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어 읽다

시와 함께한 나날

by 참도깨비 2021. 9. 6. 16:34

본문

“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어 읽다 ”


이중기 시집 <<오래된 책>>(신생)을 읽고
 
 
 
여기 '영남 무림'에도 모처럼 동장군이 여러 날째 성깔을 부리고 있다네. 거긴 북쪽이라 여기보단 훨씬 심하겠구먼. 나는 며칠째 밭에도 나가지 못하고 오소리처럼 들어앉아 그동안 미루어 두고 있던 책을 읽느라 그런대로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네.
내 시집이란 것은 새앙쥐나 들락거리고 비바람 마구 들이치는 거푸집 같은 것이라 늘 부끄러울 뿐이지. 담배연기를 몰아내느라고 북창을 여니 칼바람이 무릎을 엄습한다.
문득 소주 한잔 카아, 생각난다.
이 겨울에 산처럼 건강한 시를 쓰시길......

영천에서 이 중 기

영천 농부 이중기 시인의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는다. 새앙쥐나 들락거린다는 시집 제목은 '오래된 책'이다.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도 새앙쥐가 들락거리는 작은 방에서 종탑지기를 하셨으니 시인의 말은 가마니떼기 위에 쓴 시나 다름없다. 꽃샘추위가 물러간 날 논둑에 난 쑥을 깨다 시인의 편지 한 대목을 꺼낸다.
 
일찍이 나는 하늘로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중늙은이가 되도록 오지 않는다
 
먼 옛날 하늘이 내게 보낸 편지에
나는 쉰 살이 넘도록 답장을 쓰고 있다
 
논 갈아 모를 내고 사람의 양식을 가꾸는 일이
내가 하늘로 보내야 할 답장이다
 
하늘에서도 누군가 있어 뻘뻘 땀 흘리며
나에게 보낼 답장을 쓰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노동으로 한 줄 편지를 쓴다
 
<나의 노동은> 전문
 
 
 논둑에는 노랗고 하얀 냉이꽃이며 꽃다지, 쑥이 오록조록 솟고 있는데, 그의 편지는 왜 이리 시큰할까. 노동으로 살지 못하는 나의 시가 부끄러워져 그저 쑥을 뜯다 만 시를 끄적이며 시집을 다시 읽을 수밖에.
 농부의 삶이 먼 옛날 하늘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하는 것이라니 이보다 명쾌한 소임이 어디 있을까.
 그러면서도 시인 자신을 식민지농민이라고 부른다. 편지부터 꺼내든 나로서는 너무 낮은 자리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늘편지에 답장을 한다던 시인이 말하는 식민지농민이란 오곡백과의 종자들까지 잠식당한 채 농사짓는 현실과 품값도 안 나온다는 현실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해마다 수매해야 할 쌀가마니들을 도로에 퍼붓고 도청 군청 앞에 쌓는 농민의 자리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너희가 해마다 죽을힘 다해 거둔 것들
죄 앗아 한방에 꼬라박는 인간 말종들이 있다
 
그게 나다 농민이다
그렇지 않은가 논밭이여?
 
더러는 운수납자와 몸 바꾸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북극성에 수하를 걸어 암호를 묻기도 했다
 
무시래기 같은 헐한 삯도 없이 널 부려 이룬 폐허여
염하다가 놓친 놈 같이 푸르뎅뎅한 몰골이여
 
네 등골에 빨대를 꽂은 인간이 나다 농민이다
 
 
<논밭이여 미안하다> 전문
 

 
 
 
 '염하다 놓친 놈 같이 푸르뎅뎅한 몰골'이 되도록 부려먹은 풍년마저 기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죽을힘 다해 거둔 것들을 한방에 꼬라박는 농민이라니, 등골에 빨대를 꽂은 농민이라니, 이렇듯 자기 부정을 하며 폐허를 말한 농민이 있었을까. '나를 멀리했던 사람은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마침내 은자가 된 사람의 사치가 따뜻하다'(<그믐에 기대어>)고 한 그믐의 마음 때문이리라. 그는 옛사람처럼 오래된 책을 붙들고 머리를 책상에 박아가면서 공부하는 '호모 쿵푸스' 나 농부가 된 꺽정이 같다.
 
