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와 함께한 아이들-괜찮다고, 별 거 아니라고

시와 함께한 나날

by 참도깨비 2021. 8. 18. 15:14

본문

괜찮다고, 별 거 아니라고

-괴산고등학교 학생 시

 

 흔히 시내권이라 부르는 학교보다 멀리 나갈수록 설렌다. 선생님들은 시골이란 걸 강조하며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말하지만 꼭 그런 뜻에서 설렌 것은 아니다. 좀 일찍 가서 동네 한 바퀴 돌아보거나 시장 구경을 하며 사람을 살피며 분명히 이곳을 지나다녔을 아이들 눈에 무슨 이야기가 걸려있을까, 혹시라도 자신이 사는 곳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게 이름을 줄줄이 적어보기도 한다. 학교 앞 문방구나 떡볶이 가게나 피시방(졸라빨라피시방 같은)을 기웃거려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시 이야기가 시작되면 먼저 터져 나오는 것은 저마다의 마음 이야기이다. 내 이야기가 급한 것이다. 떡볶이 가게 이야기를 하거나 피시방 이야기를 하면 후훗하고 웃어넘기면서 내 이야기부터 들어달라는 듯 쓰는 아이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해가 지네요

해는 져가면서도

빛을 주네요

 

해가 산에 가려져도

내 눈엔 빨간 빛이 남아있네요.

 

그 빨간 빛이 사라질 때,

오늘 내 하루가 끝이 나요.

 

박인하, <해가 지네요>

 

이때쯤이면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집밥 대신 햄버거나 라면에 핫바를 먹을 시간이다. 짧은 시이지만 혼곤하 심사가 그대로 느껴질 만큼 색()이 짙다. 깊은 한숨 섞인 빛깔이라고 해야 맞을 만큼 잔상이 있다. 해는 지면서 빛을 준다는 말, 해가 진 뒤에 더 붉게 마련인, 마음 그 자체이기도 한 빨간 빛을 잠깐 보고 있는 이 멈춤, 할 말은 많으나 다 하지 못하고 하루가 끝이 나는. 공부만 하는데 뭐가 그리 힘드냐는 말은 가혹하기만 하다. 흔히 말하듯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조차 값비싸 보일 만큼, 해가 지면서 하루가 끝나버리며 암전되는 마음을 어찌 어루만져 주어야 할까.

 

무지의 땅에서 차가운 비를 맞으며,

한기가 스며들어 벌벌 떠는 마음이

점차 무거워 쓰러지고

흙탕물과 함께 어둠의 세계로 떠내려간다.

 

모두가 나를 내팽개치고 가버린 아름다운 날씨

 

하지만 이 습기마저 가버린 탓에 모랫바람만

날리며, 나를 따갑게

흩어버린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지 못하게.

내가 나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윤현규, <말라버린 나무>

 

해가 지고 난 어둠의 땅은 내일을 생각해야 하는 무지의 땅일 뿐일까. 현규는 제법 시를 써본 티를 내며 자신을 말라버린 나무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모두가 나를 내팽개치고 가버린 아름다운 날씨가 어쩌면 빨간 빛을 담뿍 안겨주고 가는 해처럼 보인다.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나의 주체로 서 있는 까닭을 말하지 못하게 묶어둔 모랫바람과 내팽개치고 가버리는 차마 아름답기만 한 날씨가 또 그렇다. 스스로 벗어나기에 버거울 수밖에 없는 무지의 땅에 사는 나무가 현재의 모습인 것이어서 안타깝게 읽어주며 아이들의 깊은 공감어린 눈빛을 바라보는 마음이라니.

 

별 것 아닌 말

별 것 아닌 행동

별 것 아닌 일

별것 아닌 사람들

 

분명 별 것 아니고

내 것인데

자꾸만 별 거 같다

 

오늘도 나를 위로한다

괜찮다고, 별 거 아니라고.”

 

이영채, <별 것>

 

그래서 그런 것일까. 별 것 아니라는 말이 표창처럼 날아온다. 아주 시크하게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가 내뱉은 말은 아주 무 자르듯 경계를 나누어버려 다시는 돌아오기 힘든 일을 만들기도 한다. ‘별 것 아닌말과 행동, , 사람들이라고 쓴 것이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고민한다고 할 수 없다. 영채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듣는 별 것 아닌것이 반짝이는 처럼 본연의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꾸만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라고, 그리고 말장난처럼 가볍게 툭 치듯 괜찮아, 별 거 아니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이렇게 자신을 위로할 수 있고 별 것 아닌것이 아니라 진짜 별난 주체임을 선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유독 빛나는 별이 반짝이자

나와 나의 그림자도

-

이며 나타났다.

 

나와 나의 그림자 모두

별을

우러러

쳐다본다.

 

나는 별과 멀어져 있고

나의 그림자는 가까이 있다.

