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리 5일장 ”
'없는 게 없다는 말' 시골 5일장에 오면 입버릇처럼 하게 된다.
그러면 아이들은 진짜 없는 게 없냐고, 차는? 냉장고는? 자전거는? 하며 반박을 한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뭐. 조영남의 화개장터에 나오는 것처럼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곡직한 뜻이니 칼장수가 '애덜은 가라'고 하는 것이지. 목욕탕 뜨거운 물에서 "어, 시원하다" 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 사는 세상 눈과는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먼 강원도 길을 다녀오다 들른 통리 5일장에는 진짜 없는 게 없었다. 태백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 - 지금이야 깨끗한 물이 흐르지만 그때는 시커먼 물이 흘러서 밖에 나오면 세상에 하얀 물도 있느냐고 하던 - 석탄과 사람을 실은 기차가 도계와 삼척으로 가는 길에서 얼크러지다가 스위치백식으로 천 고지를 한 번 틀어서 가기 전에 통리가 있다. 무슨 통천문이라도 되는 것마냥 하늘끝이든 땅속 깊이든 어딘가로 통할 것만 같은 그곳에 마치 삼도를 아우르는 장터처럼 큰 통리 5일장이 있다.
통리역을 에워싸고 둥그렇게 흘러가는 5일장은 그야말로 팔도 장삿꾼들이 다 모여드는 강물 같다. 멀리 동해, 삼척에서 오는 해산물부터 가까운 매봉산이나 영월에서 올라오는 나물이며 송이들까지 기본 밑반찬으로 깔리는 공산품을 데불고 흥청망청 떠드는 장.
좁은 장독대에서 말렸을 태양초를 오징어마냥 널어두고 온갖 말린 나물들이 어귀에서 손님들을 맞는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햇볕에 말려 두루뭉실 뭉쳐놓은 나물들은 그 자체가 어머니들 같다. 아버지들이야 그것 없이는 밥 못 먹는다고는 하면서 거 뜯어다 뭐 한다고 해종일 고생이냐고 타박했을 것이지만, 곤드레나물, 곰취, 미역취 소리만 들어도 마음은 벌써 둥싯한 매봉산 기슭을 타고 있을 어머니들 마음을 헤아리려면 먼 이야기. 뜨거운 햇살을 따라 쳐진 차양구름 이야기.
강물에 몸을 맡기듯 장터 깊숙이 들어간다. 바쁘게 끝과 끝을 향해 달리던 시속 8,90킬로의 마음을 주머니에 구겨놓지 않으면 대형마트에 길들여진 우리네 눈에는 더 들어올 게 없다. 사람을 찌를 듯 구부러진 운동복 상표가 더위에 조금은 늘어진 채 진짜처럼 나불거리고 진짜 송이가 맞는지 비싼 값과 한참을 저울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차피 저것들은 그렇고 그런 것들의 얼굴반찬일 뿐이니까, 알면서도 사주는 알싸한 돈 씀씀이가 빛나는 곳이라고 해두자.
으레 빠지지 않는 옷가게마다 뻥튀기 옷들이 즐비하다. 돌아가는 길 계곡에서 옷을 홀딱 젖은 아이를 위해 싸구려 옷 한 벌 사줄만 하다. 반바지 한 벌에 1,000원, 자칭 말 타는 폴로 뭐신가 하는 체크무늬 남방도 1,000원이니 이게 뻥튀기 옷이 아니고 무엇일까. 원단 값도 안 나오겠다고 부추기는 한 마디면 불타는 조개구이집 조개마냥 천 원짜리들이 춤을 춘다. 서로에게 옷을 넙죽넙죽 대보며 잘 어울린다고 한껏 흥을 돋워보기도 하면서 옷보퉁이 사이를 걷다 보면 마음만이라도 풍족해지는 기분이다. 동생은 언니에게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대주고, 언니는 동생에게 꽃무늬 보석이 달린 티셔츠 한 번로 서로를 추켜세우며 새삼 옷 앞에 나이들어 버린 세월을 가늠하거나 백화점표 옷 한 벌 생각해보는.
옷가게를 지나면 고등어, 문어, 꽁치들이 있다. 굵은 소금을 덮고 잠든 고등어나 꽁치들은 태백이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제철 과일만큼 친근한 이름이겠지만 먼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또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골목 골목까지 들어오는 생선 트럭에 실린 고등어와 대형마트 얼음 위 고등어가 무슨 학벌을 따지는 것마냥 파리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평등할 뿐이다.
봄철 문어를 살짝 데쳐서 먹는 맛을 최고라는 것을 아는 터라 한 마리 사고 싶지만 얼음 채운 스치로폼 상자에 가져갈 생각을 하면 까마득해서 눈요기만 실컷 한다. 튼실한 다리 한 쪽 울겅울겅 씹어 먹는 맛을 느끼는 것만으로 족할 수밖에.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니 길거리 악사가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검은 타이어와 한통속으로 고무옷을 입고 검은 고무줄에 좀약도 파는 거리의 악사, 빨간 바구니에 들어찬 지폐들을 보니 저이에게 짬뽕 한 그릇은 더이상 보여줄 게 없는 삶 그대로다. 어차피 사람들이 돌고 돌면서 지나칠 테니 올갱이처럼 거슬러 올라갈 필요없이 센 바위물살에 빨판을 대고 견디면 될 일. 셔터를 누르는 일이 죄스럽기까지 하다.
