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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리 가는 길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1. 9. 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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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리 가는 길

 

 


 그 길인 줄은 몰랐다. 가도 가도 처음 가보는 듯한 길이어서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그 길이었다. 고단리 가는 길.
 아우라지강을 끼고 달리는 레이바이크를 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서 간 길이 강릉 고단리로 가는 길이었다. 전에는 명주군 왕산면 고단리였던 그 고단리.
 고단리에는 친구가 살던 고향집이 있었다.
  
 멀리 청주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와서 문학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지금은 강릉시가 된 곳이지만 고단리란 이름만큼 하늘 아래 첫동네라고 해야 할 만큼 오지였던 산동네 고단리. 불알친구는 아니었지만 함께 글을 배우며 둘도 없는 친구였기 때문에 스스로 불려들어간 것일까. 고단리를 지척에 두고 참 묘한 마음이 들었다.
 
 무작적 기타 들고 배낭 들고 영암으로 지리산으로 대구로 강릉으로 전국일주를 하다가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치기어린 싸움끝에 경월 소주 먹고 헤어져 돌아오기도 했던 그 친구는 지금 오래 오래 잠수를 타고 있다잘 다니던 문학출판사를 나와 독립하고 베스트셀러는 아니더라도 좋은 책 몇 권이라도 내고 싶었던 꿈을 접고 부도에 부도를 겪을 수밖에 없어 서울땅 깊이 잠수를 타고 있는 친구의 고향 앞에서 끝내 욕심을 부려 고단리를 지나칠 수 없었다. 마음이야 아직도 친구의 아버님이 있는 고단리를 찾아가서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몇 년만에 방명록을 타고 들어와 거듭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간 탓에 더욱 그리워지는데도 얼음 언 강처럼 먼 봄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돌아서 오는 그 길.
 
          배추를 뜯고난 배추밭에
          아직 배추는 있다
          생각대로 자라지 못했거나
          배추벌레에 제살 뜯긴
          기형의 배추들은
          여름이 가는 여린 햇살에
          한겹 생명을 벗고 있다
          부드러운 흙에 한알 씨앗을 묻으며
          손끝으로 묻어나던 배추의 푸른 꿈
          가락동으로 간 건강한 배추들은
          아버지 쓰라린 웃음이나
          검은 머리 댕기 누이의 가슴을 생각하며
          깔깔거릴 지도 모르지만
          황황한 밭에 남은 저 배추들은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바람불고 찬서리 서리서리 내리면
          노란 장다리꽃 하나도 피우지 못하고
          한떼 청한 꿈들이 뿌리째 말라가겠지만
          한줌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들
          살살 첫눈으로나 내릴까
 
                              안경수, <고단리 5> 전문
 
 
 
 그 친구는 끝내 시를 버렸는지 모르겠다. 함께 동인 활동까지 하며 재기를 하려고 했지만 다시 무너지면서 서울 땅 어느 출판 골목에서 말 못할 삶을 살고 있겠지. '한줌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픔들'을 뿌리째 움켜쥐고 술을 마시고 있겠지.
 그 친구를 아는 이들은 종종 안부를 묻는다.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였고 동인 활동까지 하던 녀석이니 내게 안부를 묻는 것이라 친구에게도 연락을 끊을 만큼 모질다니, 섭섭하기도 하다. 고향 가까이 일 나가는 또다른 동기가 아버님이 계시는 고단리까지 한 번 찾아가보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렇게 해서 연락이라도 닿아서 등이라도 한 번 툭 쳐주면 얼마나 속시원할까 싶다.
 
