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다리극장 ”
오래 전부터 꽃다리극장에 대해서 시를 쓰고 싶었다. 꽃과 나무를 파는 시장이 다리 아래 있어서 꽃다리라고 불렀고 그 다리를 건너 에로영화 전문 소극장이 바로 꽃다리극장이다. 딱 한 번 주뼛거리며 두 편 상영하는 에로영화를 본 적이 있고 모자이크처리된 그 너머의 세상 속에서 시네마천국을 꿈꾸기는 했지만.
이제 이름만 불러도 정겨운 꽃다리극장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열꽃처럼 남아있는 것은 있다. 어디 쉴 만한 찻집이 없어지고 푸지게 마실 수 있는 단골술집이 사라지 듯하며 이제는 저렇게 입에 궁글렸을 때 살가운 이름을 불러보지 못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비록 에로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었지만 꽃다리 건너 꽃다리극장을 떠올리며 비약을 해서라도 대포에서 꽃이 품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상영관이었던 중앙극장마저 사라지고 난 이 땅에는 복합이란 이름 아래 여러 개의 상영관을 가진 극장들이 있다. 시내에만 해도 다섯 개가 넘을 정도로 어디나 영화를 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댄다.
그러나 혼자이든 둘이든 여럿이든 여러 개의 상영관으로 흩어져 보는 영화들이 더이상 영화 같지만 않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느 영화이든 흥행과 결부되고 그럴 듯한 그래픽 처리를 거치며 판타지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왠지 허전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만족할 때까지 영화 보는 일이 행사가 되어버린 것일까.
극장들은 숨어버렸다. 꽃다리극장이 사라지고 중앙극장이 사라지듯, 도서관이 마을마다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가뭇없이 저 깊고 위장된 상술 속에 갇혀버렸다.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고 평판과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의해 감동마저 학습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기차표를 끊듯 반달 같은 유리창 너머 극장표를 구하던 때만큼 감동없는 영화의 연속이다. 영화의 영화시대라고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골라 보라고 하지만 어딘지 뒤통수를 얻어맞고 나온 듯한 느낌만 든다. 영화미학이 문학판을 뒤엎고 현실에서 스스로 감동시킬만 한 계기가 없고 자신의 삶에서 긴장된 한 씬을 얻어내지도 못하는 소비의 미학만이 있는 현실.
그것이 꽃다리극장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저 꽃다리극장이란 말만 들어도 관객과 영화, 또 무엇이 3요소인지 잊어버렸지만, 아하 시나리오? 그것들이 다리품 팔아서 만들던 영화가 사라진 느낌이기에 들먹인 것뿐이다.
아직도 꽃다리 건너에 꽃다리극장이 있고 혼자이든 둘이든 시네마천국에서 나오듯 잔잔한 영화에 마지막 필름이 올라가면서 울려퍼지던 음악을 되새기고 싶다. 복합센터인지 뭔지 쇼핑센터인지 하는 커다란 건물 속에 숨지 않고 소극장이라도 좋으니 극장이 극장 노릇을 하는, 간판이 올라가고 내려지는동안의 여유를 가지며 영화를 보고 싶다. 그것이 쥬네쓰, 키노피아, 하는 이름 말고 꽃다리극장이나 새여울 극장이란 이름으로 진정한 영화를 겪었으면 좋겠다.
쑥 캐다가 버드나무를 바라보다 (0) | 2021.09.07 |
---|---|
산수유 색시 (0) | 2021.09.07 |
냉이국 (0) | 2021.09.07 |
슬픈 얼굴, 혹은 마지막 거인 (0) | 2021.09.07 |
여우꼬리 (0) | 2021.09.0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