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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새책 소식

by 참도깨비 2023. 6. 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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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초 두 권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1940년대 후반의 한국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두 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1947년은 미국 정책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냉전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본격화했을 뿐 아니라 딘 애치슨은 그 독트린을 한국을 방어하는 데까지 확장하려고 했다. 나는 이것을 1947년 1월에 작성된 다른 자료에 스테이플러로 첨부된 수기 메모에서 처음 봤는데, 거기서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것을 일본 경제와 연결시키라고 애치슨에게 지시했다. 이것은 완전히 수정된 일본 정책의 일부였는데, 일본 인접 국가들의 산업을 복구하는 방침을 철회하고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력을 박탈하되 경제적 거점으로 다시 복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었다(이것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77년 나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었는데, 한 직원이 큰 손수레 가득 골판지 상자를 싣고 가면서 내게 그 안에 든 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242 기록군Record Group’인 ‘노획 문서’였는데, 1950년 가을 미군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수집한 출판물과 극비 자료의 보고였다. 갑자기 내 연구 주제가 내 앞에 펼쳐졌다. 이를테면 1940년대에 발간된 『노동신문』은 북한 바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사본이 없었지만, 이 문서에는 그 공식 기관지가 거의 다 들어 있었다. 2년 넘게 이 자료들을 읽으면서 북한에 대한 내 이해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1권에서는 기존의 미국 비밀문서와 1940년대 후반 남한에서 간행된 자료를 주로 이용했지만 이제 나는 어떤 기록 보존 담당자도 볼 수 없었던—그들은 그 언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CIA와 그 밖의 정부 기관이 오랫동안 이 문서들을 간헐적으로 삭제한 정황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것은 1951년의 자료를 손에 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글을 쓴 미국 학자들이 대부분 한국어를 읽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은 242 기록군에 흥미로운 것이 있느냐고 내게 뻔뻔스레 묻기까지 했다. 당신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두 가지 신념은 내가 이 책들을 쓸 때보다 더 깊어졌다. 첫째는 특히 군대와 경찰에서 일본에 협력한 거의 모든 한국인을 다시 고용하기로 한 미군정의 결정이 무엇보다 가장 압도적이고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1945년 한국인 항일 유격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대좌였던 김석원이 1949년 여름 내내 38도선의 지휘관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북한 지도부는 거의 모두 항일 유격대원 출신이었다. 또는 이것을 생각해보라. 일본군 장교이자 서로 좋은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로 졸업했다. 그들은 박정희와 김재규다. 그 뒤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협력했던 장교들을 다시 채용하면서 되풀이한 이 근본적인 오판은 식민지에 반대한 투쟁을 거쳐 건국한 미국이 20세기 중반 무렵 그런 지향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신념은, 1945년에 등장한 인민위원회는 매우 중요했지만 한국전쟁 관련 문헌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돼왔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좀더 깊이 인민위원회를 연구하면서,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3년 동안 평화롭게 존속했지만 섬 인구의 적어도 10퍼센트가 끔찍하게 학살된 수치스런 유혈사태로 끝났고 그 학살은 미국인과 앞서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누구나 곧 북한이 한국인 대다수가 반역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
를 확보할 방법을 찾으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2권을 완성하고 몇 년 뒤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가 기밀 해제됐다. 내가 이 문서의 내용을 통찰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상당히 빠르게 쏟아졌다. 그 문서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소련이 더 강력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줬다. 242 기록군을 토대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북한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잘못이었다. 북한이 그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스탈린은 너무나 엄청난 인물이었다. 소련이 이 전쟁에 참전하려 하지 않았다는 내 주장은 옳았다. 내가 살펴본 정보자료들에 따르면 개전 이후 소련 잠수함들은 한국 해역에서 신속히 퇴각했고, 조선인민군 군사 고문들은 철수하거나 귀국했으며, 1950년 후반 북한이 가장 큰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스탈린은 그들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중국이 참전한 부분적인 이유는 동북부의 자국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이르면 1920년대부터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수만 명의 한국인에게 보답하는 데 있었다고 나는 주장했다. 중국 학자들이 많은 새 문서를 바탕으로 한국전쟁과 관련된 뛰어난 저서를 여럿 냈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판단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음모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음모에 대한 많은 환상을 갖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보듯 그것을 입증할 사실은 거의 없다. 1950년 6월 마지막 주에 문서로 작성된 몇 가지 음모가 교차됐기 때문에 독자들은, 특히 2권을 읽으면서, 많은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서보관소에서 내가 본 것과 같은 자료를 분석한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논저에서 그 자료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이를테면 장제스를 실각시키려는 미국의 쿠데타 계획—나는 그 증거들이 이런저런 문서보관소에서 묵혀지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증거가 있는 한 특정한 이야기를 따르기로 했다. 이 방법도 특정한 문서를 기밀 해제하지 않는 미국 당국 때문에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작가가 바라는 탐구심 있는 독자들에게 봉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나는 1945년 이후 이 유서 깊은 나라를 경솔하고 분별없이 분단시킨 미국의 고위 지도자들(당시 존 J. 매클로이보다 더 ‘고위’ 인사는 없었다)이 촉발한 분열에 나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생산된 미 국무부의 많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유격대 출신의 한국인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에 들어갔고, 이제 그들은 그런 유격대의 후계자들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평양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이것보다 실패한 정책은 생각하기 어렵고 해결책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을 분단시킨 것이 내 조국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책임감을 느꼈는데, 내 개인적 견해가 어떻든 남한이나 북한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면밀한 역사적 탐구가 두 한국이 누려야 할 화해로 가는 최선의 처방이자 방법이라 믿고 있고 늘 그렇게 믿어왔다. 진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 경우 진실은 주요 문서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 역사의 배우들은 자신이 대중에게 한 말과 곧잘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내 ‘견해’를 자주 묻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책에서 이전의 기밀문서에 대한 내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언젠가 누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권리가 있지만 자신의 견해를 사실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준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면서 1권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어를 배워 읽을 수 없었다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두 책 모두 한국어로 충실히 번역돼 한국에서 읽을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

