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개와 놀다

시와 함께한 나날

by 참도깨비 2021. 9. 6. 16:32

본문

 어부는  돈을 벌러 멀리 제천으로  산불감시원 하러 나갔단다.  봄 여름 가을, 몰려들 식객들을 위해 쌀도 사고 반찬거리에 술도 사려면 겨우내 짱짱하게 벌어놓아야만 한다. 고기 잡아 나누는 일만 벌써 몇 십년째인지,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등성이들이 깊은 쏘 같고 희끗하게 지나치는 고기 등지느러미 같아 달달하겠지.
 
 어부의 집에는 개들이 지키고 있다. 짖지 않는 개들. 그새 새끼를 낳았는지 세 마리가 오종종 뛰어나온다. 타고난 개밥그릇이 그런지 턱을 괴고 먼 산만 바라보는 놈에 "너, 왔냐?" 하고 내다보고 고개를 거두는 놈에 모두 어부를 닮았다.
 
 개가 짖지 않으니까 내가 사람 좋은 놈처럼 느껴진다. 개한테 사람 알아본다고 칭찬할 뻔했다.
 
  애당초 안 짖었는가
  얼마나 짖어대다가
  짖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마침내 알고 말았는가
  오가는 이 낯설든 낯익든 말든
  박씨네 누렁이는 사람 보고
  짖는 일이 없다
 
  두엄자리 옆에 가로누워서
  겨울 햇살만 깔아뭉갠다
  하품하다 말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무턱대고 나를 믿는 것도 같다
  어쩐지 맘이  편하질 않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가
  어쩐지 맘이 편하질 않다
  니까짓것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아예 깔아뭉개는 것도 같다
  하여튼 맘이 편하질 않다
 
  안 짖는 개가 더 무섭다는데
  저러다가 덜컥 내 다리를
  물어버릴지도 모르지 조심해야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쭈뼛거리며 그 앞을 지나간다
 
  지나가다 말고 슬쩍 뒤돌아본다
  니까짓것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누렁이는 벌써 먼 산을 보고 있는 중이다
 
 
                        정양, <안 짖는 개> 전문
 
 
 


 
 겨울햇살을 즐기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햇살을 가리는 장군에게 한 마디 했다가 비명횡사한 철학자처럼 '겨울 햇살을 깔아뭉개'는 것도 모자라 거적까지 덮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이 사납게 짖어대는 개를 만나면 오히려 발길질 한 번 더 하고 싶지만 덩치를 불리듯 짖지 않는 개를 보면 일종의 경외감마저 든다. 이리나 삵 같은 야생의 피가 흐르면서도 낮은 자세로 머리를 내맡기고 순종 비슷한 억양으로 허밍할 줄 아는 개를 보면 두렵기까지 하다. 저러다가 덜컥 물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사람으로서 저 바닥의 나약함이 고개를 들고는 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개는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는 눈치다. 강아지들을 내보내며 꼬리를 살짝 흔들 뿐이다. 막내가 아기였을 때 불러주던 자장가 한 대목처럼. 호랑이가 글쎄, 잠 안 자고 칭얼대는 놈을 덥석 물어다가 호랑이 굴에 내려놓고 새끼들과 실컷 놀게 했다나 뭐라나 하는 이야기 말이다.
 
 


 
 눈썹이 짙은 놈들이다. 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형님!" 하고 부르는 것만 같다.
 
  개밥그릇을 말갛게 닦아주고 싶었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나도
  수돗가에 앉아 도(陶)를 닦았다
  고개 갸웃갸웃 쳐다보던 흰 개
 
  없다니까!
  그 그림자가 그릇의 맛이야
  수백 번 혓바닥으로 핥아도 아직 지울 수
  햇살이 담길수록 그릇이 가벼웠다
 
 
                 함민복, <개밥그릇> 부분
 
 
 그 자체가 그릇인 고개부터 들이밀고 나오니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다. 뭐 훔쳐갈 것도 없는 살림에 주인이 으레 문에 돌만 받쳐놓고 나갔듯이 이 놈들도 빈 그릇으로 달랑거린다. 머리를 쓰다듬고 목을 쓸어주니 바짓단을 붙들고 장난을 친다. 제법 자란 이빨에 힘이 실렸다. 어린 밤나무 둥치를 갉아대던 놈도 달려들어 장난을 친다.
 
 


 
 


 
 퍼질러 앉아 놀아주기로 한다. 맵차던 겨울 날씨가 물러앉은 자리에는 저놈들 치닥거리처럼 금세 꽃이 필 것만 같다. 그세 올라타고 물어대며 싸운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려서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는 첫째와 둘째놈처럼 앙칼지지만 어디까지나 대궁만 끊고 마는 풀싸움이다.
 
 


 
 


 
 눈자위가 살짝 돌아가기도 하고 뒷다리를 너끈하게 물어대도 설탕이 따뜻한 물에 녹아내리듯 햇살이 바람과 함께 들썩거리는 것일뿐이다. 어미 앞에서 보란 듯 싸우는 것이다. 그러면 어미들은 안 보는 척 어떤 놈이 사납고 튼실한지 어떤 놈이 비리비리한지 알고 옛날 호랑이처럼 하자면 난 놈만 더 먹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건 옛날 이야기일 뿐. 어부가 가져다 주는 밥에는 너나 할 것이 없이 공평해서 양껏 욕심껏 먹고 살이 토실토실 오를 뿐이다.
 
 


 
 


 
 나 또한 입이 근질근질해져서 주인이 막 접붙여 심어놓은 밤나무 가지를 긁어대고 싶다. 사람이야 지나가든 말든 쭈그리고 앉아 해종일 놀아도 좋은, 봄이면 다시 돌아오는 어부에게서 자작나무 물 한 대접 건네받고 잉어회라도 먹을 참이라고 이놈들 더 한 번 쓸어주면서 놀고 또 놀고.
 

 
 
 오두마니 발을 세우고 앉아 배웅하는 강아지들이 꼭 한 달은 묵다 가는 식객을 보는 듯하다. 어부가 오면 전갈하마며, 어룽대는 겨울 햇살이 산 겹겹 밥상처럼 물리고 있는 오후에 개와 논 시간이 금쪽 같기만 하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