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나의 무극이다
음성 무극중학교 1학년 4반 학생 시를 중심으로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장현광(張顯光)은 무극과 태극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극은 천지만물의 으뜸이 되는 머리인 지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극은 앞뒤로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다시 더할 것이 없기 때문에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무극은 형상이 없다는 말이자 다하여 태극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곧 극(極)이며 무(無)인 것을 말한다.”
음성군 무극은 이런 연고로 지어진 이름이다. 금왕읍 무극리. 금왕 또한 만만치 않은 이름이다. 금곡면(金谷面)의 ‘金’과 ‘법왕면(法旺面)’의 ‘旺’을 따서 금왕면이라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심오한 이름이 또 있을까? 그러니 金旺의 중심은 無極인 것이 당연하다.
금왕읍 무극중학교 1학년 4반 학생들과 함께한 시 수업의 주제 또한 무극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다른 학교처럼 시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시 쓰기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무극이란 말에 사무쳐 욕심을 내고 말았다. 무극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던 것이나 학생들의 질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온 “이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고 좋아하는 시가 무엇이입니까?” 때문이기도 하다.
당연히 ‘무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아프게 썼고 어렵더라도 시를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디로든 기울지 않는 게 아니란 말
무극에서 본다
笙極 옆 金旺, 사연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는 무극
스물아홉에 과부 되어 스뎅숟가락 장사
동동구루모 장사해서 벌어 살다
아들은 덤프트럭에 깔려 반편이 되고
일본에서 식당해서 돈 좀 벌어 나오렸더니
쓰나미 맞아 쑥대밭 되고, 사고로 식물인간 된 아들에
5년째 집 나가 소식 없는 며느리
아무도 돌봐 줄 사람 없는, 착한 사람이
복 받는다는 말은 거짓말
별 부스러기들은 다 무극에 와 떨어진다
불쌍한 사람들의 죄는 가릴 몸 없이
감옥이 된, 몇 개의 장기를 부려놓는
정류장에서 서로를 검열한다
어제는 등을 휘며 울어 보채는
혼혈의 아이를 안고 복도를 지나는 따이안이
낯설게 웃었다, 무극의 울음이었다
장기를 다 내놓은 웃음
고통의 맨얼굴은 돼지머리처럼 웃는 듯 보일 뿐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볼 수 없고
지는 순간을 볼 수 없는, 무극의 접점이다
고통 또한 권력과 같아서
무극의 노예로 만든다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유일한 권력은
고통을 던져주고 떠나는 것
칼을 던지는 꽃이다
꽃들이 서로의 전개도를 젖히고 통점에 던지는,
속속들이 몸을 열어젖히는 호구조사관들이여
링거를 꽂는 간호사는 고통을 관장하러
문을 벌컥벌컥 열어제낀다
버려진 고통은 303호 문처럼 열고 닫는
절차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고칠 수 없어 매뉴얼이 된 지 오래여서
어떻게 쓰다듬고 관장해야 하는지 아는
간호사들은 늘 반말이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여우처럼
간을 꺼내간다
팔다리로 시작하여 장기로 퍼지는
6인실 병실마저 권력의 교화소이자 감옥
싸우지 못하고 훈육되는 황혼의 고통
코드가 뽑힌 선풍기를 집어 삼킨 나무처럼
못을 박고 있는 몸을 보라
그러면서 하나의 각인도 없는
기냘프다 못해 거룩한 뿐인,
한 번도 고통의 칼날이 몸을 찢고 들어오는 길에
본능적으로 궁극적으로 아로새기지 못한
고통은 늘 이렇게 불려다니고
관리당하고 검열당하고 훤히 읽히면서도
권력을 숭배하는 자세에만 길들여진
꽃처럼, 스스로 어루만져 줄 수 없는
언제나 북동쪽으로 기울어 있는 못과 같아
망치를 받으면 엇나갈 수밖에 없다
머리를 짓이기는 고통마저도 넘나들어야 하는,
구부린 채 박힌 쇠의 웃음이
무극이다
이종수, <무극>
오래전 무극의 어느 6인실 병실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극에 오니 어렵고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읽어주는 것만으로 알 수 없지만 무극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시가 그런 아픈 이야기를 꺼내 보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니, 한숨만 짓고 있지 말고 서로 나누자는 뜻에서 처음으로 한 주제를 놓고 실험을 해보자 했다. 다소 백일장스러운 일이기 하지만 스무 명 한 반 아이들이 갖고 있는 무극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아이들은 흥미로운 눈치였다. 내가 살고 있는 곳,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으니 기대반 우려 반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시에서 ‘무극’이란 말을 굵은 글씨체로 바꾸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무극과 태극을 논하던 오래전의 논쟁처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무극의 실험.