엄청 나이를 많이 잡수신 책이 있다
비바람 눈보라를 배경으로 일주문은 초라해도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걸어야 옛날 경전에 닿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책으로 생을 연마했으나
철없는 것들이 번역본으로 읽어 오해가 많다
이 책은 원문으로 읽어야 티끌 같은 세상이 잘 보인다
허리 구부정한 부족국가 늙은이들이
불량기 많은 비바람 눈보라 노역을 시켜
단절 없는 인간의 시간을 집필한
오래된 미래,
 
흙으로 만든 책
 
<오래된 책> 전문
 
 이 책 때문이었구나. 백정으로 시작하여 잘못된 역사의 노마드가 되었던 꺽정이가 오래된 미래를 떠올리고 '불량기 많은 비바람 눈보라' 대신 수족을 놀려 농민이 되어 흙으로 된 책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니 걸음걸음에 짐을 질 수밖에 없어보인다.
 
개가 짐을 지고 간다
소처럼 등에는 길마도 걸쳤다
길마 위에는 명심보감을 실었다
천자문 소학은 지난겨울에 부렸다
 
명쾌하지 못한 판결문처럼 께름칙한가?
 
닭실 왕고모 작은아들 서당가실 때
도련님 책 보따리 짊어지고 나귀처럼
타박타박 앞서 가던 늙은 보살,
서당 교과서 무게에 가끔 절망을 하던
 
상형문자 한 짐 짊어지고 가던 그 성자를
사내는 마흔아홉 고개 넘다 만나 눈물 훔쳤다
짐 진 개의 눈빛이 캄캄해서 울고 말았다
 
두 어깨로는 버거운 상형문자 농업을 부려버리자
그것 참 잘한 일이라고 너 아주 잘 만났다고
병 하나가 사내 몸에 붉은 낙관을 꽝, 찍어버렸다
평생을 벼린 붉은 죄 하나가 생의 마지막 짐이다
 
<짐 진 개를 보았다> 전문
 
 
 짐 진 개마저 천자문 소학을 부렸다니 그 개는 평생 붉은 낙인을 이마에 찍고 사는 천하의 농부인 것이다. 개의 눈빛에서 앞선 생이 보이다 말다 이내 캄캄해져서 우는 마음이란 얼마나 아플 것인가.
 

 
 
우리 마을 부처 하나 자꾸 운다, 꾸역꾸역 운다
 
트랙터 경운기도 못 들어가는 습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무논에
건달농사꾼 막내아들이 돌 처넣던 날,
덤프트럭 꼬나보며 담배 한 갑 다 태우고
늙은 부처 또 울었다, 붉게 울었다
어금니는 다 빼버리고 앞니 몇 개만 남은
월계어른 꾸역꾸역 자꾸 울었다
 
비바람 들이치는 머슴살이 헐한 삯으로 장만한
첫 땅,
뒷골 벙어리 무논 한 팔백 평
그 찡한 생의 첫 문장에 복상나무 심던 날,
복상나무 잔뿌리가 자꾸 눈 속으로 파고든다며
늙은 부처 월계어른 붉게 울었다
 
이놈아, 이놈아 ㆍㆍㆍㆍ꾸역꾸역 울다 재가 되었다
 
 
<늙은 부처, 붉게 울었다> 전문
 
생의 첫 문장을 '한 방에 꼬라박는' 철 없는 자식들이 시인의 또다른 화자이기도 하다. 꾸역꾸역 붉게 울다 재가 된 어른 앞에서 또 하나의 부처를 다비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시인의 눈에 자꾸만 꾸역꾸역 들어오는 것들이다.
 
옛 집 적막강산에
슬픈 여물 한 그릇 있다
천년을 개다리소반에 가부좌 틀고 앉은
궁궁을을 우리나라 여물 한 그릇 전전긍긍이다
내 첫물 슬픔이었던
일자무식 여물 한 그릇,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극진한 인사말이었던
그 분, 재로 변해 건드릴 수 없는 고요가 오는 날,
슬픈 여물을 탁발하는 종말이 오리라
붉은 만월 호곡하는 저 논틀발틀에
화엄절벽 솟으리라, 솟구치리라
끝물 슬픔 거두며 마침내 왈칵, 울리라
 
<헐한, 슬픈 여물 한 그릇> 부분
 
 
 월계어른이 그랬고 뒷골 벙어리 무논이 그랬듯이 화엄절벽이 솟구치는 땅에서 더이상 극진한 인사말이었던 여물 한 그릇 채울 수 없는, 궁궁을을, 오래된 책을 읽고 있는 식민지농민. '나의 노동으로' 편지를 쓴다던 농민의 마음 한 그릇이 오롯이 담겨있어야 하거늘, 또 한 그릇 채우지 못하고 일자무식으로 돌아가 눈물 흘리고 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밥'의 경전 한 귀절이었던 여물 한 그릇이지 않은가.
 
