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대로 있다
음성 한일중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
비 오는 아침 2교시에 시 이야기를 한다. 나른한 오후가 아니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살짝 걱정이 앞서다가 긴장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음성 한일중학교 2학년 열댓 명과 시 이야기를 한다. 국어 시간 한쪽을 떼어 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교과서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최대한 아이들의 마음이 담긴 시까지 얻어내야 하는 터라 살짝 긴장이 된다. 두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예비 종에 쉬는 시간을 감안하면 짧기 때문에 첫 시간은 시 이해를 돕는 이야기를 재미있고 간결하게 해야 한다. 시 한 편 더 읽어주려고 했다가 어김없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아이들의 한숨 소리에 묻히게 되니 계산을 잘 해야만 한다.
시는 어렵지 않다. 자유롭고 괴상망측하면서도 친절하게 설명하려 들면 망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침 가방에 들어가 있는 김개미 시집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걷는사람)처럼 모두의 예상을 상상력으로 넘쳐난다는 말로 시작한다. 시집을 소개할 시간은 없지만 여기서 ‘악마’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왜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물어도 보면서.
먼저 시 한 편을 읽어주고 시작했다.
용머리에
괭이눈
노루귀에
까치수염,
한 손엔 도둑놈의갈고리
한 손에 꽃방망이,
며느리배꼽에 처녀치마 두르고
범꼬리에 꿩의다리,
까치발에 매발톱
을 단
동물은?
이종수, <나는 누구일까요?>
“신화에 나오는 동물?”
“괴물”
“로봇”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읽는 사람이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는 데에는 공감하는 듯 대답이 쏟아진다. 친절하게 설명하고 대답해 줄 수 있다기보다 각자 알아서 생각하고 대답을 찾게 만드는 것이 시다, 그러니 앞의 시집 제목처럼 어디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 좋다고 말하니, 아이들도 시란 틀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지는 느낌이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악마가 되었다!”
“악마는 신화에 나오는 그리핀(사자 다리에 독수리의 날개와 머리를 가진) 같을 수도 있다!”
나른한 오후가 아니라 그런지 거의 추임새에 가까운 대답들이 시원하게 나온다. 우리가 흔히 시라고 배운 ‘아, 가을 하늘은 에메랄드 빛’ 같은 시에서 벗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 저 너머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에 공감하는 것인지 마구 쏟아진다. 이런 분위기 좋다. 그러면 그리핀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덧붙여 물으니,
“하늘과 땅을 대표하는 동물의 합체?”
“하늘과 땅의 평등?”
경쟁하듯 자기만의 생각이 쏟아져서 뻑뻑할 뻔했던 시 이야기에 기름칠을 한 것 같이 술술 풀려나간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직접 쓴 시. 몇 편을 더 읽어주고 가릴 것 없이 거침없이 지금 생각하고 있거나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써보기로 했다.
그녀를 잡을까?
고민하다 놓칠까봐 무섭다.
그녀에게 내 맘을 말할까?
말했다가 우리 사이가 멀어질까 무섭다.
그녀도 날 좋아할까?
생각한다 다시, 또 다시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
“사랑했다.”
여한서, <그녀에게>
시를 읽어주는 시간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귀신 같은(?) 아이들은 눈빛만 보고도 누가 쓴 것인지 알기에 공개한다.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 빼고는 서로 공감하고 나누는 차원에서 밝힌다. 연애편지와도 같은 시라도 그 마음을 어떻게든 전달해야 하는 것이니 맨 먼저 읽기로 한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며 고치고 다듬긴 했으나 혼자만 두고 읽기에는 아까운 이야기다. 둘 사이는 진전이 있는 것일까, 혼자만 저러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연애박사라도 있다면 물어보는 것도 좋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그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고 흔쾌히 받아들이게 하려면 기술이 필요한 법이니 대놓고 말해야 한다. 진심이 무엇인지.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서 눈동자마저 떨리는 기분으로 앉아있는 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묻는다.
몇 번이나 망설였을까? 가슴이 터질 지경일 것이다. 편지라도 써보지 그랬냐고 하기엔 아직 마음에만 품고 있어서 거의 짓물러질 것 같다. 그만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대책 없이 찾아온다. 어느 날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치듯이 시의 문장처럼 찾아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풀어야 할까? 왜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진심 어린 느낌이 통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머뭇거리고만 있다. 그냥 말했다가는 그나마 편했던 사이가 어색하게 틀어질 수 있다. 소문만 무성할 수도 있다. 마지막 행에서의 고백은 어디까지나 혼잣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좋아하는 것을 떠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상남자식으로 하다니! “사랑했다”이니 이별의 방백인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정교해야 하고 곱씹어 보아야만 한다. 일단 이렇게 벌여놓았으니 세심하게 다음 시에서 고치고 다듬을 것인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사러 갔는데 앞에 뽑기 기계가 있었다.
나는 천 원짜리를 오백 원짜리로 바꿔와서 뽑았다.
엄청나게 이쁜 반지가 나왔다.
한 번 더 했다. 1개가 더 나왔다.
나는 태정이와 커플링을 할 생각에 신이 났다.