 

- 한국어판 서문 

 

1981년 1권이 출간되고 1990년 2권 출간 이후 34년 만에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역작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한국전쟁(6.25전쟁에 국한시키기 앞서 한국전쟁은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중요한 전쟁이기도 했다)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중요한 저작이다. 우리가 전쟁의 고리를 끊고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연구를 했어야 마땅한 데도 여전히 분단이 현재진행형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살아있는 분열의 씨앗이기도 하여 한국전쟁의 기원을 부루스 커밍스라는 학자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는 많은 양의 기록물들을 폐기하거나 소실하기도 하여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는 '그 내재적 동학과 전쟁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탐구보다는 “범인을 찾는 식”으로 전쟁 발발의 책임 소재를 밝히기에 집착해왔던 점, 미국·소련의 기밀문서와 북한 측 노획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대략적으로 큰 그림이 나오'기도 했다는 점과 커밍스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소련 문서들을 통해 전쟁 전 김일성의 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가 있었다는 점을 인지한 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김일성이 정권 초기단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이 필요했다는 점이 공감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선전 포고가 없는 전쟁, 승패가 없는 전쟁,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 악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시켜 민족사적 비극을 극대화시킨 전쟁, 이데올로기적 결전(냉전)을 가속화시킨 전쟁, 무엇보다도 개전의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이고, 전쟁의 상대방인 북한은 이제 핵무장을 완성했고, 변함없이 한반도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고, 38선 인근의 작은 도발도 톱뉴스가 되는 사회에서 이 전쟁은 결코 역사가 될 수 없다. 여전히 우리 현실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현안이다.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분단체제라는 말이 유효한 땅에서 한국전쟁은 겉으로 드러난 전투 양상과 개전의 책임론에 가려진 긴 시간 동안의 사회동학 문제가 다시 전면에 올라올 필요가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바로 이 측면에서의 탁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 그렇지만 북한의 남침에 이의를 제기한 부르스 커밍스의 학설을 재조명해야 하는 중대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미국책임론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돌아가 분단체제를 다시 연구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분단체제의 출발점이었던 미 군정과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 정치경제적으로 패권을 추구하기 위한 미국의 민족국가의 통제와 전략,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해결하지 못한 민족 현실이 쌓여 만든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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