
세상의 기쁨이란 기쁨은 죄다 불러다
나를 덮어도 덮지 못하는 곳이 있듯이
너에게도 덮지 못하는 곳이 있구나
가시 박혀 끙끙 앓는 마음처럼
양말 한 켤레 없이 너의 겨울은 시리구나
눈 위에 내려앉았다 나무 위로 솟아올랐다
되풀이하는 그 어느 곳도
너에게 따듯한 입김을 불어주지 않는다
누구나 몸 한 귀퉁이에는
어쩌지 못하는 슬픈 운명 하나씩은 산다
- 김광렬, <겨울 까마귀>
북벽에 두고 올 수밖에 없는, 그러나 달을 지펴올린 까마귀들의 저 풍구질 같은 소리에 따뜻해지는 마을에 내려오니 시는 그저 변죽만 울리고 말았다는 생각. 점점 떠오르고 있었다. 늠름한 칠흑의 어둠이 어찌 슬픈 운명이겠는가. 북벽가슴을 껴안아본다. 늠름한 칠흑의 어둠이 빚어낸 시도 그러하리라. 그것을 영혼의 북벽을 덤북 물고 있는 소리라고 고쳐 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12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물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ㅡ
까각 ㅡ
김현승, <겨울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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