동네는 작지만
왠만한 건 다 있는 무극
사람들의 마음씨가 좋은 무극
항상 가던 떡볶이집 아줌마
문구점 아줌마 등등 마음씨가
넓은 무극
심채은, <무극>
맨 먼저 나온 채은이의 ‘무극’은 무덤덤하게 써낸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이 의도하지 않는 뜻밖의 효과가 있다. ‘작지만/왠만한 건 다 있는’ 무극이자 ‘마음씨가 좋’은 무극이자 그리하여 ‘넓은’ 무극이다. 마음씨가 넓은 무극이란 말은 말이 안 되면서 통하는 구석이 있다. 작은 동네이지만 떡볶이집 아줌마와 문구점 아줌마 같은 타인의 마음씨에 훈훈한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작고도 넓은 세상인 것이다. 시는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으나 읽는 이가 다양하게 추려 담을 수 있는 확장팩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무극을 無極으로만 보고 읽어보면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무극은 나에게 부모님 같은 존재이다
무극을 떠나간다면 마치 내가 성인이 되어
부모님을 떠나는 것 같다.
무극은 나에게 편안한
부모님 같은 존재이다.
최연지, <무극>
무극은 나와 친구 같은 존재이다
내가 심심하면 같이 놀아주는 친구 같다
무극은 나의 부모님과 같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있는 무극은 부모님 같다.
이가연, <무극>
다음에 읽은 연지의 무극은 언젠가 떠날 것을 암시하면서도 아직은 부모님의 존재처럼 편안한 양가감정(반대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을 말해주는 듯하다. 성인이 되어 부모님을 떠나는 의례를 생각해 보면 지금이 얼마나 편안한지 느끼는 듯하다가도 그럴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몇 번은 그려보았을 장면을 숨겨놓은 듯하다. 지금 나이에 맞는 생각이다. 이렇게 한 번 꺼내어 생각해 보면 무극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뒤에 오는 가연이의 무극은 한 가지 더 추가하여 친구이자 부모님이 있는 모든 것이라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 없는 곳이다.
나의 고향 무극에게
많은 날을 지나며 힘들 때도 많았지.
하지만 내가 슬플 때도, 행복할 때도
묵묵히 나를 따스하게 품어준 무극
앞으로도 많고 다양한 날이 오겠지만
따스한 무극의 품속에서라면 어떤 날이든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고향 무극, 나의 집 무극
이영지, <무극에게>
무극은 나의 고향이며
추억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는 곳이다.
무극에서 여러 사람과 만나고
여러 일들을 겪었다.
무극은 나의 삶에 영향력을 준다.
많은 추억이 만들어진 나의 고향 무극
최인아, <무극>
또랑또랑한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어하는 듯 보였던 영지에게 무극은 많은 말을 깔고 있는 고향이다. 첫머리 6인실 병실에서 고통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꺼낸 시를 ‘묵묵히 품어주는’ 것 같다고 할까. 무극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다. 영지에게 ‘슬픈 날’과 ‘힘든 날’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런 날들을 견디게 했을까? 앞으로도 견딜 수 있다고 굳은 다짐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일까? 더할 것이 없고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 ‘無極’ 이기 때문일까? 아직은 낯선 서로에게 그 많은 사연들을 꺼내놓을 수는 없기에 과감하게 생략을 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만으로도 좋다. 무극을 알리는 백일장 시가 아니기에 ‘무극’은 시를 쓰고 있는 아이들 그 자체라고 보고 읽어주면 되는 것이다.
인아의 무극도 영지의 무극과 다르지 않다. 앞선 영지의 시를 간략하게 줄여놓은 것 같다. ‘나의 삶에 영향력’을 준 무극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러 일들을 겪었고 그만큼 온 몸과 마음으로 박혀 있는 고향이라고.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라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눈에 띄진 않아도 정겨운 마을
너무 튀는 건 안 어울리는 이곳
가끔씩 힘들면 산을 본다
나무는 푸르고 참새들은 날아다니지
나를 위로해 주는 이곳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따뜻한 마을
강예현, <무극이란 곳은>
무극은 나에게 추억이 많은 곳이다.