잠을 자고 났다. 책상에는 한 개밖에 없어서 짜증이 났다.
그래서 오늘 한 번 더 뽑아서 내일 태정이 손에 끼워 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태정아, 사랑해.
이수환, <뽑기>
수환이의 <뽑기>는 앞의 시를 우당탕탕 뒤집어놓는 시다. “사랑은 이렇게 직진하는 거야!”하고 대놓고 말하듯이 호기롭게. 그러나 마무리는 마음속으로 외쳤다니! 앞에서는 아주 시원하게 뽑았다가 흐물흐물 뭉개버린 듯하다. 안쓰럽게 마음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아이들이 실실 웃는다. 읽어줄 때는 “○○아, 사랑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서를 비롯하여 몇몇 아이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보아 두 편의 시가 나름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에 빠져들고 스며들 땐
순식간에 몸에 배인다
그것이 끝나면 향들이
지독하게 남아 맴돈다.
김태정, <향수>
수환이의 시에 등장하는 태정이는 앞자리에 앉은 태정이었다. 시커먼 남자들만 있는 중학교다운 몇초만의 설렘이라고 하자니 진한 아쉬움이 끼쳐왔다. 시를 핑계 삼아 놀이를 한 셈이지만 잠깐이라도 즐거웠으니 좋다. 어쩌면 태정이가 더 연애편지를 잘 쓸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문장을 끌어들여 “여기서 향수는 바로 너야!”하고 말할 것 같은 연애박사 같은.
한일중학교 2학년 1반 14번 이수환
이수환은 양다리를 걸친다.
그리고 우리 남자인 친구한테도
안 사주는 아이스크림을 여자 친구한테 사준다.
정말 실망이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것은
여자 친구가 수환이처럼
2명 이상 있으면 정말 나쁘다.
남건우, <이수환>
그런데 점입가경이라고 건우가 수환이의 실체를 밝히고 말았다. 끼리끼리 뭉쳐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수환이가 최종 승자인 것처럼 살짝 건들건들하면서 앞의 세 친구를 굽어보고 있는 것처럼 엄한 태정이를 가지고 장난을 한 셈이다. 마음으로만 고백하다 마는 친구나 남자 친구한테 커플링을 받고 고백을 받을 뻔한 친구가 보기에는 수환이가 한없이 우러러 보이는 나쁜 남자인 것이다. 짠내 나는 시들이다. 그래도 교과서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시 놀이 삼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보았으니 적잖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친구는 키가 크다.
내 친구는 키가 작다.
내 친구는 똑똑하다.
내 친구는 말썽꾸러기다.
내 친구는 뚱뚱하다.
내 친구는 말랐다.
김준환, <친구>
매일같이 놀 때마다
지진 날리는 동혁이
화나면
정색을 한다.
내가 전파를 하면
받지도 않는 동혁이
내가 게임 하자고 부르면
같이 안 해주는 동혁이
그래도 내 친구
동혁이
○○○, <동혁이>
한창 연애 기운이 몰아치고 나니 그냥 사내 아이의 물큰 냄새 나는 시 두 편이 나온다. 웃으며 시를 듣고 있던 아이들도 그렇다는 반응이다. 앞의 친구는 좀 더 그 친구에 대한 명언이든 어떤 친구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채 고민 없이 썼다는 것에 공감하는 눈치다. 시에서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찬사일 수도 있다는 말에 동혁이는 살짝 기분이 좋아하는 듯 보였지만 서로서로 시로 놀리고 꼬드기는 것이니 때론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 읽다가 우연히 봤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입니다.”
“너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와 ○○○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너의 부모가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지?
○○○, <나는 누구인가?>
맑은 하늘 아래 베짱이 쉬고 싶다.
누구의 간섭 없이 쉬고 싶다.
오늘 하루 아니 1시간이라도 좋으니 쉬고 싶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존재인가?
○○○, <베짱이>
한 차례 폭풍이 불고 차분한 시로 돌아왔다. 자기만의 고민 시간이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는 것이어도 좋다는 말에 화답하는 시일까? <나는 누구인가?>는 책 읽다가 발견한 문장일 수도 있다. 다른 아이가 시를 베끼면 되느냐고 말한 것을 보면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꿰뚫고 가는 문장에서 다시 물음을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니 괜찮다. 흔히 나는 누구인지 묻는 말에 호구조사하듯 여러 대답을 내놓지만, 그 물음의 실체는 ‘나’라는 철학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뒤에 오는 시처럼 나라는 존재를 쉽게 밝힐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물음이기도 하니, 책에서 찾든, 사람에게서 찾든, 누군가 대답해주든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
다음 시에서 화자는 ‘누구의 간섭’ 없이 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베짱이’가 부럽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한 것일까, 하고 다시 묻는다. “네가 이렇게 한가하게 놀 때냐?”하고 되돌아오는 대답 아닌 대답은 ‘나’라는 존재를 한없이 하찮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까. 쉽게 말하면 ‘멍 때리’거나 ‘리셋’ 할 수 있는 시간마저 없다면, 멈춰 서서 한숨 돌릴 순간마저 없다면 ‘나’라는 ‘존재’는 영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음에 오는 ‘행복’이란 말도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먹고 자고 노는 것이
행복일까?