 

별이 스르르 사라지자

나의 그림자도 사라졌다.

 

나만

남아있구나.

 

최서영, <>

 

연이어 서영이는 또 다른 별을 꺼내들었다. 해와 달과 달리 별 자체가 아무리 반짝여도 그림자를 들이기는 어렵다. 별과 함께 빛날 때 나도, 그림자도 존재 의미가 있는데 별이 사라지자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나만 남아있다는 말이 쌉싸름한 맛이 난다. 별이 되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인데 서로 떨어져 있어 분리불안을 느끼듯 보인다. 그림자는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또 다른 주체이기에.

 

못났다

정말 못났다

너를 차갑게 매도하는

고요히 스미는

그러나 크게 요동치는

나의 목소리

 

너를 항변하는

그 두터운 외침

몰랐다

정말 몰랐다

 

거울 앞

우두커니 선

 

너 그리고 나

 

지예선, <후회>

 

예선이의 후회는 흔히 생각하는 것이지만 스스로 내놓기 어려운 문제이다. ‘는 다른 존재인 듯하면서도 정작 읽고 나면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울이 바로 그런 효과를 만들어내는 대상이다. 거울은 나를 타자의 눈을 통해 보게 하면서도 나를 나답게 바라보게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스스로 못났다고 말하는 첫 마디부터가 어디로 포문을 겨누었는지 알 수 있다. ‘너를 항변하는 그 두터운 외침이 거울로 반사되거나 라는 낯선 대상에 투영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타자와의 일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할 터이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맞서며 후회든 다짐이든 할 수 있는 것도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너와 싸워도 다음날 널 한 번 보며 잊고

힘든 일이 있어도 다음날 널 한 번 보고 잊었다.

이런 자린고비 같은 나에게

너와 함께 할 수 없는 이 자린

너무 힘겨운 고비다.

너는 잊지 못하고 상처 받는데

너도 나와 같을 것이란 생각으로 일관했던,

나의 요즘 하루 일과는

널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너의 목소리를 최대한 듣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너와 마주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되어버린 지금

난 이제 다음날 널 한 번 보며

이 아픔을 잊을 수가 없다.

 

이도영, <자린고비>

 

그런 를 직시한 화자는 타자와의 관계로 인한 일을 실토하고 있다. ‘자린고비는 지금 이 자리가 고비라는 뜻이어서 어쩌면 은어처럼 들리지만 분명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한 아픔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마저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부디 아픔이 스스로를 성숙하게 만들고 관계가 돈독해지길 바랄 뿐이다. 이 시를 읽어주는 동안 누군가는 듣고 있을 테고, 그마저 아니라면 도영이를 아는 친구가 전해줄 테니 진심이 벌써 통했다고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작업실 마루에

앉은 노란 가루

 

말로만 들었던

송화 가루였다

 

전에도 식물을

잘 몰랐다지만

 

소나무는 알고

본 적도 있었다

 

송화는 못 봤던

이 식물 바보는

 

머쓱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윤서정, <송화>

 

쉬어가는 자리인 셈이다.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거나 진지한 시를 쓰기보다 그냥 생각난 대로 머쓱한 느낌을 표현한 시다. 시를 쓰기 위해 대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본보기 시를 보니 문득 생각한 것을 머쓱하게.

 

뭐 하나 말도 안 섞었는데,

재밌는 농담도 없었는데

그냥 웃으시더라.

 

아들이 있으시다더라.

꽤나 사랑하시더라.

그냥 즐거워 보이시더라.

 

그 눈이 빛나는데

아주 밝게 빛나는데

그게 아직도

왜인지 모르겠더라.

 

○○○, <시인을 만났다>

 

꽃이 피어나듯

날짜가 흘러가고

 

꽃가루를 찾는 벌과 같이

시를 찾아 시인을 만나고

 

꽃가루를 발견한 벌과 같이

시인으로 시를 발견한

나는

 

오늘 하루

달콤한 꿀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전두이, <>

 

역시 쉬어가는 자리 또 하나. 시로 조금은 소통인 된 듯하여 늘 이런 자리는 가슴이 찡하다. 처음에는 시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요?’ 시를 써서 생계는 해결할 수 있나요?’처럼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시가 생계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없듯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자 삶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는 가운데 형성된 암묵적인 연대이지 않을까.

 

양말에 구멍이 뚫려도

어때, 자신의 삶의 내력을

진솔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우스꽝스런 구멍 속에서

진지한 삶이 보여서

참 재미있고

배운 것도 많아

기쁜 날이었어.

 

최지나, <구멍>

 

다시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 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바라보거나 단짝들과 또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하던 아이들 가운데 발견한 구멍하나. 하마터면 내 양말에 구멍이 뚫렸는지 볼 뻔했다(농담이 가능하다면). 아이들에게도 이런 눈이 있다. ‘구멍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매력 있는 시다. 어느 정도 못나고 예쁘지 않아도 허락한다는 여유이자 그것을 채우는 삶의 내력을 본다는 말이어서 이렇게 중의적인 뜻을 깔아놓고 시를 쓸 줄 아는 마음에 감사할 뿐이다.