                    그날 아버진 세 바퀴 굴렀다
                    한다
                    손바닥밭 세 바퀴 굴렀으면 많이도 굴렀지
                    아직도 내 것이 아닌 트렉터로
                    비탈밭 내리는 달빛을 갈다가
                    몇 잔 농주에
                    그만 별들이 취하더라고
 
                    아버진 부러진 다리 터져버린 머리보다
                    아직도 살아 툴툴거리는
                    트렉터로 기어가
                    기어이 그놈의 기계 숨을 죽이고야
                    벌렁 누워
                    - -
                    눈을 감아도 별은 보이더라고
 
                                   안경수, <고단리> 전문
 
 
 그 친구는 고단리 연작을 많이 썼더랬다. 세 바퀴 구르면 많이도 구른 것이라는, 비탈밭 내리는 달빛을 갈다가 몇 잔 농주에 그만 별들이 취하더라고 말하는 참 따뜻한 서정을 가진 시인이었다. 아니 다리 부러지고 머리를 다쳤는데도 아직도 '살아 툴툴거리는' 트렉터 숨을 죽이고야 몸을 누이던 천상 아버지의 우직함을 닮았던 농꾼 같은 시인이었다. 아버지 닮아 키는 작고 트위스트 김을 닮은 얼굴이었지만 술자리 좌장을 마다 하지 않고 팔도에서 모인 대학 동기들을 아우를 줄 알던 촌놈이었다.
 
 내가 포르릉 박새처럼 고단리로 들어선 것은 바로 어느 해 여름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던 해 여름,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고단리에 갔던 여름밤이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구절리역 광장에 서있던 마을버스(정확한 이름은 오지버스라고 해야 할 만큼 낯선 한자투 이름이었는데 잊었다)에서 보았던 여량, 가로 열고 아우라지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강릉 가는 기차를 타고 가다 증산역에서 아우라지 가는 기차를 갈아 타고 밤늦게 여량에 내렸을 때 고단리 가는 막차는 벌써 끊기고 구비구비 걸어야 했던 에움길. 마침 보름달이었는데 환한 밤길이어서 여량별곡이나 어라연 같았던. 말티고개 같이 뽑아 올리는 자갈길을 몇 번이나 가로 지른다고 비탈을 타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갔었지. 여량에서 국밥에 소주를 먹었을까. 탱탱해진 오줌보를 몇 번이나 터뜨리고 어느 길가에서는 질퍽한 똥도 누었었던 여름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웃어제끼던 처녀처럼 떠들어가면서 갔었지. 송기원의 '월행(月行)'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도 하는 그 길에 대한 시를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만큼.
  
 고단리에 닿았을 때는 새벽이었다. 새벽인데도 깨어서 대처 나갔다 돌아오는 아들과 그 아들의 친구를 반갑게 맞아주던 둥글둥글 감자알 같던 부모님.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어둔 새벽에 정말 손수건 한 장 같은 하늘이 우리가 걸어온 길의 사연을 말해주었지. 고단리 못 미쳐 만난 빨간 양철지붕에 흙벽을 하며 칠흙 같은 품을 웅크리고 팔을 벌려 맞아주던 그 곳을 어찌 잊을까. 부스럭 부스럭 남겨둔 주전부리를 꺼내놓듯 쥐들도 반갑게 머리 위를 들락거렸던 그곳을 어찌 잊으리. 아침에 일어나 밥값 한다고 꼴을 베러 나갔다가 서툰 지게질에 꼭 세 바퀴 굴렀던 비탈을 어찌 잊으리. 막 밭에서 나온 감자알처럼 쓱쓱 얼굴을 닦고 웃어주던 부모님과 멋쩍게도 바랑 한가득 풀들이 잡아 끄는 바람에 또 한 번 지게를 지고 엉덩방아를 찧던 일까지 잊을 수가 없다. 친구란 그렇게 나눠가지는 한 점 바를 게 없는 생선살 같은 것이었는데 부록이 재미없는 불혹이 되어 친구를 그리는 마음이라니. 길을 잘못 들어서야 떠올리며 언젠가 술 한 잔 툭 터놓고 하자는 전갈만을 기다리는 꼴이라니.
 
