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이 그림책
"아빠, 내 그림책 어디 있어요?"
아침부터 한길이가 자기 그림책을 찾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이 다 자기 그림책이나 다름없습니다. 한참 공책에다 베껴 쓰던 <병원소동>이나 잠자기 앞서 읽었던 그림책을 찾는 줄 알고 자꾸 어떤 그림책이냐고 물으니 한사코 자기 그림책이라고 합니다.
"아빠, 어젯밤에 만든 그림책 말하는 거예요"
아내가 살짝 귀뜸해주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어젯밤에 그림책을 만든다고 하던게 떠오르더군요. 처음부터 그림책을 만들려고 해서 시작한 것은 아닌데 그림책이 되어버린 재미있는 그림책입니다. 어제 한길이 가방에 있는 어린이집 수첩에 나온 대로 엄마, 아빠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시작된 일이지요. 직업이란 말을 전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을 이야기한 것인데 웃지 못할 이야기가 숨어있더군요.
"한길아. 엄마 직업은, 아니 뭐라고 했어?"
"엄마는 젖을 짜고..."
뒤로 발랑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럼, 아빠는 뭐라고 했어?"
"아빠는 컴퓨터로 일을 한다고 했어요"
할머니한테서 전화 올 때 마침 엄마가 젖을 짜고 있고 내가 컴퓨터에 앉아있는 일이 많다 보니 그대로 이야기한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엄마, 아빠는 뭐해?" 하고 물어보면 대답한다는게 자연스럽게 우리 직업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사실 아내가 쉴 틈도 없이 젖을 짜는 것은 나중에 한울이를 할머니네 집에 보낼 때를 위한 것인데 그걸 직업이라니.
아무튼 뜬금없이 젖을 짜는 일이 직업이 되어버린 아내가 발끈해서 다시 고쳐줄 수밖에요. 요즘 한참 나이를 가지고 많으니 적으니(원래 말투는 크고 작다고 하지만) 따지고 무슨 일을 하는지 호기심이 났으니 바로 알려줘야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한길이가 처음으로 그림책이라고 만든다고 대든 것이지요. 처음에는 으레 하는 낙서거니 했더니 꼼꼼하게도 종이에 적는 모양새가 꽤 진지해 보이더군요.
"한길이는 무슨 뜻이에요?"
"큰 길이란 뜻이지"
"그러면 한울이는 무슨 뜻이에요?"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까지 들먹이더니 내 이름까지 물어보기에 난감하더군요. 아무튼 그렇게 시작해서 만든 그림책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656
이한길 그림책
657
이상 표지
한길이 그림책
우리 아빠는 책이 있는 글터(왜 동네 서점 이름을 끌어다 썼는지 모르겠습니다)입니다
우리 아빠는 도서관장입니다.
우리 아빠는 모든 책을 가져가게 합니다.
우리 아빠는 멋진 사람입니다
한길이 그림책
우리 엄마는 목욕도 시켜주고 아기는 엄마 품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끝
다 합쳐서 네 쪽밖에 안 되는 그림 없는 그림책이지만 꼼꼼하게 자기 손으로 만든 그림책이라 갸륵해 보이더군요. 엄마는 엄마 이야기에 나는 모든 책을 가져가게 한다는 도서관 내용에 쏙 빠려들 수밖에 없더군요. 아주 짧지만 해야 할 말은 다 집어넣은 듯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 그림책을 찾은 것이지요. 그것도 새로 나온 책을 늘어놓는 진열대에 버젓히 놓아던 그림책을 건드렸으니 찾았던 것이지요.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이 빌려가라고 놓았다는 말에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밖에요. 한길이가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도서관 살림살이가 펴겠지요?
2003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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