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흐르는 바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이종수
진실이 아니기에 진실이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실이 작가로서의 성공을 만들어주었다는 말을 해놓고도 헛갈린다. 진실이 아니기에 진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 꿈이 그렇고 옛 이야기가 그렇듯 있을 수 없는 일이 진실 너머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매력적으로 들리기에 해보았다.
어느 작가의 말을 빌려 감히 책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읽는 사람들 또한 이야기가 흐르는 바다에 떠 있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덧붙여본다. 책 이야기를 하자면 오랫동안 반복해서 권하는 책 한 권이 있다. 사기꾼의 전형적인 수법 같아 보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어찌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말한다는 말인가. 하긴 책을 꼭 읽어야만 말하는 것은 아니니, 이야기하는 동물이라는 말대로 왜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책에 결박되어 있는지 물어보아야 마땅하지 않나 싶다.
베스트셀러가 조작되고 어느 정도는 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본전도 뽑지 못하고 헌책이 되는 책의 운명을 생각하면 책이란 무조건 많이 팔려야 하고, 많이 읽혀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무조건 읽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분별한 책 읽기와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 없는 맹신과 현학이 판치는 세상이 될 가능성 또한 많기에 책은 왜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책 너머의 무엇을 보고 깨달아야 할 지가 책읽기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처럼.
무조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신념에만 끌려 책을 읽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개를 넘다가 낭떠러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서 피에르 바야르는 자신에게도 돌아가자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남을 이해하고 세상을 다시 보는 재미가 되어야 한다고.
피에르 바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닥친다.
독서의 의무,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에서 눈총 받는다는 두려움이 첫째란다.
그리고 정독해야 할 의무,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고, 책들에 대한 담론,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강박을 낳기에 두렵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독서의 의무에 대해서 얼마나 시달리고 사는가, 1년 국민독서율이 한 권도 안 된다는 통계처럼 도대체 책을 읽지 않고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고 윽박지르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동료집단이나 조직에서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이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은 생각보다 크다. 몇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 책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무엇을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관심 없이 무조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다독왕을 뽑는 현재의 독서 강요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피에르 바야르는 총체적인 시각을 강조한다. 책 안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려면 읽고자 하는 책과 또 다음에 읽어야 할 책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교양을 쌓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제목만으로도 휘둘려 전체를 다 읽어도 별 소용없는 감동만 남는, 캠페인식 독서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독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책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니라고 한다. 대충 훑어보고도 책의 깊은 본성과 교양을 살찌우는 책의 힘에 대해 파악하고 쓸데없이 세부적이기만 한 사실에 빠져 길을 잃고 오독하게 되는 위험을 피하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도 된다고 말한다. 교양을 쌓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책 속에 파묻히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독서지상주의에 희생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어떤 책 한 권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총체적인 시각으로 다른 모든 책들이 중요하다는 폭넓은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거리두기 또한 필요하다고.
모든 책에 대해 해당되는 것이기에 대처 요령에 대해 알아보자.
첫 번째, 부끄러워하지 말자. 책을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소통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과 그것의 보호 기능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모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지에 대한 것보다 자기의 진실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을 억압적으로 지배하여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외부의 진실에 억압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독서이기에 주체적인 독서가 우선인 것이다.
두 번째,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먼저 말한 대목이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모든 것을 알아가는 처음이 된다는 것. 부끄러움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어떤 복합적인 담론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책이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유동적인 오브제임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책이라는 거울을 통해 바로 우리 자신의 불확실성, 우리의 광기와 대면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면의 위험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작품들의 풍요로움에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삶이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여러 가지 곤란한 소통 상황들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를 꾸며내고 지어내듯이 독서 또한 기억의 점진적 소멸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책을 꾸며내는 것 또한 강조한다. 무의식이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언어의 열림이라는 특권 속에서 우리를 책과 결합시키는 관계들을 환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또한 큰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네 번째 대처요령으로 들고 있다. 죄책감 대신 긍정적인 시작으로 그 무게를 털어버리고 자신이 처한 구체적 상황과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여 한다고. 창조적인 풍요로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란다.
내 생각이 중요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작품과 거리 두기를 하면서 책과 씨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 터지게 싸워서 이기든 지든, 그 안에서 변화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작품과 자기 자신, 그 둘 사이의 다양한 접점이 중요하기에, 그래서 나는 이렇다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의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내 책을 써라. 자신의 텍스트를 가져라. 나는 스스로 창작의 주체다. 책을 읽어주기 위해 책을 고르는 일에 앞서 읽어주려고 하는 대상이 먼저라고 할 수 있듯이, 내가 왜 누구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인지 그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또 한 권의 책이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에 관한 담론은 자기 발견을 가능을 떠나 우리를 창조적 과정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피에르 바야르. 독서는 자신과 책이 맺는 일종의 협약이다. 갑과 을의 협약이 아닌 동등한 관계가 맺는 것이니 각각의 작품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그 내밀한 울림들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여라.
앞으로 그런 책들과 관계 맺고 변화되어 온 사실들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 밤을 거뜬히 보낼 수 있는, ‘셰에라자드’가 그랬듯이 살기 위해 천일 밤을 꾸며내고 지어내면서 명작이 된 것들이 바로 우리의 책, 당신 자신이 또 다른 얼굴이기에.
피에르 바야르의 또 다른 책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도 함께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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