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이란 가장 의미 없고 쓸데없는 감정이다
-미원중학교 3학년 시를 중심으로
미원은 쌀안이라고 불렀다. 쌀안 장터 만세운동으로도 알려진 강골의 고장이다. 국립공원이 있는 화양동 계곡과 가깝지만 청주 도심과도 가깝다. 언제나 한 번 가보나 했는데 오늘에야 지나는 길이 아닌 시 쓰기 수업으로 왔다. 교감 선생님은 아이들이 작가와의 만남 같은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시 이야기와 더불어 책 이야기도 많이 해달라신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의 질문부터가 남달랐다. 시집을 읽어보았다면서 ‘하하호호’(화양동 계곡에 빠져 죽다 살아난 이야기)에서처럼 자기도 물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도 공감하면서 공통으로 물어본 것에 의하면 그렇게 힘든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갔느냐는 것이다. 3학년이라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 보인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다.
나는 곧 졸업이다.
정든 내 친구들과 선생님
이젠 안녕이다.
아쉽고 슬픈 끝맺음이지만
끝맺음, 그 다음은 새로운 시작이 된다.
새로운 시작들과 아쉬운 끝맺음의 반복.
나는 매일 성장한다.
김교은, <졸업>
교은이는 벌써 ‘졸업’을 생각하며 적잖이 고민한 티가 나는 시를 썼다. 중학생 시절과 고등학생 시절은 전혀 다르기에 고민이 많을 때다. 더 좋은 학교로 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떠나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 성공과 실패라는 지나친 덤터기가 씌워질 수도 있다는 부담감이 클 것이다.
공부 좀 하라는 살짝에 꾸중 괜찮아
그렇지만 남들과 비교는 하지 마, 제발
밥 먹는데 젓가락질 잘 하라는 꾸중 괜찮아
그렇지만 비교하면서 이야기하지 마, 제발
나도 사람이라 못하는 게 있어
그런데 거기에 대해 그것도 못해 라는
가시를 내뱉지마
누구는 잘하는데 라면 비교하지 마, 제발
알아 나도 내가 많이 부족한 거
그렇지만 비교하면서 이야기하지 마, 제발
송인영, <하지 마, 제발>
초등학교 고학년이어도 이른바 ‘성공’, ‘실패’, ‘행복’ 과도 같은 관념적인 말이 마치 시험 성적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니 인영이처럼 어른의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공부하라는 말, 젓가락이 서툴다는 말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대상과 비교하면서 “그것밖에 못하니?”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에 대못이 아니라 가시가 박히는 기분일 것이다. 이것만은 인영이가 저항하듯 말할 수 있는 인영이만의 목소리이다. 그러니 좀 더 정교하고 따뜻한 질책이 필요한 것이다. 비교라는 것도 ‘성공’과 ‘실패’, ‘행복’을 잘못 다루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알아, 나도 내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안다면 더욱더 ‘제발’에 깔린 의미를 알아주어야 한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이쁘고
돈이 많은 친구들이 많다.
당연히 부럽다.
하지만 내가 부러워하던 친구들처럼 된다고 해도
과연 행복할까?
아니다.
더 부자이고 이쁜 친구들은 널렸다.
그래서 더 잘난 친구들처럼 되고 나면
나는 행복해질까?
아니다.
더 잘난 친구들은 많다.
끝도 끝도 없다.
부러움이란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고 쓸데없는 감정이다.
이수현, <부러움>
그런 점에서 수현이는 단지 ‘돈이 많고 예쁜 친구’들만을 들먹이는 것이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타자他者라고도 하는)과의 비교에서 오는 감정을 ‘부러움’이라고 정확히 짚고 있다. 공부나 다른 비교 대상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부러움은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기에 ‘부러움’의 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끝도 끝도’(밑도 끝도 없다고 해야 적확할 지도) 것임을 아는 것이다. 더 잘나고 많이 가진 비교 대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수현이가 보기에는 ‘부러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고 쓸데없는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기서 부러워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시의 여운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주체가 아닌 남이 된다고 한들 ‘행복할까?’하고 질문을 던지고 그에 맞는 최선의 답을 찾는다는 다짐이라는 것을. 이처럼 생각이 깊은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창조하는 것은 어렵다.