 

똑딱똑딱똑딱똑딱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

정말 빛의 속도로

 

내일 모레 숙제가

내일 숙제가 되고

내일 숙제가

오늘 숙제가 되는

 

시간에 하도 부딪힌 나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네가 밉다.

 

최유나, <시간>

 

비단 고등학생들만의 촉박한 시간이 아니다. 초등학생들도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쓰면 그 빠름빠름에 대해 말한다. 이렇게 빠른 것이 아니라 어김없이 가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말해주고 싶지만 어디까지나 만국공통어처럼 하는 말이니 시간에 하도 부딪힌 나를 새롭게 보면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모두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가버리면 어떻게 할지, 시간을 타박하고 있는 마음 또한 느껴지는 시다.

 

매일 같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매일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듣는 평범한 일상

나는 항상 생각한다

내일은 뭔가 다르겠지.

 

김가린, <오늘도>

 

시간의 다른 버전이다. 평범한 일상은 시간에 부딪히는나를 보는 것이나 다름 없다. 날마다 똑같게만 느껴지는 지루함을 넘어선 이 기분, 다시 내일은 다르겠지, 하며 수동적으로 견뎌보지만 어김없이 변화없이 다가오는 내일이 암담하게 느껴진다. 이 틀을 깨고 시간에 얹혀 흘러간다면 어떨까?

 

나른한 공기

멀리서 들려오는 밴드 소리

잠은 찾아오고 눈은 감기네

 

류두희, <>

 

이 친구는 누가 뭐래든 책상을 베개 삼아 잘 수 있는 공력이 있다. 됐고.

 

차 타고 밥 먹으러 가는 길, 내 옆자린 어머니.

음악 들으며 가다 말없이 내 무릎을 베고 누우셨다.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누워계셨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차. 어머니의 머리도 흔들린다.

흔들흔들, 내 머릿속도 흔들린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이 필요할까.

조용히 손 얹어 살짝 받쳐주고 잡아준다.

나도 말 안 하고 어머니도 말 안 한다.

하지만

그걸로 되었다.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따스함은

분명히 기억하니까.

 

윤수호, <무릎베개>

 

마지막으로 가족에 대한 시 세 편을 읽는다.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그러나 나오면 비슷한 시가 되기도 하지만 어렵게 꺼내놓는 아이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수호의 말처럼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느 때는 간절하게 표현된 말이 필요하겠지만 이런 순간은 말없이 느끼고 가는 것이 더할나위없이 좋다. 좀처럼 오기 어려운 순간이기에.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따스함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것이니.

 

늙은 일본인 무사가 젊은 유럽인 신부를 심문하고 있다

아니, 내 아버지가 나를 심문하고 있다.

그와 나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다.

그는 신앙을, 나는 성소를 포기한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이상협, <심문>

 

중간에 덜컥 이런 시도 있다. 축구를 잘 하고 싶은데 공부만 하라는 부모의 말에 과감히 1번 문제냐, 2번 문제를 선택해야 하는 초등학생의 시처럼 상협이도 아픈 손가락 하나를 떼어야 할 것처럼 말했다. 꿈에 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하다가 그것이 아버지가 단도직입으로 선택 아닌 포기를 강요하는 꿈으로 바뀐, 이것은 현실이다. 꿈에서 신부에게는 신앙을 아니 개종을 포기하도록 한 것처럼 상협이게는 성소를 포기해야 한다고 심문하고 있는 것이니 어찌 이것이 꿈이겠는가. 벌써 포기한다는 것을 보여야 했으니 암담함이 숨겨져 있다.

 

나에게 한없이 커 보였던 아버지의 손

나에게 한없이 높았던 아버지의 키

내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해주었던 아버지

아버지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현관으로 뛰어나갔던 나.

 

나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보이는

아버지 몸에 남아있는 흉터와 상처

아버지보다 더 커버린 나의 키

아버지가 밤늦게 집에 와도 아는 체 만 체하는 나.

 

어느 날 함께 갔던 목욕탕

아버지의 등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다.

 

김범진, <우상>

 

앞서서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대화가 끊긴 고정관념의 캐릭터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상이란 말이 동기부여가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한없이 커보이던 존재가 심문하는 자일 수 있다니. 서로 다른 유형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과 대화로의 소통이 부족한 공간에 자리잡은 현실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분리불안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시 앞에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인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관계망에서 성장해야 하는 주체들에게 다시 시로 보여주어야 할까. 문학이 치유가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아이들 시에 대한 간단한 소감이니 각자의 시로 보여주시길 바란다.

 

2019. 11. 29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