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
굳이 공동화 현상을 말하지 않아도 떠난 집과 떠난 가게들이 느는 마을. 잠바떼기를 걸치고 가다 보면 옷덜미를 확 낚아채듯 빈 가게에서 불어오는 바람. 사람들은 자꾸 교육 때문에 신도시로 이사를 가고 학교마저 한 학급으로 줄고 우리가 그토록 이상에 가까운 학생수라고 일컬었던 아이들로 벌쭘해진 교실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오늘 또 한 아이가 전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눈을 껌뻑일 때는 그것이 마음에 남는 얼룩처럼 느껴진다.
가게들이 빠져나가는 것도 썰물처럼 한꺼번에 일어난다. 다들 장사가 안 된다고 하며 투덜거리다가 밤짐 싸듯 서둘러 빠져나간 가게에는 채 가져가지 못한, 아니 그냥 버리고 간 물건들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가게를 보면 내가 사는 마을의 옆구리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 허전하다.
인사를 나눈다는 것이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프게 할 것 같았는지 밤봇짐을 싸듯 가버린 가게.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분식집이나 무슨 대리점 비슷한 것이 들어오겠지. 방 하나 딸렸으니 온 식구가 집 삼아 들어오겠지. 아니면 오래도록 휑하니 빈 채로 오고 가는 길만 흉흉하게 하다가 '임대'란 종이를 계급장처럼 달고 기다리겠지.
그런데 어째 눈이 있는 것인지 왜 안 되는 자리에 그렇게 민들레처럼 잘도 들어오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음식 만드는 일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까. 식당이 들어왔다가 그릇들만 남기고 가는데도 또 그 자리에 식당이 또 들어온다. '칼국수집 차렸어요' 란 가게 이름도 있었다. 애교있게 말하는 듯해도 절규에 가깝게만 들리더니 몇 달을 못 버티고 나갔던 적도 있다. 또 어느 때는 가게 주인이 슈퍼를 차린 적도 있다. 이것 저것 물건을 들이고 냉장고 큰 것 하나 들여놓고 아이들 주전부리를 파는 이름도 거창한 '번영슈퍼' 였다가 마트에 밀려 없어지기도 했다.
그저 민들레처럼 그렇게 피었다가 지고 또 피는, 그 속절 없는 대궁들만 같아 한 때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다른 마을 가게 앞을 지나다가 무슨 취재라도 하듯 들여다 보며 들켰던 민들레를 보고 말이다.
저 민들레처럼
환한 대낮에 셔터가 내려진 가게 앞에
민들레꽃이 피었습니다
조금 열린 셔터 밑으로 아무렇게나 뒹구는 상품곽들
저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어도 되는 것인지, 악만 남은
거웃까지 보여주어도 되는 것인지,
일일이 젖히고 나와 가게 주인의 전개도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한창일 때는 저 셔터가 수없이 오르내리며 그이의 밥벌이가 되어주고
한 평밖에 안 되는 가게라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쏟아져 들어오는 금싸라기 같은 햇빛에 노곤해지기도 했을텐데
밥벌이는 따뜻한 밥상 하나 차려주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다시 식당이나 하다가
그것도 망해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다단계로 찾아다니고 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
민들레가 그 사람이 떨구고 간 눈물 한 방울처럼 뜨겁습니다
대궁 대궁 열두 대궁 몸쌀나게
피어오르고 또 그이의 영혼처럼 솜방망이를 만들어냅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또 한 무리의 사람들 바짓단에 묻혀가기도 하고
저 홀로, 뿔뿔히 흩어져 소식도 없다가
죽지만 않는다면 이 땅에서
저 민들레처럼 불을 지피고 있을 거라고 믿어봅니다
그렇겠지 싶다. 어디선가 또 먹고 살고 있겠지. 교육을 위해 신도시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 말고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의 빈 가게를 들여다 보며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민들레 한 포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대궁 수만큼 피는 꽃들. 곧 솜방망이를 일으켜 한숨 한숨 내쉬듯 떠나보내겠지. 아니 저 알아서 어딘가에 내려앉겠지. 민들레 씨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아프지 않게 내려앉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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