                쉰을 넘긴 갑판장 이씨는
                아직도 조기잡이배 갑판장이다
                청바지에 박찬호 모자를 푹 눌러쓴
                자칭 30년 경력의 베테랑 뱃놈 이씨는
                양재기 잔에 되들이 소주를 부어도
                좀처럼 취하는 법 없는 술꾼이다
                XX를 입에 달고 살아도
                좀처럼 쌍스럽게 들리지 않는 욕쟁이다
                마누라 도망간 지 오래고
                딸 하나 여대생이라는데
                이씨도 진짜 여대생인지 알 수 없다고
                삼류 소설 같은 그의 흔적을 풀어 놓으면
                그 바람 난 겨울 파도도 잠시 몸을 숙인다
                아들 같은 선장
                가끔 그를 바다 도둑놈이라고
                잡으라는 고기는 안 잡고
                바다만 낚는다고
                저 노인네 좋은 바다 다 훔쳐서
                고기가 들지 않는다고 타박하면
                ,
                어디 별 다른 바다 있을까
                저 휘청이며 밀려오는
                먹물처럼 번져오는 그리움이
                다 내 바다이지
                해인(海印) 같은 얼굴을 바다에 씻는다
                바다가 하얗게 끓는 날이면
                막소주 미끼삼아 바다를 낚는 이씨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취하면 취하는 대로 흐르는
                이씨가 낚아놓은 바다엔
                어떤 등푸른 고기떼가 산란할까
 
                                   안경수, <갑판장 이씨> 전문
 
 
 그 친구는 부도 끝에 잠수를 탔다가 오랜만에 재기를 해서 다시 책을 만들었다. 공사장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하고 먼 바다 고깃배를 타기도 했다고 하며 눈물어린 삶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고단리를 가는 여름밤 대학 친구가 아닌 삶의 잔뼈가 제대로 굵은 갑판장 이씨를 닮은 시를 쓰고자 했다. 다시 동인지를 내고 열띤 토론을 하며 '먹물처럼 번져오는 그리움'을 미끼삼아 바다라도 낚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
 
                 숭어떼가 알몸으로 파고드는
                 童話의 바다
                 가벼워질 때까지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씻고
                 가벼워질 때까지
                 눈물을 쏟고
 
                 그래서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작고 가벼워진 내 섬에
                 그래서 다시 사랑이 산다면
 
                 남애리 투명한 바다
                 지느러미 곧게 세우고
                 떠돌던 사랑을 풀겠네
 
                 그대의 바다에 내려
                 그래서 작게라도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가만히 얼굴 담글 수 있다면
                 그래서 한 몸 될 수 있다면
 
                 남애리 투명한 바다
                 풍경(風磬) 같은 수면 위에
                 멈추지 않는 시를 쓰겠네
 
 
                                  안경수, <남애리> 전문
 
 
 
 바닷일에 공사판일에 걸걸해졌다가도 한없이 여린 감성으로 사랑 찾아 결혼도 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던 친구. 딱 고단리 감자알처럼 몸에 맞는 만큼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서정과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했던 그 친구는 지금껏 연락이 없다. 잘 나가는 문학출판사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어라연'이라는 출판사를 차렸을 때까지 그는 책 낼 돈이 없는 동아리 후배들이나 우리들의 동인지와 인쇄물을 거저 찍어주기도 하면서 막 퍼주는 친구였다. 좁은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서 시 토론을 하고 인쇄 골목 밥과 술을 나누기도 했던 기억들이 고단하게 떠오르는 길. 시는 그렇게 친구를 따라 살아 숨쉬고 우리가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삶의 이야기와 함께 고단리 가는 길에 있었다.
 
 친구야, 이렇게 네 시를 찾아 고단리 길에 덮으며 불러본다. 그해 여름밤 고단리 가는 길처럼 말끔한 부록 하나 다시 갖고 싶다. 불혹에 부록으로 나온, 고기 뱃속에 두둑하니 든 알 같은 부록 같은 시를 만나고 싶다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허름한 텐트 들고 무작정 올랐던 지리산 노고단에서 맞던 비바람 같을까. 밤새 물 퍼내며 뜬눈으로 지샜던 그날 같을까. 고단리 가는 길처럼, 살아 숨쉬는 기계 숨을 기어이 끄고야 드러누워 별을 삼키던 아픔만 할까 싶다. 부디 살아있다면 전갈하렴. 비루하다 여길 지 모르지만 그동안의 혼곤한 삶에 이만 총총, 하고 마침표를 찍고 전갈해라. 언젠가 친구들이 모여 놀았던 어라연에 살던 어름치 눈이 네 눈처럼 타는 아우라지에서 띄운다. 나도 술이 늘었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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