시를 쓰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참 어렵다.
힘들게 쓰고 읽어보니 글은 형편없고 생소하다.
나는 많은 글을 실패하고 깨달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와 내 마음이 쓰는 것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라는 것이다.
누군가 보면 형편없는 나의 글이지만
그 글에서는 나의 가치와 많은 생각이
담아져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무엇보다 나의 가치와 나를 나 스스로
인정하고 격려해주면 그 누가 뭐라고
말해도 기분은 좋다.
이금비, <가치>
금비는 그런 연장선상에서 ‘가치’를 찾아냈다. 내 몸값이자 정신의 가치를 수많은 실패 속에서 찾아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창조하는’ 일이 ‘시를 쓰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그동안 나 스스로 얼마나 형편없고 생소한 글을 썼던가 하고 깨치게 된 것이다. 실패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진정 ‘내 이야기와 마음을 담지’ 못하고 남의 가치와 생각을 내 것인 양 글을 썼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훌륭한 재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와 생각이 들어가도록 열심히 묻고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누구 뭐라고 해도 기분 좋고 당당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빨리 지나가고 싶어도 빨리 지나갈 수 없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누구나 나이 들게 하고
행복했던 시간 불행했던 시간
누구나 이러한 시간은 한 번쯤 갖게 하는
공평한 시간.
김선용, <공평한 시간>
매일같이 시간을 세는 시계
사람들이 자나
사람이 노나
언제나 시간을 세는
시계
나도 닮고 싶다
그 시계
전영진, <시계>
그러니 선용이가 말한 ‘공평한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출발점에 서게 하는 듯하다. 저마다 다른 시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평소에 생각하다 그만둔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다. 공평하다는 말이 새삼 자신이 발견한 말처럼 다가오는 것도 오래 고민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공평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그러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생각하면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빨리 지나가고 싶어도 빨리 지나갈 수 없’는, 행불행을 떠나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가야 하는 인생의 진리인 것임을.
그 옆에서 영진이가 아랑곳없이 한 ‘시계’는 재미있고 웃음 나게 한다. 구두쇠마냥 한푼도 빼놓지 않고 시간을 ‘세고’ 있는 시계라니. 그런 시계를 닮고 싶다는 것은 저 ‘공평한 시간’을 깨우친 선용이에게 어떻게 들릴까 궁금하다. 진지한 시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재치 있는 시도 있는 법. 쉬는 시간에 ‘심오한 시’ 써도 돼요? 하고 물어본 친구가 영진이 아닐까?
세상에 믿을 거 하나도 없다.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초를 세는데 어기고 먼저 찾았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우리 모두의 비밀을 간직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기고 비밀을 다른 이에게 말했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친구가 나에게 돈을 맡겼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다 써버렸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나는 기업의 CEO다
어느 마을 주민들에게 복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 돈을 내가 모두 빼돌렸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나는 어느 기업의 CEO다.
나는 정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정부는 나를 배신하고 적폐 기업으로 몰았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나는 대통령이다.
나는 내 측근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
일해주길 믿고 있다.
어느 한적한 숲속
내 측근 중 한 명이 다른 측근들을 해고시켰다.
나는 그와 얘기를 하기 위해 바위 쪽으로 갔다.
조금 얘기를 하던 중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울면서 얘기했다.
그리고 나를 바위에서 밀쳤다.
나는 서서히 눈이 감긴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최정명,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
정명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 뉴스나 부모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신이 바라보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세상에 믿을 거 하나도 없다’는 냉소적인 결론은 그냥 들으면 배신의 세월을 겪는 화자의 것 같지만 여기서는 뒤바뀌어서 혼란을 준다. 노림수이다. 화자 스스로 술래인데 규칙을 어기고 비밀의 미덕마저 어기더니 기업의 총수인 자가 돈을 빼돌리고 한때 동지 관계였던 정부에 적폐 기업으로 몰렸다. 게다가 비운의 대통령을 암시하듯 마무리하며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이쯤 되면 모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알 것이다. 문제는 왜 화자를 스스로 규칙을 어기고 ‘서서히 눈을 감’는 자가 되려고 했는지다. 알아서 상상하고 찾아보라는 듯 마침표 아닌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이것마저 시의 매력이다.
