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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국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1. 9. 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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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이국 ”

냉이 캐는 삼대


냉이국

김치 없이는 밥맛이 없지만 김장김치 떨어지고 물릴 때가 되는 날. 심심해 하는 아이들과 설 쇠느라 삭신이 쑤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냉이를 캐러 나갔다. 처음에는 그냥 나왔다가 시장에 가신 어머니를 태우고 아이들 주전부리 싸들고 나갔더랬다.
"호미는 챙겼냐?"
"아니, 그냥 칼만 챙겼는데"
"냉이 캐려면 호미가 있어야지"
고슬고슬해질 만한 봄흙에 칼만 대면 쑥 뽑힐 것마냥 가볍게 생각해서일까. 아무튼 호미를 가지러 시골 사는 동생네 집에 들러 밭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호미를 들고 가까운 밭 언저리로 나갔다. 아이들은 풀린 또랑물만큼이나 부산스럽게 떠들어대고 곰곰히 와선중인 냉이를 생각하니 눈이 맑아진다.
"야, 고기들이다"
물 반 고기 반은 아니어도 아이들이 떠들어대니 갈짝갈짝 흐르는 또랑물이 불어나는 것 같다. 밭둑마다 꽃다지며 냉이들이 넘쳐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 반갑기만 했다.

요즘 냉이는 별로 냄새가 안 나는 것 같다. 한참 연애할 때 산성 밑에 있는 밭에서 냉이를 캔 적이 있는데 그때는 산에서 부는 바람이 냉이 냄새를 들큰하게 몰고 왔더랬다. 벌써 그 자리에서 냉이국을 끓여먹은 것처럼 배고파지기도 했더랬는데 봄 들판에 나와보니 냉이들은 숨 죽인듯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게 다 연애가 주는 콩깍지일까? 호미 아닌 손으로도 쑥쑥 뽑히는 냉이 긴 뿌리에 코를 갖다대면 절로 탄성이 흘러나오던 것도 연애가 주는 기운이었을까?
"이게 냉이야?"
어느새 아이들까지 밭둑에 달라붙어서 냉이를 캔다고 야단이다. 꽃다지를 뽑아놓고 냉이라고 하기도 하고 손톱 밑이 새까매지도록 냉이를 캐겠다고 부산하다. 봄흙이 고슬고슬하니 부드럽지만 냉이마다 깊이 감춘 뿌리는 오질나게 보인다. 잔뿌리에 달려나오는 흙을 털면 꼭 강아지가 젖은 몸을 터는 것 같고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 같다.
어느새 냉이가 비닐봉지 한 가득 찬다. 어머니 지난 자리는 폭탄 맞은 듯 듬성듬성하다. 어머니 속내는 집 마당에 조금이라도 좋은 흙을 뿌려주고 싶은 것이다. 말 안 해도 아는 터라 어머니 지난 자리를 다독여준다.(정말 집에 와서 냉이를 다듬고 잔뿌리까지 털고 나니 한 대야는 족히 되는 부드러운 흙맛으로 가득찬다.)


아이들도 제법 냉이와 씨름하더니 제몫을 다 한다. 그제서야 밭둑을 둘러본다. 옥수수리 뿌리가 곧추 선 밭이며 검은 비닐들이 뜯겨져 언덕 위 나뭇가지에 걸려 나부끼는 걸 보니 까마귀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배춧끔이 좋을 무렵 닥치는 대로 심었다가 산통 깨졌는지 뽑히지도 않고 얼었다 녹은 배추밭을 보며 어머니는 "저, 아까운 것들" 하며 쓰다듬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꽃다지며 냉이, 봄나무들은 무장무장 돋으며 상처를 덮는다. 아니 상처 옆에서 폴쎄 자라난 것들이겠지 싶어 코를 팽 하고 풀어본다.

저녁밥을 먹었다. 냉이국을 끓였는데 된장 때문인지 냉이맛이 제대로 감겨왔다. 냉이를 건져먹는데 거짓말 보태서 비닐 봉지 하나는 족히 먹은 것 같다. 게다가 막 무쳐낸 냉이까지 몇 접시를 먹었다. 이럴 때는 더디 오는 아내와 다른 식구들에게 전화를 해대고 싶다. 어서 빨리 와서 먹으라고, 나누자고.
야, 냉이를 한 소끔 먹고 나니 똥도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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