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또다른 외로움
-<내가 나인 것>(야마나카 히사시 장편동화.사계절) -
가족이란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그 말을 다시 식구라고 말하면 그 하나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며 지금까지 살아온, 다시 살아갈 날들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만큼 허술한 믿음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내 자식이니까 모든 걸 알고 있고 자기 뜻대로 틀어쥐고 있어야만 마음을 놓고, 늘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 있길 바란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먹고 살게 해주는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연결고리만 떨어져 나가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살아온 삶이 거품처럼 허무해지는 것도 그 낱낱의 이름들이다. 단지 사춘기에 으레 겪게 되는 방황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자존심을 짓밟게 되는 일 앞에서 가족이란 이름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여기 나온 히데카즈네 식구들 또한 그렇다. 서로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근근히 가족이란 이름으로 끌어왔지만 하루아침에 끈 풀린 목걸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일찍 데릴사위로 들어와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처럼 성실하기만 한 아버지. 그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히데카즈 엄마는 무능하고 무른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을 책임지고 자기의 철칙대로 식구들을 이끌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젊은 날을 생각해 보고 집안에 틀어박혀 아이들을 키워내고 스스로 가망없이 인간상을 만들어놓으며 영원불멸할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히데카즈의 형들은 공부를 잘 하고 모범생으로 엄마의 희생을 만족시켜주었다 하지만 히데카즈에게는 그 모든 것이 기계에 지나지 않고 엄마의 가치 기준에 제 삶을 살지 못한 반쪽 삶이었던 것이다. 히데카즈가 좋아하고 가고자 하는 길에 늘 엄마는 감시하고 형들과 비교하면서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여동생을 시켜서 편지까지 검열하는 것은 히스테리하고 폭력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왜 그렇게 아이들을 자신의 뜻에 맞추고 그렇게 군소리없이 살아가길 바랬을까. 젊은 시절에 보상받지 못한 것들을 아이들에게 거꾸로 쏟아붓고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알 수 없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평온을 잃고 우격다짐으로 삶을 그르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화다. 가출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배우고 다른 삶을 겪게 되는 히데카즈가 자못 철학에 가까운 제목 '내가 나인 것'을 깨닫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더 겪고 아파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파하고 두려운 것들을 쉽게 피해가려 하고 묻어두려고 한다. 작품에서조카차 아이의 마음을 끝까지 따라 겪어보고 살피려 하지 않고 행복한 결말이나 뜨뜻미지근한 결말로 '좋은 것은 좋은 것이야' 하며 현실에 묶어두려고 한다. 단지 그 시절에 겪게 되는 방황이라고 여기며 아무 문제 없는 가족의 테두리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히데카즈가 선택한 가출을 불경시하고 다른 이야기로 얼버무리려 한다.
그러나 내 삶이나 남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나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없이 들어줘도 모자랄 만큼 하나의 존재는 깊고 넓기만 하다. 왜 엄마는 히데카즈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어야만 했을까. 히데카즈의 형들 또한 마찬가지지만. 히데카즈는 그렇다 치더라고 그렇게 믿었던 히데카즈의 형들에게 철저하게 복수를 당한 것을 보면 절망 그 자체이다.
그러나 언젠가 터질 구멍은 꼭 터지게 마련이다. 가까스로 구멍을 막아놓는다고 해서 그대로 갈 일이 아니다. 재산 싸움은 부모가 죽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어쩌 가족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반목 또한 깊고 오래 간다. 이웃의 자리라면 저렇게까지 되지 않을텐데 하는 역설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러면서도 그 세기 만큼 평온한 자리로 오려는 반발력 또한 있다. 그동안 우상을 섬겨온 믿음만큼이나 깨달음 또한 찾아온다. 온몸이 저리고 멍이 들고 구멍이 뚫렸어도 한 거풀 더께를 벗고 나면 서로 외로운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의 자리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들의 자리에서, 아이들은 머지않아 부모의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가족의 외로움은 이제야 볕이 들기 시작한 셈이다. 그만큼 잃은 것 또한 많다. 내 바람대로 각자의 외로움이 낱낱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히데카즈와 엄마 사이에 불거진 일을 보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날과 같은 아쉬움과 상처가 있다. 그렇지만 겪은 만큼 수월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가족은 늘 해체되고 있다. 핀 하나만 빠져도 달리는 기차라도 떨어질 것이고 또다른 삶의 포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거기에는 좀더 많은 원인들이 생겨나지만 무엇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들은 각자의 외로운 자리이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된 자리에서 열어줘야 할 세상 이야기임을 알아야 한다.
야마나카 히사시는 일찍 작가의 자리에서 본 듯하다. 갈등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한편 아이의 자리에서 아이의 마음을 좇아 성실하게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일본의 이야기라고 멀고 다른 삶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고 아이들의 자리에서 들어주고 새로운 캐릭터로 만들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자신의 믿음 안에다 자라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늘 어떤 모양으로 바뀔 지 모르고 커나가는 흐름과 속도를 가늠하면서 아이들에게 위안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떤 아이들이나 들어줄 귀와 새겨줄 마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이를 살리고 더 나은 길로 가게 할 것인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에 가까에 가야 할 것이다.
늑대에 대한 진실 <울지 않는 늑대> (0) | 2021.09.02 |
---|---|
판타지의 실패 <영모가 사라졌다> (0) | 2021.09.02 |
<워터쉽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0) | 2021.09.02 |
이정록 시집 <제비꽃 여인숙> (0) | 2021.09.02 |
살람 알레이쿰 (0) | 2021.09.0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