맨땅 위에 덮여진 뜨겁고 단단한 이불
그 이불을 사이에 두고
두 가지 세상이 나뉘어졌다.
하나는 밝지만 딱딱한 바닥을 둔 세상
다른 세상은 어둡지만 촉촉한 바닥을 둔 세상
단단한 이불 사이에 두고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두 세상을
한 꽃이 마치 잭과 콩나무의 구름을 뚫는 줄기처럼
그 단단하디 단단하던 이불을 뚫고
두 세상을 이어줬다.
박지민, <길거리 꽃>
지민이가 또 다른 시의 미덕을 찾아냈다. ‘길거리 꽃’이란 제목으로 이 세상 모든 풀과 나무들까지 아우르는 매개자를 말하고 있다. 탄생과 죽음, 무한대로 이어지는 세상의 경계에 핀 ‘꽃’의 의미를 읽은 것이다. 꽃과 나무는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이어주는 존재임을, 그런 의미임을 말하고 있다. 그 의미를 ‘잭과 콩나무의 구름을 뚫는 줄기’로 비유할 줄 아는 지민이야말로 시의 맛을 아는 것이다. 흙두껍을 이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단단하디 단단하던 이불을 뚫고 두 세상을 이어’주는 시의 또 다른 매력을.
비 내리는 어느 새벽
우산도 우비도 없이 밖에 선다.
비는 구름의 눈물이라 하였나
이 눈물 아래서 목놓아 운다
가로등 불빛을 스포트라이트 삼아
관객 없는 무대에서 보내는
소리 없는 하나의 공연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러나 모두에게 전하는 하루
달 하나 뜬 어느 새벽
하늘 아래 잊혀지는 세상
이예은, <공백>
하루에 거의 한 편씩 쓴다는 예은이는 곧 시집을 내고 싶어 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흔히 쓰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시 안에서 말하듯 ‘관객 없는 무대’의 ‘소리 없는 공연’이라는 것으로 부려 쓰고 있다. 혼자 쓰고 있는 시란 것도 ‘우산도 우비도 없이’ 비를 맞는 것이고, 가로등 불빛 아래 혼자 삼키는 울음과도 같은 공연인 듯 보인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모두에게 전하는’ 하루이자 메시지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달 하나 뜬’ 새벽 하늘 아래 묻어두기까지 한다.
이제 진지한 시 뒤로 찾아온 조금 가볍게 순발력 있는 시들을 만나보자.
하루일과가 끝나고
방에 들어와
가방을 벗어 던진다.
침대에 풀썩 누워
눈을 감고
오늘 일과에 대해
되짚어 본다.
머리카락은 창밖의
노을빛에 물이 들고
밤은 붉은색으로
채워지네.
감성적인 가을 발라드
곡을 들으며 잠에
조금씩 조금씩
빠져간다.
○○○, <일과 후>
이름을 쓰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림까지 그려준 <일과 후>는 앞선 시와 달린 편안하게 읽힌다. 노래 가사처럼 흥얼거려도 될 만큼 감각을 살려 한껏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하루일과를 자신만의 말로 정리하며 편안함에 들 수 있는 것도 좋다. 지친 자신에게 휴식을 줄 줄 아는 것도 또 다른 격려이지 않을까.
밤 11시가 되고 내 동생은 잔다.
맡은 집안일도 다 안 하고
안 한 건 내가 한다.
저걸 동생이라고
아침이 되고 내 동생은 공부한다.
딱 봐도 숙제를 다 못한 거다.
저걸 동생이라고.
유환서, <동생>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일까? 환서의 동생이 미운 짓이 눈앞에 그대로 보이는 듯하다. 그걸 지켜보며 툴툴대고 있는 느낌. 그럼에도 ‘동생이니까 내가 봐준다’하고 한풀 접고 들어가는 형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시험 전날
휴대폰에 엄지 손가락 갖다 대는 거친 생각
바닥에 떨어진 교과서를 바라보는 불안한 눈빛
그걸 지켜보는 어머니
그 순간 나의 심장 박동과 동공지진은 전쟁과도 같은 치열함
걱정 마세요 어머니, 다 잘 될 거예요.
