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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안 오는 사이에 자동차는 중앙탑 소풍을 갔다

도깨비 일기

by 참도깨비 2021. 8. 1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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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안 오는 사이에 자동차는 중앙탑 소풍을 갔다

 

 

 

한울이는 엄마 젖을 달게 먹고 자는데 한길이는 텔레비전 시청권, 게임권과 씨름하다가 공부나 한다고 돌아앉았습니다. 투니버스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아내가 투니버스 편성표에서 골라서 보게 하자고 해서 잠정 노사협정에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컴퓨터에서 인터넷 창을 감춰놓자고 우리끼리 쑥덕거린 걸 듣고 "컴퓨터가 인터넷을 잡아먹었다"고 공갈포를 던지는 한길이와 이래저래 협상 중입니다.


"투니버스를 보니까 한길이가 팔과 다리를 어쩔 줄 모르고 친구들까지 때릴 수 있으니까 1학년이 되면 보자, ?"
"그래, 전에는 한길이가 그림책도 잘 읽고 재미난 노래도 잘 부르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싸워라, 나가자'하는 노래만 부르니까 한길이가 아닌 것 같아"


아내와 둘이서 한길이를 앉혀놓고 집중포화를 던지니 한길이 기세가 조금은 꺾인 듯 합니다. 1학년이라는 말에 잔뜩 고무되었는지 다시는 컴퓨터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많은 부분을 양보해서 허전한지 공부나 한다고 돌아앉더니 수학 기차 한다고 손가락을 세워들고 덧셈, 뺄셈을 합니다. 제멋대로 더하고 빼고 다시 곱하면서 외계인 메시지 같은 기호들을 만들더니 제법 손가락셈을 터득한 모양입니다. 그러다 지쳐 한울이 젖을 짜고 있는 엄마를 호달굽니다.

오늘 협상이 이루어지면 소풍 가자던 약속이 생각나서 나가렸더니 아침부터 비가 와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림책에서 본 대로 '비 안 오는 셈 치고 소풍 가자'는 말까지 나와서 차 타고 한 바퀴 돌까 싶은데 아내가 기차 타고 삼탄에나 다녀오라고 합니다. 차를 몰고 갈 셈으로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더니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며 기차 타고 다녀오라고 합니다. 한길이는 벌써 기차  시간까지 적어가며 날 밖으로 몰아세웁니다.

 

정작 빗길에 삼탄까지 다녀오려니 내키지가 않아 잠자는 한울이와 아내를 두고 놀이터를 거쳐 중앙탑과 남한강 물 구경에 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중앙탑(탑평리 7층 석탑)에 박물관을 끼워서 보면서 아는 체를 하더니 기차 이야기는 잊었나 싶었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 제 나름의 일기를 쓴다고 스케치북에 이런 글을 남겼더군요. 어린이집에서 글쓰기 연습을 할 때는 신경질을 부리더니 제멋대로 쓰는 글씨에는 힘이 넘치고 한길이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기차는() 안 오는 사이에 자동차는 중앙탑 소풍을 갔다' 9/7
 '아빠가 기차는 650분에 온다고 그랬다'

무슨 소설 제목 같기도 하지만 풀어보면 그렇더군요. 기다리고 타고 싶어하던 기차를 못 타고 중앙탑 소풍을 다녀왔다는 뜻과 아빠가 핑곗거리로 삼탄에는 저녁에나 기차가 선다고 했다는 말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져 있는 듯했습니다.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에 한길이 마음이 오롯이 남아있었던 셈이었지요.

 

200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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