이곳은 이 친구와
저곳은 저 친구와
같이 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아직 아무런 생각이 안 나는 것도
아무런 추억이 없는 곳도
앞으로도 친구와 함께 채워갈 수 있기를
이호경, <무극>
예현이의 제목은 ‘무극이란 곳은’이다. 좀 더 생각해 본 제목 같다. 지금 생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생각해 보자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 꽂은 푯말이나 밑줄 같은 뜻도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당연히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무극’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무극’의 접점이 보인다. ‘눈에 띄진 않아도 정겨운’ 곳이자 ‘너무 튀는 건 안 어울리는’ 곳이란 말은 어떤 심중을 담고 있는 것일까? 어른들이 흔히 말하듯 ‘눈밖에 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뜻을 깔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 어린 마음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마을이니 ‘네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금방 알려지니’ 항상 품행 조심하고 다니라는 말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럴 때마다 예현이는 산을 보는 것으로 숨을 쉰다. ‘나무는 푸르고 참새들은 날아다니지’ 하는 한숨이다. 그것이 위로라고 말하고 있지만 뒤에 오는 말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따뜻함이 ‘무극’임을. 그 마음에 담아둔 것들을 생각해 보니 뭉클해진다.
호경이의 ‘무극’에는 친구들과 반복적으로 가는 애착 지점이 있어 보인다. 그곳 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다음 시에서 고쳐 다듬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다. 좀 더 시간이 있다면 확인해 볼 수 있겠지만 지레짐작으로 그 지점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보다 좋아했을 그 공간들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앞으로도 채워갈 공간이란 점에서 무극은 더 많은 여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풀과 나무가 많다
외국인 근로자가 많다
어르신분들이 많다
징그러운 벌레들이 많다
하지만 난 그런 무극이 좋다
외국인들을 위한 건물도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물도 있다
어르신들을 위한 건물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는 무극이 좋다
김여진, <내가 보는 무극>
여진이가 쓴 시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호, 내가 보는 무극舞劇일 수도 있겠네?” 무극은 하나의 무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진이와 다른 아이들은 가볍게 웃어 넘긴다. 재미있는 발상이란 듯. 무극은 어느 때부터인가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 곳이 되었다. 현대사가 만들어놓은 지점이자 부려놓은, 여진이 말대로 하면 그냥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마을이다. 여진이에게 호불호를 남기는 풀과 나무와 징그러운 벌레들마저 많은 곳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무대이기에 참고 바라보는 것이다. 2연에 오는 건물들은 무대를 꾸미는 무대장치처럼 보인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사는 곳의 정점을 말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니까.
무극은 조용하고 잠잠한 곳이다.
밤 산책을 나가면 어느 곳보다
한없이 조용하고 고요하다.
밤엔 개구리와 곤충들이 울고
낮엔 매미와 새들이 운다.
그런 사소한 자연에서 들리는 소리도
어느 곳보다 잘 들려 생각이 많아지는 곳
이곳이 나의 무극이다.
박민지, <무극>
민지의 무극은 ‘생각이 많아지는 곳’이다. 조용하고 잠잠하고 고요한, 비슷한 말이 겹쳐 있는 곳이어서 밤엔 개구리와 곤충들이, 낮엔 매미와 새들이 우는 소리로 온갖 생각이 섞일 수밖에 없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소리를 부러워하고 아침 창문으로 이런 소리에 깨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하지만 ‘무극’은 너무나 많이 들려 다소 번잡스런 생각마저 밀려오게 만드는 곳이다. 그 생각이 어떤 것들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단호하게 끊는다. 이곳이 내가 사는 무극이라고. ‘이곳이 나의 무극이다’는 말은 자랑도 위축됨도 없는 ‘무극’ 그 자체인 것이다.
다음에 읽을 시들은 앞에 나온 시들과는 조금 다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연달아 놓았다.
알록달록 무극 무지개처럼 알록달록
창문을 열면 모든게 알록달록 사람들도 알록달록
내 마음도 알록달록한 우리 무극도 알록달록
이규원, <무극>
규원이의 무극은 온통 ‘알록달록’이다. 무지개 색처럼 정연한 듯 보이지만 모든 게 ‘알록달록’ 하게 섞여 있는 무엇이다. 무지개도 알고 보면 빛의 어룽거림이듯이 규원이의 마음도 알록달록 뭉쳐 있는 ‘무극’일 뿐이다. 굳이 사전에서 찾아보자면, ‘여러 가지 밝은 빛깔의 얼룩이나 줄무늬 따위가 고르지 않게 무늬를 이룬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니 규원이의 마음을 각자 헤아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시보다 많은 고민 같은 것을 숨겨놓은 시라고도 할 수 있다.
