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함께한다는 것은
- <할머니가 남긴 선물> 론 브룩스 그림/마거릿 와일드 글/최순희 옮김/시공주니어
"할머니 돼지와 손녀 돼지는 오래도록 함께 살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그림책인데, 이제는 조금 낯익는 듯하다. 언제부터 어떤 까닭에 할머니와 손녀만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읽어주고 싶지 않은 그림책이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내 몸안에 들어있는 감기나 은근한 고통처럼 바로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강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문제는 음산한 지하실 같다거나 얼른 지나치고 싶어하는 곳집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어른들이야 죽고 사는 문제에 그야말로 죽고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아직 살 날이 오래 남은(?) 아이들에게야 본 삶에 들어서는 길에서 만나는 신비한 체험이자 삶을 이해하는 지름길 비슷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보지 않고는 그 너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비 때마다 자신의 온전한 삶을 반쯤은 깎아내려야 하는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
둘은 모든 일을 함께 했습니다.
집안일도요.
날마다 날마다, 할머니 돼지가 난로를 청소하면 손녀 돼지는 장작을 팼습니다.
이런 식으로 할머니와 손녀 돼지는 함께 일 하고 식사를 준비하며 온전한 삶을 살았는데, 죽음을 맞게 될 줄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와버린 죽음 앞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지켜보는 손녀 돼지한테는 너무도 무거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제까지나 할머니랑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옥수수 귀리죽만 먹어도 좋아요.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요.
바로 앞전에 귀리죽이 싫다고 투덜거리는 손녀 돼지한테 할머니가 "할미가 살아있는 동안은 먹도록 해라" 하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할머니 돼지는 일어나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서 아침 밥상머리에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밥상을 침대에까지 가져가야 할 만큼 할머니는 잠만 잘 뿐이니 손녀 돼지는 쓸쓸하고 가냘픈 "꾸울" 소리만 나올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순간, 이런 자리에 우리 아이들을 내려놓는다면, 아니 그림책으로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녀 돼지가 맞딱드린 기로에 놓는다면 어쩔 것인가, 이제 솜털이 보숭보숭해가지고 서서히 죽음이란 무엇인지 묻는 아이에게 빈 자리를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할머니와 손녀 돼지만 남은 상황이 곧 절해고도의 슬픔으로 이어질 거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보살펴줄 수 있는 이가 없는 손녀 돼지 혼자만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 돼지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빌리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은행에 가서 돈을 전부 찾았습니다. 그리고 통장을 해지했어요.
할머니는 식료품 가게에 가서 외상값을 갚았습니다.
이제 세상과 이별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겨울을 나기 위해 땔감을 준비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손녀에게 남은 겨울과도 같은 세상일을 어쩌란 말인가. 엇나가서 생각하기를 이래서 생사를 비관해서 자살하는 부모가 아이까지도 세상에 남겨두지 않고 거둬가는구나 하는 쪽으로 돌리게 된다. 그러나 여기 이야기는 그런 것과는 달리 죽음이 코앞에 있는데 아주 침착하게 정리하는, 가는 길에마저 텃밭을 일궈두고 가는 조용한 메시지가 있다.
"잔치를 열고 싶구나"
"입맛이 돌아온 거예요?"
순간, 손녀 돼지는 기대에 가득 차서 물었습니다.
"밥을 먹고 싶은 게 아니란다. 마을을 천천히 거닐면서 나무와 꽃과, 하늘을 이 눈으로 보며 즐기고 싶구나....... 모든 것을 말이야!"
어쩌면 자신만의 평화로운 죽음 을 맞이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곧 손녀 돼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 밝혀진다.
"저기 좀 보렴!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이는 게 보이니?"
"저어기 좀 보렴! 구름이 수다쟁이들처럼 하늘에 모여 있는 게 보이니?"
"새들이 재재거리는 소리 들리니? 아아, 따스한 흙냄새. 우리 이 비 맛 좀 볼까?"
그동안 이런 순간을 느끼지 않고 산 것은 아니겠지만 죽음에 몰려서, 아니 다음 세상이 한 목숨을 앗아가지만 내내 이렇게 평화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잿빛으로 바뀌고 살 맛이 나지 않는 것만은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은 것 같다. 그것을 일찍이 가르쳐준다고 해서 남은 삶에 나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손녀 돼지는 귀리죽이 싫다고 투정을 부리던 때와 달리 "오늘 밤은 제가 할머니 침대로 들어가 꼭 껴안아 드리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손녀 돼지가 나쁜 꿈을 꿀 때면 꼭 안아주던 할머니처럼 이번에는 할머니를 껴안아 줄 수 있는 마음 씀씀이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들어오게 창문을 열고 달빛마저 들어오게 해두고 조용하게 첼로를 켜고 마지막으로 꼬옥 껴안고 잠을 자게 된다. 달밤에 연못에 빈 배가 떠있고 하얀 새가 날아가는 것으로 봐서 할머니는 아름다운 추억만을 간직한채 목숨을 놓게 된다. 마지막 그림에서는 손녀 돼지가 오리와 함께 할머니가 돌아간 하늘 한켠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돌아가고 남는 것이 또다른 삶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문장이나 어른들이 납득하게 보여줄 수 없는 것 뿐이다.
이것은 정말 할머니가 남긴 선물이라고 표현한 것이 잘 맞아떨어진다. 그만큼 할머니는 죽을 힘을 다해, 선물로 온전한 세상을 보여주고 간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그대로 보아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일 수는 없지만 서로에게 교통하는 무엇인가 있는게 틀림없다. 무거운 짐 같은 걸 한쪽에만 떠맡기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서 새로운 삶의 위안거리와 믿음음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죽어서 애달퍼 하지 않고 산 것과 죽은 것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인지 알고 나면 그저 멀리 배웅하고 돌아오는 기분이라는 걸, 손녀 돼지는 어느새 성숙한 자세로 삶을 바라보게 될 거라는 상상할 해보면 할머니가 남긴 선물이 푸근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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