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쉽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사계절)를 읽고 지리한 장마를 지붕처럼 이고 읽어낸 듯한 느낌이다. 두 권의 책을 양장본으로 다시 펴낸 것이라 마치 경전을 읽는 듯한 느낌인데다가 워터십 다운을 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무대를 지도와 함께 토끼어를 더듬어가며 읽자니 더디면서도 흥미로웠다. 제대로 된 장편을 읽다 보면 끝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때의 몽환 비슷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데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 이야기가 그 어떤 판타지 못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펴쳐 보여준 셈이다. 어릴 적에 형들 따라 토끼를 잡는다고 활을 만들고 올무를 놓던 때의 이야기를 이 이야기에 걸쳐놓으면 난 여지없이 흐루두두(자동차)를 타고 탐욕스럽게 토끼들의 세계를 넘보는 인간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올무와 활을 써서 잡으려 했던 토끼들이 잘도 빠져나간 틈이 보이기도 하고 그에 따라서 토끼들의 살아있는 삶과 터전이 보이기도 한다. 토끼들의 터전으로 들어가는 작가의 문장에 다시 한 번 놀란 셈인데 내가 그 터전에서 토끼가 되어 숲과 들판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가져왔다. 영락없이 내가 그들이 십는 풀과 그들의 언어로 넘겨다 보고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장편다운 힘있고 자연스러운 문장들! 그들의 세계는 동물의 세계답게 철저하게 짜여져 있어 족장 토끼를 중심으로 각자의 노릇을 철저하게 해내는 모습들이 그 세계를 겪어보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생태를 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어 읽기에 아주 편하고 마음 졸이게 한다. 소돔과 고모라와 이집트를 빠져나오는 선지자들처럼 토끼의 세계에도 자유와 평화를 찾는 그들만의 이상향이 있다는 것이 자연을 다시 보게 하고 그 자연에 깃들어 사는 인간의 자리를 생각하게 해준다. 족장 토끼로 끝없이 갈등하면서도 삶터를 만들어가는 헤이즐과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이 있어 그들의 이루어내야 할 삶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파이버, 터질 듯한 용맹으로 늘 온 식구들을 지켜주는 빅윌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터를 보면 왜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내놓으며 워터십 다운까지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는 영광스러운 토끼족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낸 엘 어라이어의 지혜와 용기가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잣대로 동물 세계를 보는 것과 인간의 입김과 옷을 입은 가짜 세계를 벗어난다면 그들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며칠 동안 읽으면서 그들이 사는 눈높이대로 들과 강, 풀들로 휩싸인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책갈피로 그들이 넘나드는 세계의 수위를 조절하면서 읽다 보니 그들이 닿는 발걸음 하나 하나, 그들이 개척하고 맞닥뜨리는 세계를 마음 졸이며 보았다. 어쩌면 인디언의 세계가 문명 사이에서 맞부딪힌 느낌이다. 그리고 종족 보존을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끝내는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주 많은 분량인데도 이야기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작가의 힘에 놀랐다. 섣불리 사람으로 그리려 하지 않고 잠시도 토끼임을 잊지 않게 하는 집요한 문장의 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워터십 다운을 중심으로 펼쳐진 그들의 지도를 다시 들여다 보며 흘레시(떠돌이 토끼)가 되어 숲과 들에 떨어진 느낌이다. 자, 충분히 맛봐라! 하고 내던져진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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