학교에 와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학원 갔다 자고
너무 평범하고 똑같은
일상이 이루어지니
지루할 수밖에 없다.
지루한 일상을 계속 보내니
나도 점점 지루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지루한 일상에
지루한 사람이라니
너무 재미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지루한 일상을 보낼까?
매일 밤 자기 전에
생각한다.
내일도 똑같은 하루일까?
박새미, <무극>
새미의 시는 ‘지루함’으로 시작하여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될까로 마무리할 만큼 무기력해 보인다. 제목이 ‘무극’이니 무극의 삶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앞선 다른 시와는 다르게 한참 푸념을 뱉어놓은 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한 일상에 따라 나마저 ‘지루한 사람’이 되고 ‘재미없는’ 삶을 살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자기만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시를 써서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매일 밤 자기 전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런 시의 출발과 함께 또 다른 무극의 일상을 만들어내길 바랄 뿐이다.
어렸을 때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무극
처음에는 낯설고 모든 게 불평 불만이었는데
점점 적응도 하고 살면서
나름 괜찮아졌다.
가끔 도시를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무극만 한 곳이 없다.
불편한 점도 많지만 못 지낼 정도는 아니다.
뭐든지 처음에는 새롭고 낯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내왔기 때문에
좋은 추억이 많다.
좋은 경험도 많고 사소한 일도 많았다.
무극이라는 곳은 나에게
추억의 장소로 남았다.
참 좋은 곳이다.
경예담, <무극>
그런 점에서 예담이의 ‘무극’이 새미의 대화 상대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지내보니까 지루해 보이는 일상조차 여러 일 가운데 하나였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음을 알게 될 거라고 말해준다면 너무 기계적인 대답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로 소통하는 것이 대화라고 보면 충분히 그런 물음 속에서 얻은 대답이 된 것이니 새미와 예담이의 시는 서로에게 주는 것이 많은 시인 셈이다.
무극에는 여러 사람이 있다.
무극에는 여러 신발도 있다.
무극에는 어느 가족의 아빠가 있다.
무극에는 아빠 신발엔 운동화가 있다.
무극에는 어느 가족의 엄마가 있다.
무극에는 엄마 신발인 구두가 있다.
무극에는 어느 가족의 동생이 있다.
무극에는 동생 신발엔 슬리퍼가 있다.
무극에는 어느 가족의 동생이 더 있다.
무극에는 어느 가족의 동생 신발인 장화가 있다.
무극에는 내가 있다……
내 신발은 모든 종류가 있다.
이연지, <무극>
이런 시도 나왔다. 연지의 ‘무극’은 단순하게 가족의 구성원과 뜻밖의 신발을 비교해 놓았지만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는 듯한 배치가 돋보인다. 연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과 신발 사이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옹이 같은 것이 만져지는 듯하다. ‘어느 가족’의 ‘아빠’와 ‘엄마’가 있고 ‘동생’이 있고 동생이 ‘더 있’다고 말한 것 아래 긴 이야기가 느껴진다. 그 가족의 신발을 바라보며 그것에 유독 집착하는 듯 보이는 생각의 지점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니 모두의 ‘무극’이 만만치 않은 화두(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붙들고 있는 생각이라고 할까, 크게 의심해보면서 깨우쳐 가는 문제라고 할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무극
무극은 어떤 곳일까?
나는 왜,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어떻게 보면 싫고 원수 같지만
어떻게 보면 따뜻하고 엄마 같다
무극은 어떻게 생겼을까?
무극은 대단하다.
여현지, <무극에 대한 궁금증>
현지가 제목을 ‘무극에 대한 궁금증’한 것도 그 까닭에서일까? ‘무극’에 다다르기 위해 던지는 물음 그 자체이다. ‘무극은 어떤 곳일까’ 이것 또한 물음으로 시작된 번거로운 일이다. ‘나는 왜,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를 앞선 시에서 쉽게 찾는 듯 보이나 현지는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무극’은 어떻게 보면 ‘싫고 원수 같’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이자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기에 ‘따뜻하고 엄마’ 같은 존재여서 당연히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새삼 만져보듯 느껴보는 것이다. 그러니 ‘무극’은 얼마나 대단한 말이자 마을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우리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층 더 높여 ‘무극’이란 화두를 던진다면 내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 또한 시가 해야 할 몫이다. 시를 써야 하는 까닭이 분명하게 보인다. 오늘의 시 쓰기 실험이 ‘무극’의 접점이자 서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대답하는 소통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무극중학교 1학년 4반 아이들 덕분이다. 무극이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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