김한율, <시험 전날>
그런 점에서 한율이는 앞선 시에 나오는 동생이 여드름 난 나이로 커버린 듯하다. 시험 전날에도 휴대폰에 엄지를 갖다 대는 ‘거친 생각’이라고 한 것이나 바닥에 떨어뜨린 채 긴장을 삭히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며 걱정할 어머니에게 천연덕스럽게 “돈 워리, 비 해피!”하고 말하는 것이 전혀 밉지 않게 보인다. 비장하게 말한 듯하면서도 순간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마음이 결과를 떠나서 시를 한껏 재미있게 해주고 있다.
가장 예쁜 손은 무엇인가
광고에 나오는 손
캐어를 받은 손
내 눈에 가장 예쁜 손은
상처 있고 주름진
나의 아빠 손이 제일로 이쁘다.
우승균, <가장 예쁜 손>
밤이 되자 창문을 열어
고양이와 함께
수많은 별들을 보았다
수많은 별들 속에서
저 별은 나
오른쪽에 있는 별은 동생
왼쪽에 있는 별은 우리 집 고양이
위쪽에 있는 별은 아빠
아빠 별 옆에 있는 별은 엄마
수많은 별들 속에
우리 가족들이 있다 .
변상미, <가족>
이어지는 승균이의 시는 곧 아빠의 거친 손을 잡아보거나 그려볼 것을 기대하게 한다. 가족을 마음에 담고 있는 누구나 알 것이다.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 이런 마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상미의 <가족>도 앞선 <일과 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 좋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온화한 기운이 바로 가족이라는 별의 느낌에서 온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심장이 쫄깃쫄깃하고 손도 떨리는
긴장감 넘치는 라인전
마치 시험 전날 밤과 비슷한 기분이다.
그런 긴장감 넘치는 라인전에서
이기면 마치 시험에서 100점 맞은 듯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노희준, <솔킬>
게임
언제 해도 재미있는 게임
슬플 때, 화날 때, 짜증날 때 게임하면
기분 풀리지.
그러다 시험 공부 못해 시험을 망치곤 하지.
그래도 재미있는 게임
나의 친구 게임.
이재윤, <게임>
희준과 재윤이는 게임에 빠진 자신을 재미있게 잘 표현했다.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매번 게임이 시험을 망쳐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버릴 수는 없다는 단순한 열정을 그대로 썼다. 겸이의 <먹구름>의 결과로 끝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것임을 셋이 작당이라도 한 듯 썼다.
시험이 끝났다.
가슴이 후련하게 주말에 기분 좋게 게임한다.
월요일이 되면 시험 점수를 본다.
분명 끝났을 때나 주말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막상 점수를 보면 비가 주룩주룩
이번 시험도 먹구름이다.
윤겸, <먹구름>
어느날 갑자기 찾아든 바이러스 코로나
우리의 일상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나쁜 존재
하루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
김동호, <코로나>
동호의 <코로나>는 조금 아쉽다. 어디 가나 이 제목으로 쓰는데, 궐기대회에서 외치듯 한다고 해서 사라질 것도 아니어서 방향을 바꿔 코로나가 바꾼 변화와 관계에 대해서 썼더라면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에 이어 자신 안에 있는 말과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끌어내어 쓴 친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것으로도 우리가 문학이라는 나무 아래 있는 시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생각을 전해야 한다는 점을 마음에 새기게 해주었다.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철학자는 코로나 위기에 낸 책 『얼굴 없는 인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타는 집에서 쓰인 시는 그 어떤 말보다 정당하고 진실하다. 아무도 그 시를 들을 수 없고, 불길을 피하는 방법을 보장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나 우연히 귀 기울이는 이를 발견한다면, 이 무기력하고 설명할 수 없는 침울한 상황에서 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들을 기회가 없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고, 주변에서 불길이 계속해서 삼키고 있는 집에서 말하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단순한 ‘부러움’이 자신의 가치 안으로 스며들지 않는 것이라면 수현이 말처럼 그것은 그냥 ‘의미 없고 쓸데없는 감정’일 뿐이니 불타는 집에서마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미원중학교 아이들과 재발견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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