밥에게 부끄럽지 말라고
아버지는 하루 세 번 밥과 마주 앉혔습니다
가르침이 아니라 자성이었겠지요
밥은 장군죽비 우렛소리 푸른 옛날입니다
밥 먹는다는 건 맹세하는 일입니다
백년을 살아도 하루 세 번 밥 맹세하는 일 지극합니다
잘못 살아 면목이 없는 어떤 날 저물 무렵에
밥값은 했느냐고 물으면 더럭 겁이 납니다
밥에게 부끄럽지 않을 일 참 어렵습니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전문
 
 
밥값은 처음부터 밥이 되어 돌아오는 경전을 갈았던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더 나아가 '죽어라 일에만 복종하는 농부보다는/반골 기질 숨어있는 농민이 나는 썩 좋다/그래서 그런지 농민은 생의 북쪽 같다'(<농부와 농민 사이에서>)던 말도 끝내는 밥값일텐데, 시인이 된 자신은 '농부와 농민' 그 사이가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밥 먹는다는 것은 맹세하는 일'(<밥을 먹는다는 것은>)인데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짜장면집에 들이닥치자 밥집 주인이 "쌀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밥은 안 잡숫고 뭐! 거시기 수입 밀가루나 처먹어?/에라, 이 화상들아/똥 폼이나 잡지 말든지...."(<그 말이 가슴을 쳤다>)한 말에 일주문을 부숴버렸다니 영락없는 식민지농민이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주문이 어떤 일주문인가. 앞선 '오래된 책'에 나오는 "비바람 눈보라를 배경으로' 있던 일주문이 아니었던가.
 강직한듯 하면서도 낭창낭창한 농민의 몸은 곳곳에 울고 있다.
 
쉰 살이 되던 날 나는 영천에서 울었네
머리띠 풀어버리고 몰래 농민대회 도망쳐 나와
장터거리에서 조선 나이 쉰 살을 독대하고 울었네
죽을힘 다해 유신에 복무했으나 실패한 생,
그러나 머리띠 매고 나라에 삿대질 한번 못한
마흔아홉 젊은 아버지도 거기 있었네
 
(줄임)
 
쉰 살은 한정 드는 쇠기러기 조선 나이,
오늘은 나도 짚 두 가닥으로 묶은 간고기 한 손 사 들고
쇠기러기처럼 죽을힘 다해 옛집으로 돌아가겠네
콩 팔고 가던 뿌뜰이처럼 간고기는 버리고
소리끼 없이 비린내만 들고 가
처마 낮은 사람들 마을 처처에 걸어두겠네
북극성 같은 생의 첫 고요에 걸어 두겠네
 
<쉰 살, 영천에서 울다> 부분
 
 
 처처에 걸어둔 울음이 곧 북극성인 것은 아닐까. '북극성에 수하를 걸고 암호를 묻기고 했다'(<논밭이여 미안하다>)는 시에서 읽었듯이 처처에 붉은 울음이다. 억장의 슬픔이다. "살다 보면 한두 해쯤 공양 농사도 지을 일"(<보조개사과>)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서른 몇 살 때 망쳤던 사과농사를 떠올리며 붉은 울음 절색인 보조개사과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적막하여 몸이 적막하여 농사가 적막하"여 울고 "꽃이 적막하여 벌 나비가 적막하여 열매가 적막하여" 또 울고, "시골이 적막하여 도시가 적막하여" 울고 끝내 "밥이 적막하여" (<적막하다>)우는 것이다. 세상은 여지없이 미친 소에 맥도널드 광고판을 치켜드니 "꼼짝없이 나도 제국의 신민으로 편입"(<미친 소>)될 수밖에 없다. 식민지농민일 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이다. "고봉밥 한 그릇이 절 한 채"(<가난의 증거>)일 수밖에 없었던 옛날 책 한 귀절을 떠올리니 슬픔의 높이는 강을 가로막는 보만큼이나 처절하다.
 