신발가게 아저씨는 연신 생고무를 자랑하며 신발 밑창을 들이댄다. 운동화에서 샌들, 등산화까지 생고무만 있으면 깎아지른 절벽이라도 거뜬하다고 거의 공중부양의 자세로 지나는 사람들을 붙든다. 역시 가까운 계곡에서 끈이 떨어져버린 샌들을 대신해서 누군가 신발을 사고 있다. 신발보다 싸다고 자랑하는 타이어 대리점 간판을 읽고 있는 듯하지만 추석이나 설날이면 발 붙일 곳 없이 미여터지던 식구들의 신발을 들여다 보듯이 정겹다. 막내 아이가 요즘 유행한다는 끈을 조이면 운동화가 되고 끈을 젖히면 끌신이 된다면 고무신발을 연신 가리키며 사 달라는 말은 아니라고 너스레를 떠는 뒤통수를 보고 있는 듯이.
벌써 식구들대로 한 보퉁이씩은 산 모양이다. 나물에 가다가 먹을 만두에 메밀부침, 김치전까지 살 때쯤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식구가 강원도에 살 때 폴싹 패버린 송이가닥쯤은 먹어봐서 그런지 8만원 한다는 온전한 송이가 한우 사태살처럼 눈에 찰 수밖에.
그러나 아무리 송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은 돈이다. 느타리에 싸리, 가지 버섯만으로도 족하다고 위안하며 애써 눈을 돌린다. 아랫집 세탁소 아저씨마냥 산으로 산으로 다니며 송이를 딸 줄 안다면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은 아는지 그 옆 건어물가게에 수북하게 쌓인 멸치들 위로 팔랑거리는 은박지들. 파리를 쫓으려고 은박지 조각을 매달아두어 그것이 바람을 타며 휘쩍휘쩍 요란한 빛을 내는 것이다. 비닐 장갑에 물을 채운 것보다 더 낫다며 호들갑을 떨던 아주머니들 말마따나 파리들 구경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파리들도 적응이 되면 저 시험대를 빠져다니다가 끝내는 파리채 세례를 맞겠지.
건어물을 지나니 연꽃 열매를 가지고 관찰학습을 할 수 있다는 문구를 세운 좌판이 나온다. 느닷없이 관찰학습용이라니 재미있다 생각하는데 그 옆에 달고나처럼 달착지근한 장난감들이 눈길을 끈다. 처음에는 한참을 지나쳤다가 돈을 추스려 돌아와 산 경주용 말 장난감. 작은 고무튜브를 누르면 진짜 말처럼 뒤다리를 움직여 달리는, 옛날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것도 있었는데 지금 것은 그럴듯한 기수가 엉거주춤 매달려 있는게 재미있다. 순전히 아이들 생각에 두 마리 샀다. 그러나 어른들도 손가락이 뻐근하도록 펌프질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지는 영원한 장난감의 속뜻을 읽을 수 있으리라.
지네에 호랑이뼈를 고아서 만들었다는 만병통치약을 파는 아저씨는 엄나무껍질이며 한약재를 파는 아저씨와 바둑 한 판에 빠졌다. 말린 지네를 보니 허리병이 도져서 고생하던 군대 시절 해안부대에서 밤마다 맞닥뜨렸던 지네들 생각이 난다. 어느날은 한 마리 잡아 말렸다가 가루를 내어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보다 더 허리병을 앓던 동기는 고양이를 한솥 삶아서 먹었던 기억까지 덤으로 떠올랐다. 지네에 호랑이뼈 연고를 파는 아저씨 머리가 유난히 희다. 팔리면 좋고 안 팔리면 어쩔 수 없다는 심드렁한 얼굴로 잠깐씩 관심을 두는 손님들이 흐트려놓은 물건들을 고쳐놓고 다시 바둑 삼매경이 빠졌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듯 통리장을 돌아 처음 자리에 서니 그곳에는 만물상이 있다. 그야말로 공구에서 전자제품에 돋보기까지 없는게 없다. 100와트를 자랑하는 포터블 라디오 카셋트를 어깨에 들쳐메고 자랑하듯 다니던 시절은 지났지만 이곳에서는 아직도 대표선수마냥 일본산 소니와 철자도 복잡한 카셋트가 있다. 어리숙한 아저씨가 작은 카세트를 샀다가 뭐가 안 되는지 주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검은 비닐 속에서 꺼내는 걸 보니 지금 세대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소형 카세트다. 여러 단추를 눌러보고 성능을 의심하는 것인지 집에 가면 뭔 코드가 안 맞느니 하면서 궁시렁거리니 주인은 대표선수로 세워놓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소니 아니냐고 일본산 정품임을 연신 강조한다. 금방 뒤를 보면 알 일이지만 그것까지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이런 소리에는 솔깃해서 자꾸만 귀가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작은 카셋트를 산 아저씨가 건전지 타령을 하니 주인이 전기코드를 뱀 다루듯 하며 덤으로 끼워준다. 어쨌거나 작은 카셋트를 산 아저씨는 만족한 얼굴이다.
한켠에는 적나라한 체위를 드러낸 비디오들까지 있다. 왜 저 여자는 당당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까. 저것을 사다가 틀면 혹시 진짜 자랑스런 우리 나라 비경들만 나오지는 않을까. 시골장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체위들이 무슨 교통위반 딱지 같다. SEX라는 글자가 저들이 벗어버린 속옷 상표처럼 보인다. 길거리표에 온갖 현란한 대중성에 마침표를 찍는 듯 느껴지는 저 만물상 앞에서 통리 5일장의 얼굴을 본다. 그 앞 새장 속에 앵무새, 십자매, 닭들과 함께 진돗개와 공작새까지 파는 가게까지 곁들여서 뜨거운 고원의 햇살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통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통리 5일장. 올갱이를 잡으러 저녁밥을 해놓기가 무섭게 물가로 나가는 어머니에게 그대로 머리에 쓰는 전등 하나를 사서 가는 마음이 저녁놀만큼이나 몽실거리는 통리 5일장에는 진짜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어서 멀리 돌아가는 길이 오붓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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