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백만 부 판매를 넘나들던 그림책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강연을 나왔다가 도서관에 들른 탓에 호사를 누렸다(이럴 때 그림책 좋아하는 동아리 분들이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한 번 강의 나오면 거의 하루가 다 지나니 참."
유명세 덕분에 거의 전국구로 강의를 다니는 바람에 최근에는 차까지 임대를 한 모양인데, 학교나 도서관 강의가 으레 그렇듯 작가가 작업을 포기하고 오는 비용까지 줄 수는 없는 만큼 따지고 들 만한 것들이 많다. 시간당 얼마까지 정해져 있어서 따로 기름값이나 교통비를 챙겨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두 시간 강의 준비하는 전후를 생각하면 가혹하달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강사나 연예인은 소속사가 있어서 몇 시간 강의나 공연만 해도 엄청나게 비싼데 작가는 아무리 유명해도 시간당 강사비로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불러주니 안 갈 수 없고 열심히 다니는데 문제는 나같이 그림책을 자주 내지 못하는 작가는 이제 앞날이 막막해요."
백만 부를 자랑하는 그림책도 사실 작가가 그림의 소재부터 작업 기간까지 꽤 오래 걸렸기 때문에 1년에 몇 권씩 나오는 인기 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다. 다달이 인세를 계산해 주던 것이 이제는 분기별을 넘어 상반기, 하반기로 정산이 될 지경이 되었단다. 그렇게 된 데에는 도서관 탓도 크단다. 그냥 흘려들으면 모순이긴 하다. 도서관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유명 작가에게는 좋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들어보니 사정이 다르다. 도서관이 많이 생기는 만큼 책을 사는 사람이 줄어드는 바람에 더 이상 수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만큼 아이들에게 읽어주거나 공부하기 위해 그림책을 사는 경우가 줄어두니 이 그림책 작가만큼 유명한 경우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무료로 책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 그림책은 물론 책은 사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거나 얻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서관이 많이 생기고 복지 개념으로 책을 사서 무료로 주는 곳이 생기니 그림책이 더는 안 나가고..."
백만 부는 어제의 일인 된 셈이다. 그 수치도 사실상 누적된 것이니 다달이 그림책을 양산하는 작가가 되든가 아니면 강의나 다른 기획을 해야 버틸 수 있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앞으로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권장되고 도서관 구입 목록 1순위가 된다 해도 인세로 계산되는 작가의 창작과 그 수고로움이 생계와 직결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서점에서 책이 팔리고 도서관마다 새로이 구입하여야만 다음 그림책을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이 생기는 법이니 작가의 하소연이 가볍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도서관도 예전과 달리 지원이 늘다 보니 그림책도 몇 권씩 보유하게 되고 시리즈별로 다 갖고 있으니 더 이상 그림책을 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예요."
작가로서는 고민의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이 이른바 고인물이어서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재구매가 어렵다는 데도 문제다. 한 번 갖추고 나면 재구입이 안 되니 작가로서는 그만큼 잊혀지는 것일까.
서점도 마찬가지다. 한 작가의 책만이 아니라 다양한 작가의 책이 심심찮게 팔려야 출판사와 작가도 살 수 있는 법인데 비단 작가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곳이 고여버리면 일파만파로 파국이 되는 격이다. 동네 서점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한 작가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인터넷 서점이 파격적인 할인 상술로 작가의 책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상 또다른 선택의 기회를 박탈해버리듯 모든 문제는 하나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치단체나 기관, 지역에서 작가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가. 그렇지 않다. 역시 시간당 얼마의 가치로 창작 정신과 결과물을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창작 행위에 대한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번듯한 건물을 짓고 그 안에 몇 시간의 가치로 우겨넣으며 충분히 지원하고 있다고 떠벌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오는 이용자들에게 좋아하는 그림책이나 책이 있으면 빌려보는 만큼 한 권씩은 사서 자신의 문고를 채우는 것이 좋지 않냐고 권하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책값이 워낙 비싸서 빌려봐도 되는 걸요."이다. 합리적인 소비라는 것이다. 좋은 책은 빌려보는 것과 아울러 사서 읽고 다시 공유하는 방법도 합리적인 소비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단 내가 우선적으로 지불할 수 있느냐의 가치만 따지고 본다. 정신적으로 누리는 가치보다 물질적으로 소유하면서 돈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위신을 세울 수 있는 교환가치로만 여기는 것이다.
가혹한 일이다. 소비를 줄이는 것이 어찌 현명하게 모든 부분에서 이루어질까 싶냐만은 이렇게 양질의 문화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책에 조준이 되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다른 방안으로 도서관마다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좋은 강연을 듣고 책도 소비해 주는 것을 권하고도 있으나 책을 구입하라고 하면 부담을 가져 오지 않는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서관에서 책을 팔아야 할까?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서점에서 책을 사서 보고 도서관에 반납하는 방식으로 책 소비를 늘리는 것부터 따져보아야 할까? 서점과 도서관이 상생 협약을 맺어 책 지원금에 한해서 주기적으로 책을 구입해 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동네 서점과 작은도서관, 공공도서관이 또 다른 한 축인 작가들과 상생하는 방안을 만들어 보도록 애쓰는 길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좋은 작가, 좋은 책이 나오기 어렵다. 작가가 무조건 책만 많이 팔아 생계를 해결하는 방안에만 몰두한다고 볼 것이 아니라 팔리는 만큼 사회적인 재능기부(무조건 재능기부의 형태가 아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환 구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도서관이 책의 무덤이 아니라 허브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작가는 책으로 대표되지만 휴먼라이브러리이기도 하기에 책과 사람이 끊임없이 흘러들고 흘러나가는 도서관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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