관 벗어

자리 없다
 
차라리 목을 쳐라
발버둥치지 않겠다
발목도 잘라라
 
<어이가 없다-한미 자유무역협정> 부분
 
 지옥의 묵시록을 읽는 중이라고 했던 다른 시에서 밝힌 것처럼 "한국농업현대사가 그렇다' 더이상 '풍자가 아니고 빙자가 아니라 포르노'라고 일갈할 수밖에 없는, 저 '관 벗어/걸/자리 없'는 처처에 걸어둔 울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쓰는 한국농업현대사는 더이상 오래된 책에서 배우지 않는다. 그러니 식민지농민은 소쩍새를 빙자한 시인이라고 자책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허허 글쎄 말입니다 허허허
그날 밤 백만 소쩍새대회가 열렸다지요
천년을 솥이 작다고, 솥 텅텅 비었다고 엄살 부리던
풍자꾼들 전국적으로 사발통문 격문을 돌려
청와대 솔숲에서 집회를 했다지요
그것 참, 허허 그것 참
솥 텅, 솥 텅텅 옛날 투쟁가를 부르고
호남평야 사는 전국소쩍새회장 대회사를 하고
오대산에 은둔하던 원로 정치연설도 듣고
솥 꽉, 솥 꽉꽉 만장일치로 결의문 채택했다나요
세상에도 참, 허허 그것 참
잘못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다시 하라고
백만 민중대회를 열기로 한 날,
불법집회라고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고속도로
진입을 거부당하고 입구에서 발이 묶였는데
고속도로 틀어막았다고 몰매를 맞던 날 밤이었어요
진단이 틀렸으니 처방도 틀리겠지만
소쩍새를 빙지한 나도 참 한심한 시인입니다
 
 
<우화> 전문
 
 
 이제야 한심한 시인임을 밝히고 있다. 허허 쓴 웃음도 모자라 솥 텅텅, 솥 꽉꽉 염원에 찬 풍자를 하는 시인의 자리에서 흙으로 만든 책은 몇 번이고 거둬 치우고 싶은 오래된 미래, 아니 미래는 없고 너덜너덜한 옛날 책만 나부끼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슬픔의 노래를 고쳐 부르고 있다.
 
이 놈의 별이 또 늑장을 부린다고 투덜투덜
어둠 속으로 바삐 일 나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어린별이 어젯잠 늦도록 술 마셨다고
장작불로 해장국을 끓이는 아낙들이 있다
 
가던 길 팽개치고 응급실로 달려와
고장 난 지구를 간병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운 밥 한상 들고 와 지규야, 지구야 부르며
병실 밖에서 흐느끼는 아이들이 있다
 
먼 산 그림자 끌어 당겨 눈 가리는 밤,
오늘은 인간들에게 초록의 슬픔이 필요 하겠다
 
<슬픔이 필요 하겠다> 전문
 
 
 언뜻 보면 행사시처럼 보이지만 '돼지머리 책사'(<희미하게 웃으신다>)가 희미하게 웃듯이 슬픔을 고쳐 부르고자 시인이자 농민 사이에서 아프고자 한다.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 너덧하고
서서 볼일 보는 사람도 그만치
떼 까치처럼 분답다
 
한물의 단풍처럼 지분지분
우거지는 신록처럼 지망지망
입 한번 걸게 난장판으로
육담 버글버글 끓는다
 
천둥지기에 화톳불 거나하게 타오르는 복날,
기룡산 그늘 아래 보현 삼십 리
불멸의 육두문자 친친 감긴다
 
<저 풍경이 아름답다> 전문
 
 낮술에 불콰해져서 건달농사꾼도 못 되는 사바세계에 일갈을 하면서 붉은 얼굴로 툭툭 치고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 북극성에 비린내 나는 간고기 같은 몸, 울음을 걸어두고 일을 나갈 것이다. 짐승의 발자국 같은 눈물을 찍고 무논으로 걸어들어갈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