아니면 무엇이 행복일까?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 <행복이란 무엇일까>
가끔 우리는 이렇게 남에게 ‘행복하냐’고 묻기도 하고 그 말에 대답해야 하는 곤란한 경우를 겪는다. 한창훈 소설가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한겨레출판)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행복이란 게 실체가 없는 거란 걸 나중에 깨달았어요. 단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가 행복했구나’ 정도밖에 없잖아요?”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공부하고 먹고 자고 노는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가혹한 말이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해야만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하고 묻고 있다. 진짜 사랑하고, 진짜 행복한 게 무엇인지 스스로 찾지 않고,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정해놓듯이 강요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음을, 위의 시 화자도 묻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그걸 알고 묻는 것이냐고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장독대 같은 우리 엄마.
365일 고생하는 장독대와 같이
우리의 뒷바라지하는 우리 엄마
엄마도 장독대처럼 오래 사세요.
○○○, <장독대>
아무래도 시 이해를 돕는 첫째 시간에 엄마한테 할 말이 많다고 한 친구의 시 같다. 왜 장독대를 끌어왔을까? 게다가 고생하는 장독대와 같이 ‘오래 사세요!’하고 말하면서 끝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남학생 특유의 짧은 유머일까? 가족을 위해서 뒷바라지하느라 사시사철 된장과 간장, 고추장을 품고 있는 장독대처럼 고생하는 것은 아는데 뜬금없이 그것처럼 오래(건강하게, 맛나게?) 사시라는 겸연쩍은 말을 쓴 것일까? 조금 아쉽다면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단순하지 않고 간결하되 정확하게 감동 받을 수 있도록 표현하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다. 그 시발점에 선 시이니까 다음 시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의자에 앉는다. 의자는 내 몸무게를 버티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연필은 춤추듯 열심히 글을 쓴다.
지우개도 잘못 쓴 글을 잘 지우려고 열심히 글을 지운다.
무엇이든지 다 열심히 하려는 것 같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
박건우, <열심히>
이번 시는 제목이 ‘열심히’이지만 듣기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과연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의자는 내 몸무게를 견디느라 힘든 것이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을텐데, 건우는 버티려고 ‘열심’히 한다고 보았고 연필과 지우개마저 제 역할에 맞게 ‘열심’히 하고 있다. 자기만 빼고 모두,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말을 깔면서 마지막에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는 다짐으로 끝낸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의자>
‘열심히’에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앞서야 하는 것 마땅하다. 기성 시인의 시이지만 위의 시처럼 어머니의 삶과 말에서 얻은 자연스러운 깨달음도 포함되어 있는 법이니 단순한 비교 대상이 아닌 ‘의자’로 시작하여 꽃과 나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넘나들면서 배워야 한다. 시를 통해서 이렇게 배운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물음으로만 끝내지 말고 대답을 얻기까지의 어려운 과정을 겪고 세상 만물이 그렇게 움직이더라는 삶의 철학이 묻어나는 시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의자는 그렇더라도 연필과 지우개는 자신이 움직여서 일어나는 것이니 자신 또한 일정의 몫이 있기에 스스로에게도 위안의 말을 던지며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냐고 다시 묻는 것이어야 한다.
외로운 삶
외로운 삶은 누구나 갖고 있고
외로운 삶은 누구나 해당되며
외로운 삶은 나의 주위에 수없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친구, 내 가족, 다른 사람들
누구나 외로운 삶을 갖고 있다.
외로운 삶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한 번쯤은 외로운 삶을 느낄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의 외로운 삶은 무엇인가…….
정민교, <외로운 삶>
지금 내 머릿속 상태.
원점.
주변 환경은 움직여도
난 그대로 있다.
이근욱, <원점>
끝으로 만난 두 편의 시는 앞서 말한 것에 따르면 막연하다. 생각의 고삐를 더 단단하게 쥐고 몰아야 하는데 힘이 들어서 ‘그대로 멈춘’ 듯한 느낌이다. 누구나 외롭다는 것인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 전에 외롭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외로운 삶이란 무엇에서 오는지, 화자 스스로 누구나 외롭기 마련이라고 말하려면 물음에 대한 답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구나 외로울 수 있다는 말을 풀어 보면 나도 그렇기에 모두가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것 이외에 더 이상의 정의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좀 더 고독에 대해서 배우고 그것에서 얻는 것이 있어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점>은 한 발짝도 뗄 수 없다는 또 다른 외로움이기도 하다. 원점은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화자는 지금 내 머릿속이 무엇으로 꽉 막힌 상태이고 주변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난 ‘그대로 있다’는 명령과도 같다. ‘나는 누구인가’는 물음도 원점에서 더 나아가서 찾고 있다는 것이 말이 아닌 것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물꼬가 될 수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한 핑계를 대서라도 막힌 물꼬를 터야 하는 지점이자, 원점에서 출발하여 자유로운 선을 만들고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임을. 한 편씩 스스로 삶의 기록이 될 수 있도록 북돋워주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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