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 평론가는 임곤택 시의 화자들이 처해 있는 '길'이 '삶의 불확정적인 상태에 대한 공간적 표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다니는 존재여서 '좌절, 절망, 슬픔' 등의 상투적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술을 마시고 난 새벽에 깨어 연주하는(실제 기타 연주자이기도 하다) 곡처럼 아련하다.
소리 지르는 아이를 참다가 참다가
그 엄마에게 항의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눈이 내렸고 눈을 뭉쳤고 벽을 맞혔다.
말을 그치자 말이 없다 잠깐 뜨겁고 오래 차갑다.
생면부지의 열애는 늘 이렇다.
주머니에 손 넣어 동전을 짤그락거린다.
눈이 계속 내린다.
벽에는 내가 던진 눈 뭉치가 뭉개져 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그러지 말걸> 전문
뒤늦은 후회지만 '생면부지'의 열애이므로 자책이라기보다 한숨에 가깝다. 그렇게 다시 고쳐 먹는 마음이 떠다니는 일상의 시이기도 하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 같지만 그 안에서 샘솟는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여 그의 시선을 좇아가다 보면 뭉클해진다. <죄 없이 다음 없이>란 시집 제목이 그가 갇혀있으면도 뚫려 있는 형편과 공간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듯해서 그가 믿는 무엇인가를 지지하게 된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름은 끝났습니다
문 앞에 배달된 상자 하나
빈 상자는 아니군요
아버지는 평생의 밭뙈기 전부를
제게 남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가장 게으른 아들이니까요
그곳엔 그가 묻혔으니까요
하얀 침대 곁에서
사과를 깎고 김밥을 나눠 먹고
우리는 서로 다른 땅을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닌 곳
상자 위엔 무엇이 써 있군요
이만큼 알고 나면
그만큼 무서울 테니
망설입니다
달리는 자동차 닫힌 창 위에
행인들이 비칩니다
사람의 어깨로는 가릴 수 없는
다른 것이 되는
숨어 자라는
아무리 걸어도 해지지 않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겠습니다.
<식욕>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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